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의에 목마른 자(마 5:6)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의에 목마른 자(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8가지 복을 말씀하시되 질서 있게 체계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3 가지 복은 복된 행위라기 보다는 복된 마음에서 얻어지는 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된 심령이 받게 되는 복이었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복 받을 마음씨를 가져야 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튼 심령의 상태가 복 받을 상태가 되어야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팔 복에 나타난 첫째 복은 빈 마음, 즉 가난한 마음이요, 둘째는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는 애통하는 마음이요,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는 온유한 마음입니다. 이상 세 가지가 다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 받을 마음씨는 없으면서 복만 달라고 하면 복이 오겠습니까? 되풀이되지만, 복의 길에 서서 복을 구해야지, 복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복을 구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4번째 복은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방향을 이웃으로 돌립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것은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목마르고, 배고픈 것처럼 애쓰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란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의 총칭이 은혜라면, 구약성경의 총칭은 의입니다. 이 의는 율법의 기초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한 계시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하신 복된 길이 바로 이 의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종교학을 공부해 보면 기독교외에는 의를 내세우는 종교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말하지만 의의 개념은 희박합니다. 유교에서도 효를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역시 의의 개념은 희박합니다. 의가 먼저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평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유교의 효는 맹종을 원하는 것으로, 효보다는 충()이 먼저였다는 것입니다.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충을 이용하는 것으로, 충을 말하기 위해서 먼저 효를 내세우는 간접화법을 썼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효보다는 의가 먼저요, 화목보다도 의가 먼저입니다. 의가 없는 화목을 논한다면 그것은 야합이요 도둑의 결탁으로, 오직 의만이 선의 기초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에 최우선이 의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도 의로우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본의 아니게 무당종교를 한 3년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에니미즘(animism)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닥터 디펫이라는 분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한국에 다녀간 적도 없는데 한국의 무당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아메리카 인디안의 샤마니즘과 우리의 샤마니즘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래 알라스카를 통해서 건너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닥터 디펫은 한국무당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무당은 아무리 연구해도 그 속에 의가 없습니다. 필자는 무당들의 주문이 들어있는 황천무가라는 책을 열심이 보았습니다만 그 속에 의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미신이기 때문입니다.

의란 오직 생명의 종교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지나치게 말하는 분들은 하나님도 그 의에 매여서 의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의란 구원의 근거요, 생명입니다. 이사야 45:8에 보면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이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가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려와서 땅에서 의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즉 의의 근본은 하나님으로 그 의가 땅에 임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구원의 길로서, 의의 구원이요 의의 심판인 것입니다. 이사야 46:12에 보면,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구원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병을 낫게 하고, 눌린 자를 해방시키고,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며, 죽을 사람을 살리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즉 구부러진 것이 바로 되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의로운 사람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고, 죄인은 멸망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악이란 의가 굽혀지는 것으로써 의가 가리워진 상태입니다. 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어서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으로, 죄인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심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의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의로우신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왕이신 그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우선 예수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적었고, 또한 오셨다는 소식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입니까? 그들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식이 반가웠지만, 빌라도와 같은 죄인들은 불안하고 무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주러 왔고, 전쟁을 주러 왔으며,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에게는 심판으로,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또한 의란, 하나님의 뜻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 나타남이, 즉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가 의입니다.

잘 아는 대로 사람은 바른 말을 하게 되면 말소리가 분명합니다. 진실된 말은 간결하며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롭지 못한 말을 할 때는 몸부터 뒤틀립니다. 말소리는 크지만 불투명하며 수식어가 많아 자연히 말이 길어집니다. 페스탈로찌는 말하기를 "매끈매끈하게 다듬은 돌은 예쁘다, 그러나 매끈매끈하게 다듬은 말은 무섭다"고 했습니다. 가장 강한 힘은 의의 힘입니다. 나를 중심한 생활은 의를 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은 의를 찾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담대하며 자신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죽음이 있어도 담대한 것입니다.

필자는 대단히 창피한 경험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군대에 다녀와서 얼마 있으면, 예비군 훈련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한 달씩 훈련을 했었는데 제게도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 교회를 맡아 있었으므로 상당히 바빠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영장이 3번 나오고 곧 단속기간이 되었습니다. 거리에 나가면 눈에 보이는 사람이 순경이라 이리저리 피해서 다니려니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여전도사님과 심방을 가다가 붙잡혔습니다. 깜짝 놀란 여전도사님은 무슨 큰 죄를 지었나보다 생각하고 손에 낀 백금반지를 얼른 뽑아 주셨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사양하며, 이 기회에 훈련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이틀정도 훈련을 받았는데 교회에 급한 일이 생겨 훈련을 다하지 못하고 다시 나왔습니다. 얼마 있다가 교회가 가장 한가한 아주 추운 겨울에 자원해서 이 훈련을 치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훈련을 끝내고 나니 전에는 그렇게도 많이 보이던 순경이 잘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니 가끔 길에서 만나도 여유 있게 인사하며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 죄짓고 못살겠다는 큰 경험을 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금방 죽어도 담대할 수 있으니까요. 불의란 사람을 유치하게 만들고, 조잡하게 만들어 아주 못쓰게 되고 맙니다. 한번 거짓을 하고 나면, 그 거짓을 기억해야 되고, 그 거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만들어야 하니, 얼마나 머리가 복잡해집니까? 자연히 두통과 신경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많아지고 쑥덕거리자니 피곤하고 잠도 잘 안 오며 소화도 안됩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면, 깨끗하게 사실대로 사니 얼마나 단순합니까? 의에 대하여 목마른 사람은 의를 따르려고 힘쓰는 사람이므로 복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심리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자기 나름의 복을 받고 삽니다. 그에게는 창의력이 있고 용기가 있고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의가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권세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다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율곡 선생님의 말씀가운데 "언제나 의를 행하라,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죽여서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 길을 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지혜로운 자는 의가 만사에 근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출세나 번영이 먼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의가 우선 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된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육체적인 욕구에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삶에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우리말 가운데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이 있습니다. 먼저 옷을 입고, 먹고, 그리고 집으로써, 이 순서는 유교사상에서 만들어진 용어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양반은 얼어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 말입니다. 굶는 한이 있어도 우선 옷을 잘 입어야 한다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에서 나온 말인 듯 합니다.

그러나 625때 우리 모두가 경험했듯이 피난 가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옷이 우선 입니까, 먹는 것이 우선입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먼저 먹어야 하고, 그리고 입어야하며 집은 제일 나중입니다. , 주란 말입니다. 이렇게 먹는다는 것이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꺼번에 많이 먹을 수 없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먹고 일년정도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릴 수 없으므로, 계속 먹어야 하는 고충이 있습니다.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의롭게 살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의로와야 합니다. 일생동안 나라를 위해 수고하다가 마지막에 한번불의로 기울어지면 역적이 되고 맙니다. 끝까지 의로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은 절대 필요성 때문인 줄 압니다. 특별히 팔레스타인 근방은 굶주림이 많았습니다. 흉년이 자주 들고 사막이라 먹는 것이 귀했습니다. 우리들은 좋은 땅에 태어나 목마름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사막지대에서는 물이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어느 기록에 보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낙타를 타고 가던 여행자가 사막에서 물이 떨어졌습니다. 목은 마르고 견딜 수가 없어서 타고 가던 낙타를 죽여 그 뱃속의 찝찝한 물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사막은 마치 바다와 같고 낙타는 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다를 건너가는 사람이 배를 없앤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낙타를 죽여 물을 마신다는 것은 조금 후에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토록 목마름은 견디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막에서는 배고픈 것보다 목이 말라서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절대 우선, 절대조건으로 의를 앞세운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 ()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고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장 손해보아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필자가 잘 아는 사업가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가끔 푸념하시기를 "나는 왜 어릴적부터 예수를 믿어 가지고 이렇게 손해를 보지? 조금만 늦게 믿었으면 돈 좀 벌었을 텐데……" 하며 사업에 손해가 많다고 말해 왔습니다. 사실,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볼 때가 있습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희생을 지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해나 희생이 아니라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셨습니다. 의를 이루기 위해 얼마만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제사법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려고 할 때에도 죽음이라고 하는 큰 희생이 수반되어야 했습니다. 이 엄청난 댓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수동적인 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능동적인 의를 요구하고 그리스도는 수동적인 의를 요구한다"고 마틴루터가 말했습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가 의를 이루자, 네가 의를 이루라, 네가 의를 성취하라"고 강요합니다. 겸손하게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의가 아니라 형제의 의요, 내 의가 아니라 부모님의 의요, 내 의가 아니라 교회의 의요,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써, 이 의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의롭지 못한 가운데서 의로움을 받고 있다고 하는 그런 의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하면, 나는 의인으로 살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면, 두렵고 떨리지만,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에 아버지께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는 이제부터 아들 자격이 없사오니 머슴꾼의 하나로 대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은 척도 안 하시고 "너는 내 아들이다, 소를 잡아라, 반지를 끼워라, 비단 옷을 입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에 아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습니까? "아버지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몹쓸 놈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외양간에서 일꾼으로 살겠습니다"라고 사양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까? 이런 자세를 능동적인 의라고 합니다. 다 부러지고 넘어졌는데도 아직도 교만은 남아있습니다. 내 스스로 의롭겠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이제부터 얼마동안 종살이를 해서 체면을 세운 다음에 아들 노릇을 하겠다는 능동적인 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에 관계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에,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아들 노릇을 하겠다고 하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수동적인 의입니다. 체면도 없고 형님의 눈치도 따갑지만 아들 노릇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내 의가 아니라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의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그 의를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이 바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인이면서, 계속적으로 의인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의가 최우선임을 알고, 이 의를 위하여 모든 희생을 지불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람을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배부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풀이하면 의를 얻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원래 의라는 것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므로, 죄인이 생각하는 의는 아무리 의라고 해도 죄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미 죄를 진 사람들이 의라고 생각을 하면 그것은 죄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우상이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죄인 덩어리가 의라고 떠들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한 번 간사한 사람이라고 점 찍힌 사람은 어떤 말을 해도 간사하게 보이고 아첨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정상을 회복하기가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죄인 된 사람은 의로 우려고 하는 노력마저도 죄로 연결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또 하나의 죄를 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신문에 났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자기 형님 집에 돈을 훔치러 들어갔습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갔는데 조카가 방에서 자고 있어 몰래 돈을 들고나옵니다. 이 때 자던 조카가 "삼촌"하고 그를 부르니 순간적으로 잘못을 감추기 위해 조카를 죽였습니다. 잘못된 상태에서도 체면을 살리겠다고, 즉 의로운 자로 위장하려고 또 하나의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죄인 된 사람이 죄를 벗어나려고 하다가는 점점 더 많은 죄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면, 의를 이룰 수 있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를 받게 되고 득의 하게 되어, 진실로 의인이 되고, 의인의 명예와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부를 것이다 라는 말처럼 의와 함께 찾아오는 부수적인 복까지 받게 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의로운 자에게는 하늘 문이 열려서 무슨 축복이든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는 자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외출했다가 증자를 만났는데 증자는 자하가 많이 뚱뚱해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은즉 싸움에서 이겼다고 대답을 합니다. 증자는 당신이 언제 싸웠길래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고 의아해 했습니다. 자하는 자세히 설명하기를 그가 최근에 옛 임금들의 역사를 읽었는데 거기에서 의로운 사람은 잘되고 불의한 사람은 잘못된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의롭게 살아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거리(세상)에 나가 보니 반대로 불의한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책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잘되고, 세상에는 불의한 사람이 잘되어 가나 혼란이 와서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자하의 마음속에서 두 마음이 계속 싸우다가 결국 세상에서 잘 된 사람은 보지 말고 책이 말해 준대로 의롭게 산 사람만 보고 그 길로 가자고 결의를 했더니 살이 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이 복을 받도록 준비되어 있으면 생활에도 복이 함께 합니다. 의를 구하기를, 마치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구하며 계속적으로 수고하면, 그에게는 복이 주어지며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나뭇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나무를 하러 다니면서 매일같이 보는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 바위를 볼 때마다 그는 바위처럼 의젓하고 인자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소원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나뭇꾼은 자기 친구에게 그 소원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보니 듬직한 바위와 나뭇꾼의 인자한 얼굴이 서로 닮았더랍니다.

바위를 볼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소원했기에 그 사람의 얼굴과 바위의 모습이 비슷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의에 대해서도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늘 갈구하면 의로와 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의로 채우고 그 의로 배 부르는 그런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