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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야 일어나라(누가복음 8장 41~42절, 49~56절)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에는 한 회당장의 믿음을 중심으로 해서 교훈을 주시는 의미심장하고 상징적인 사건이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환자 자신이 예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는 이러한 유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의 이적은 믿음을 보시고 행하신 이적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야이로의 믿음을 보시고 고치신 것도 아니요 죽어 가는 어린아이의 믿음을 보신 것도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성장케 하시려는 의도로 행하신 이적이라 하겠습니다. 교육적이고 교훈적 의미가 이 사건 안에 있습니다.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마는 야이로의 믿음은 어느 한계에서 끝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야이로를 인도하셔서 마침내 훌륭한 믿음에 도달하도록 하십니다. 간혹 우리가 이러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능력이 좀 있다고 병든 자를 고친다거나 남을 위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 않으면 마지막에 가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에게 믿음이 없어서 안 낫는 것이다'라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 장사된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셨습니다. 죽은 자에게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본인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버지의 믿음으로 딸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마는 아버지의 믿음도 지극히 불완전한 믿음입니다. 상식적인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들이 '믿거나 말거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이루어집니다. 그의 믿음이 온전하든 온전하지 못하든 하나님의 경륜하신 계시적 사건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한치의 가감도 없이 그대로 나타나고 행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할 때에 모든 필요한 역사는 마치 탱크가 밀고 나가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어서, 혹은 예수님 앞에 충성을 바쳐서, 혹은 저들이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었던 것이 아닙니다. 준비된 것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야이로도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다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주저하지 않습니까? 집에 가보니 죽었다고 울고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내실 양으로 "잔다"하시자 모두들 비웃습니다. 도대체가 못마땅합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 마는 저 같으면 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들의 태도를 보아서는 괘씸해서라도 살리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가정에 큰 사건을 나타냄으로 야이로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고 주위 사람들의 불 신앙을 심판하십니다. 새로운 믿음, 새로운 신앙고백을 하도록 강권적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계시의 역사-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야이로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쯤 되면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귀족입니다. 부자이자 존경받는 유대인입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이요 지성인입니다. 웬만해서는 갈릴리 청년한테 와서 무릎을 꿇을 사람이 아닙니다. 쉽사리 예수님 앞에 찾아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큼 콧대높은 사람입니다. 죄인의 친구인 갈릴리 청년, 그 비난받는 예수에게 흥미를 가질만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인데 단독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집에 와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불행한 사건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찾게 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불행은 질병일 수도 있고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는 흔히 인간적인, 혹은 세상적인 불행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그로 인해 간절하게 되고, 진실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온유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 당할 때에 더 진실합니다. 같은 기도를 해도 고난 당할 때의 기도가 더 간절합니다. 사람이 간사해서 그 모양인지, 어려운 지경이 되면 간절히 기도하다가도 사정이 조금 풀리면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바뀌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시간에는 많이 나오셨습니다만 요즈음은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분들이 조금 줄었습니다. 대입 학력고사가 끝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비가와도 오고 눈이 와도 오더니 이제는 눈이 오면 안나옵니다. 간사한 것이 우리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과연 이래도 되겠습니까? 체면도 없고 염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게 했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 불행한 사건이 다행스런 사건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어린 외딸이 병들어 앓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병 고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죽어버린 것입니다. 불행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차라리 죽은 것이 잘된 일입니다. 죽었다가 살았으니 대단한 것입니다. 감기 정도 걸렸다가 나으면 고마운 것을 모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는 불행할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가 많이 나옵니다. 전설에도 그렇습니다. 다음 번에 공부하게 되겠지만 12년 동안 혈루증 앓아오던 여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병이 나은 다음, 너무 감격하여 고향에 돌아가 자기 집 앞에 비석을 세워놓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에게 증거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병을 고쳐주셨다. 나를 단독적으로 만나 주셨다'하고요. 예수님을 만남으로 불행이 큰 은혜로 바뀌고 귀중한 사건으로 발전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떠한 형편에서 만났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바로 만나기만 하면 그 순간에 내가 당한 모든 사건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새로운 의미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사건의 발단을 생각해보십시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게된 것은 자식이 병들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었다면 예수님께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 방법을 강구했을 것입니다. 약으로도 의사로도, 백방으로 애써보았지만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마지막입니다. 아이의 체온은 식어가고 숨이 넘어갑니다. 하다하다 안되니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불행이 야이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타인의 문제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의 사랑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자녀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도 아들딸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떤 부인은 남편이 사우디에 가 있는 동안에는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오더니 그 남편이 돌아오니까 그 다음날로 나오지 않더군요. 사람이란 이렇게 간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갔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딸이 지금 죽어갑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님 앞에 매달립니다. 당시의 사회에서 이 사람은 자존심 있는 사람이요, 체면과 위신을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선뜻 나올만한 입장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라면 그대로 죽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입니다. 사랑하는 외딸입니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많습니다. 몇 살인지는 모르겠으나 살만큼 살았으므로 자신의 일이라면 오늘 끝난다 하더라도 그리 한스러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은 미래의 사람입니다.
가문의 미래입니다. 앞이 창창하다는 말입니다. 자녀 문제라면 얼마든지 자존심을 굽힐 수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외동딸, 그 딸로 말미암아 그는 체면이고 위신이고 아랑곳없이 예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열두 살이면 중요한 나이입니다. 옛날에는 어려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니 아직도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같은 곳에서는 열세 살 될 때까지 호적에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많이 죽기 때문입니다. 많이 낳는 이유도 그렇습니다. 많이 낳아놓아야 못되어도 몇 명은 살아남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듯합니다. 아무튼 옛날에는 어려서 많이들 죽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자녀가 몇이었는지는 모르나 지금은 하나입니다. 그 외딸이 열두 살이 된 것입니다. 제법 처녀티가 납니다. 성인 대접을 받아야 할 나이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열두 살부터 성인 대접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살 때에 성전에 올라가십니다. 그처럼 중요한 나이입니다. 다 키웠다 싶었더니 죽게된 것입니다. 절박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은 필연입니다. 누구나 결국에는 죽습니다. 삶과 죽음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별수 없습니다. 나만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죽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얼마 전에 몸져누우신 칠순 교우 한 분을 문병하고 나오면서 제가 한 말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한번 더 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출장만 가지 않으면 장례식에는 꼭 오겠습니다. 집사님,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저도 곧 뒤따라 갈테니까요. 조금 먼저 가고 조금 뒤에 갈 뿐입니다. 그렇게 아시고 먼저 가세요." 그랬더니 빙그레 웃으십디다.
죽은 사람 놓고 '아이고, 아이고' 우는 것을 보면 많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울 것 없습니다. 나도 같은 신세입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간차가 있을 뿐,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 갑니다. 죽음을 놓고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심각해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죽을 것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불평이 많은 사람도 죽으라고 하면 싫다고 합니다. 노인들도 그렇습니다. "괴로워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면서도 "빨리 가시오"라고 하면 큰일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예삿일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열두 살난 아이인데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참으로 똑똑하고 믿음이 깊은 아이인데 백혈병으로 죽어갑니다.
72세된 장로님이 찾아가서 위로합니다. "어떡하면 좋으냐? 나는 이제 다 살았다마는 너야말로 살아야 할 날이 많은데 이렇게 일찍 가면 어떡하느냐?"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했답니다. 그러자 이 어린아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합니다. "장로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세상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찍 갈수록 좋죠 뭐. 살기 힘든 세상 떠나서 이제 예수님 앞으로 가니 저는 좋기만 한걸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전도해야 된다고 하던데, 저는 친구들을 열두 명 인도했습니다. 일 년에 한 명씩 인도한 셈이예요. 장로님은 72명 인도하셨습니까?"
야이로의 집에서는 죽어 가는 사람을 놓고 죽을까봐 야단이 났습니다.
저들도 괴로운 세상이라고 탄식하면서 어린아이가 그 괴로운 세상을 떠나 일찌감치 갈 길을 가려 하는데 모두들 매달려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심리학적 측면에서 생각할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 49절에 말씀합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야이로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딸이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모시고 왔는데 도중에 죽었다는 전갈이 온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인간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의사들도 이런저런 약을 쓰고 시술을 하다가도 숨이 끊어지면 손을 놓고 나가버립니다. 시트로 덮어버리고 맙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 숨넘어가면 끝입니다. 인간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인간 능력의 한계요, 지성의 한계요, 상상의 한계요, 사랑의 한계입니다. 모든 것의 한계가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야이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의사선생님으로 알고 모시고 가는 길인데 어쩌라는 말입니까? 만일에 야이로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신 부활신앙을 가졌더라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갑시다, 갑시다' 했을 터입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믿음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의사로 알고 모셔가려 합니다. 메시야가 아니요 생명의 주인이 아니요 다만 의사일 뿐입니다. 살아 있을 때나 필요하지 죽은 다음에는 소용없는 것이 의사입니다. 장의사라면 모르지만 의사가 갈 필요는 없겠지요. 남은 일은 장례식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야이로는 난처합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굉장한 말씀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상상을 넘는 초월적인 능력입니다. "죽은 자는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예수님께는 사나 죽으나 같습니다. 죽었으면 살리면 되고 병들었으면 고치면 됩니다. 예수님께는 거침이 없습니다.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로 이런 믿음, 굉장한 믿음입니다. 어느 때에라도, 어떤 위기에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한계가 끝나는 때에도 믿어야 됩니다. 다 끝났다는 말은 하지 말 것이요, 망했다는 말은 하지 말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에다 뿌리를 박고 내가 할 수 없으니 하나님도 못하신다, 나의 경험 속에 없으니 하나님도 못하신다, 역사에서 본 일도 들은 바도 없으니 하나님도 못하신다-이렇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능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을 일단 믿고 야이로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갑니다. 이 점 훌륭합니다. 이 사람이 좀 까다로운 사람이었다면 "예수님 그만둡시다. 죽고 말았다니 어쩌겠습니까?"하고는 체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야이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또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비판을 맡겼습니다. 자기의 소원도 맡겨버렸습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예수님께 완전히 위탁해버렸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이 점이 야이로의 훌륭한 점입니다. 여러분, 믿어지지 않거든 잠깐동안 아무 말 도하지 마십시오. 조용하게 기다리세요. 서둘러 비판하지 말 것이며, 성급하게 절망하지 말 것이며, 오직 기다릴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여자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도 '마리아는 그런 여자가 아닌데'하며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습니다. "믿기만 하라,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채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그만하면 대견스런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 갔더니 모두들 벌써 장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우는 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성경곳곳에 "울며 통곡하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온 집안이 울음소리로 가득합니다. 회당장의 집이요. 이 집의 열두 살짜리 외딸이 죽었으니 얼마나 요란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들어서시면서 하신다는 인사말이 밑도 끝도 없습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장례식을 빨리 치릅니다. 죽자마자 바로 치릅니다. 빨리 썩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더워서 오래두면 냄새가 심하게 나서 대체로 12시간 이내에 해치운다고 합니다. 야이로의 집에서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이없어합니다. 죽은 게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눈으로 이미 확인을 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살려내실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살아나면 잠이 깊이 들었던 것이지 별것입니까? 특별한 잠을 잤을 뿐입니다. 다시 깰 것이니 잔다고 하셨을 뿐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필요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다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잤습니다. 좀 깊은 잠, 좀 이상한 잠을 잤을 뿐입니다. 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잠입니다. 다시 살아난다고 믿을 때, 부활을 믿는 눈으로 볼 때, 죽음은 분명 잠입니다. 깊은 잠, 깊은 안식입니다. 그러나 비웃는 사람들의 눈에는 죽은 것이 확실합니다. 살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상황 끝'입니다. 그걸 보고 "잔다"하시니 어이없어 비웃습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하나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하나는 신앙적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도 사실이요, 이 사람들의 판단도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사실과 사실이 만나는 순간, 사람들이 이 사건을 놓고 비웃었습니다. 저라도 비웃었을는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비웃을 수밖에 없었는지 모릅니다.
때로 우리가 비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 특별히 독실하게 믿는 사람의 믿음은 세상사람이 볼 때에 분명히 바보스럽습니다. 어리석고 한심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니 비웃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비웃음을 당하면서 교회 나오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조소를 받으면서 나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볼 때에는 충분히 비웃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에, 그것도 시장하고 피곤한 몸으로 교회에 나와 늦도록 앉아 있는 다는 것이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약간 돈 사람'으로 비칠 수 있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 일주일에 한 번 가면 되지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가고 저녁에도 갈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비웃음은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엄청난 신앙과 사건이 비웃음을 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일컬어 잔다고 아주 평화롭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데 자녀들이 죽 둘러앉아 있습니다. 아들딸들이 둘러선 가운데 신앙이 좋은 어머니는 하나, 하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그 마지막 인사가 "굿 나잇"입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자는 뜻으로 "굿 나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한 아들에게만은 "굿 바이"라고 인사합니다. 그 아들이 섭섭한 나머지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저한테는 왜 '굿 나잇'이라 하지 않고 '굿바이'라고 하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예수를 믿으니 천당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너는 다시 만날 것 같지 않아서 그런다.
너는 예수를 안믿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 아들, "저한테도 '굿 나잇' 해주십시오. 예수 믿겠습니다" 하더랍니다.
여러분, 죽음은 '굿 바이'가 아닙니다. '굿 나잇'입니다.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피터 마샬 목사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라고 인사했답니다.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부인은 후에 유명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 할머니를 만나보았는데 참 은혜가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이를 놓고 마치 잠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딸아, 일어나라"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달리다굼"이라 하십니다. 이말은 주문(呪文)이 아닙니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딸아, 일어나라"-잠자는 아이, 고요히 잠든 아이를 깨우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개념, 죽음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죽은 사람을 향해서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검도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 말씀의 생명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여실히 보게 됩니다.
한 가지 덧붙여 생각해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으켜 세우신 후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휴머니타리아니즘(humanitarianism)입니다. 퍽도 인간적입니다. 살려놓았습니다 마는 계속 살게 하려면 먹여야 됩니다.
'살려내실 바에야 기왕에 먹지 않고 살도록 할 것이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살리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부득불 먹어야 합니다. "먹을 것을 주라." 그 동안 앓느라 오랫동안 못 먹어서 허약해졌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요, 건강을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믿음을 성장시킴으로, 치유하는 능력만 믿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비로소 믿음인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생명의 주, 부활의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믿고, 부활 신앙을 가질 때에 비로소 우리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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