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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열리라(마가복음 7장 31~3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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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라(마가복음 73137)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성경에 나타난 이적이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마는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적은 선교적이요 창조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한 사람의 귀머거리를 고쳐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치시는 과정, 고치시는 의도, 방법, 결과-이 모든 것이 한 편의 중요한 설교요 중요한 강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 속에 숨어 있는 귀한 말씀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상고해보면 얼마나 마음 아픈 말씀인지 모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상고하면서 마음으로부터 눈물에 젖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예수님의 그 탄식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 그 예수님의 아픈 마음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공감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에는 이방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사람들의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가시는 걸음걸음 만나는 대로 고쳐주셨습니다. 이방 땅에 다니실 때에는 이방사람들을 고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그곳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유대사람이고 이방사람이고 똑같이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자고로 유대사람들의 이방사람들에 대한 멸시 의식은 대단한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으로 보지를 않으니까요. 아예 버려진 사람으로 천덕꾸러기로, 짐승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당시는 그런 의식이 특히나 대단했던 때입니다. 그런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사람과 이방사람을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한결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이점을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십니다. 건강한 사람도 사랑하시고 병든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복음서의 어느 문면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사람 차별하는 의식을 절대로 가지면 안됩니다. 이는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 몸소 가르쳐주시는 절대적 교훈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낮고, 남자고 여자고, 늙은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그렇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 그것만 볼 것이요, 그밖에는 어떤 것도 보아서는 안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람을 차별하든가 능멸해서 대하는 의식은 절대로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지닌 기본적인 철학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자(7 : 26)는 이방인 가나안 여자입니다. 유대사람들은 가나안사람이라면 개와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처럼 더럽게 여겨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족속의 여자가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오면서 귀신들린 자기 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쳐주십니다. 뒤에 공부하겠습니다마는 또 하나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도 이방사람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돼지를 싫어합니다. 그런 돼지 무리 속에, 무덤 사이에 살고 있는 귀신들린 사람이라면 사람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겉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려 발광하고 소리지르며 쏘다니는 정신병자 그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셨습니다. 여느 사람과 똑같이 여기시고 고쳐주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 지방에서 갈릴리로 오시는 중입니다.

오시다가 이방땅 수로보니게 여자를 만나셨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이방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 여인의 종교적 배경을 묻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이방사람이 신구약 성경을 아느냐 모르느냐, 십계명을 아느냐 모르느냐, 율법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있느냐,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이상은 마찬가지요,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않은 이상 그들의 윤리. 도덕. 문화 따위가 문제될 것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도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십계명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풍속은 유대사람들이 볼 때에는 더럽고 형편없는 것이지마는 상관하지 않고 대하셨습니다. 특별히 메시야 대망 사상도 없고, 그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대해주십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 이방사람도 똑같이 대하고 그들의 병도 고쳐주셨다고 하는 사실은 선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귀먹고 어눌한 자(32)"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귀머거리요 벙어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귀로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어떤 책을 하나 읽어보았더니 장님과 귀머거리를 비교해놓았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둘 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오관이야 어느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몸이 1000원이라고 한다면 눈은 700원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장님과 귀머거리를 한번 대비해볼까요? 어느 쪽이 더 불행할 것 같습니까? 한번 따져봅시다. 장님은 눈에 아무 것도 보지를 못합니다. 빨갛고 노랗고도 모르고 밝고 어둡고도 분간 못합니다. 외형적인 것, 겉으로 나타난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들음으로 인해서 소통이 가능합니다. 의사 소통이 가능합니다. 남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장님 중에는 문학가도 많고 의사도 많고 음악가도 많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얼마 전에 한번 왔던 오르가니스트 한 분이 있지요? 장 삐에르뢰게라고 하는 그 오르가니스트는 소경이지만 노트르담 성당에서 무려 20년 동안이나 오르가니스트로 있는 분입니다. 우리 나라 세종문화회관에도 두 차례나 와서 연주를 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 보니까 참 편리한 것이 하나 있습디다. 우리 교회에 와서 연습하는 걸 보자니 악보가 없어요. 악보 없이 연주를 하더라는 말입니다. 손으로 건반을 한번 더듬더니 그대로 연주해나가는데, 얼마나 훌륭한 음악이 되어 나오는지요.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당신 어떻게 해서 그토록 오르간을 잘 치는 거요?" 그랬더니 싱글벙글 웃으면서 한다는 대답이 참 재미있고도 여유 만만해요. "나는 이것밖에 할 것이 없거든요." 옳은 말이지요. 그것 밖에 뭘 하겠습니까? 다른 것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밥 먹고 그것만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바하에 대해서도 권위자라고 하는 그 사람의 연주는 에누리없이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감스럽게도 귀머거리는 연주를 못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장님은 못 봐서 불행하지만 들음으로 인해서 깊은 내용, 깊은 뜻, 모든 사상을 다 들을 수 있고 소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머거리는 겉으로는 다 봅니다. 사람도 보고 형체도 봅니다. 꽃도 보고 그림도 봅니다. 그러나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므로 뜻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전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선 음악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이야기도 못 듣고 나쁜 이야기도 못 듣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답답한 것입니다. 뜻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존재다-이것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신학교에도 소경 학생들이 옵니다. 강의를 들으면 자기네끼리 점자로 찍고, 시험 볼 때에만 구두시험으로 치르면 됩니다. 이렇게 되니 수강(受講)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참 어려운 것이 귀머거리입니다. 눈은 멀쩡한데 벙어리요, 귀머거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의를 해도, 제가 강의 시간에 늘 보면 노상 멍청하게 혼자 앉아서 책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그런 걸 모르고 나무랐습니다. "학생은 왜 강의 안 듣고 책만 보나?" 그랬더니 옆의 학생이 설명해줍니다. "이분은 못 듣는 사람이에요." 앉아 있지만 들을 수 없으니 아무 것도 모릅니다. 시험 볼 때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통역을 해줘야 됩니다. 손짓으로 수화(手話)를 해서 통역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책에서는 외적으로 볼 때에는 장님이 더 불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격적 내적 존재를 놓고 생각할 때에는 귀머거리 편이 더 불행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벙어리의 90퍼센트가 귀머거리입니다. 귀머거리가 때문에 벙어리지 원래 벙어리는 아닙니다. 입의 구조는 완전합니다. 들리는 것이 없으니까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니까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배운다는 문제를 놓고 볼 때에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입니다.

귀머거리 말이 났으니 말입니다 마는 저에게는 귀머거리에 얽힌 마음 아픈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인천제일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서울의 영락교회에 농아부가 있습니다. 그 농아부에서 봉사하고 있는 농아 전도사 한 분이 노량진 어느 교회의 여전도사님 아들이었습니다. 신학교도 나오고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인천에 주일마다 내려와요. 그래 제일교회에 농아부를 만들었어요. 농아 학생이 참 많이 모였습니다. 저는 농아 학생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었습니다. 인천에 그분이 와 있는 동안에 줄잡아 30여 명 모였더군요. 이 사람들, 아침에 와가지고 저녁까지 돌아가지를 않아요. 교회에서 먹고 놀고, 성경공부 하고 이야기합니다. 저들끼리 손으로 이야기하면서 하루종일 놀다가 저녁에 돌아갑니다. 그분도 저희 집에서 점심을 먹고, 어떤 때에는 저녁도 먹고 저녁예배까지 보고 밤중에 기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날도 주일날 저녁인데 기차를 타고 돌아가다가 노량진역에서 기차를 내릴 때입니다. 정식으로 플랫폼에 내렸으면 좋았을 걸 다른 사람들이 눈치 빠르게 플랫폼 아닌 쪽으로 뛰어내려 저쪽 역으로 달려들어가는 통에 그걸 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있으니까 다 피해서 갔지만 멀리서 오는 기차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한강을 막 넘어서 삐익하고 올라오는 기차 소리를 이 분은 못들은 것이지요. 기차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천천히 걸어가다가 아뿔사 그대로 받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돌아가셨어요.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 큰 기차소리를 못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뛰는데도 이 사람은 천천히 걸어갔던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제 가슴아픔이 도지곤 합니다. 듣지 못하는 자의 아픔이 이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아무리 자랑해서 좋은 이야기도,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은 사람을 보시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십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주님의 그 탄식을 가리켜 전 인류를 위한 탄식이라고 확대해석 합니다. 인류 역사에 나타난 모든 귀머거리를 위하여, 복음을 듣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표적인 탄식인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심입니다. '이 불쌍한 사람아!' 바로 그 주님의 아픈 마음을 우리 한번 절실하게 음미해보십시다.

복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0:1415)." , 복음은 들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전하면 들어야 되고, 듣되 바로 들어야 됩니다. '반벙어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잘못 들리면 잘못 말하게 마련입니다. 제가 아는 한분도 참 마음 아픈 일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 같이 교회에 나가곤 했습니다.

남들이 '천당'이라고 하면 '떤강'이라고 해요. 자꾸만 떤강, 떤강 해요.

왜요? 그 사람의 귀에는 천당이라고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떤강'이라고 들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고 자꾸 비웃어요. 그러나 이 사람은 남들이 왜 비웃는지를 몰라요. 자기가 뭐라고 입만 뻥긋하면 사람들이 자꾸 웃습니다. 본인은 남들이 왜 웃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속이 상하니까 마구 화를 냅니다. 여러분, 잘못 들려지면 잘못 배우고, 잘못 배운 대로 행하게 되면 비웃음을 살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똑바로 들어야 됩니다. 이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똑바로 들어야 됩니다. 비뚤어지게, 부정적으로, 왜곡해서 듣는 것처럼 고약한 일이 없습니다. 신앙이 아주 고약해지기 때문입니다. 병든 신앙, 비뚤어진 신앙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삿일이 아닙니다. 어디 섞여도 문제가 됩니다.

좀 이야기하기가 뭣합니다마는 요사이 미국에는 우리 나라 여기저기서 살던 사람들이 다 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 가보면 우리 나라 각 교회 사람들이 다 섞여 있습니다. 영락교회 사람도 있고, 순복음교회 사람도 있습니다. 소망교회 사람도 있고 할렐루야교회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섞여놨으니 더러는 목사님들이 쓸데없이 전도평가라는 것을 할 때가 있습니다. A교회 출신은 역시 달라, B교회 출신은 역시 말썽이야, C교회 출신들은 역시 그 교회의 잘못을 배웠더구먼-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고맙게도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기인지는 몰라도 "소망교회 교인 좋아요" 합디다. 무엇이 좋소 하고 물었더니 소망교회 교인 좋은 것이 하나 있대요. 시간 잘 지킨다더군요. "시간 되게 잘 지키지요. ''하면 들어서거든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하면 휑하니 가버리니까요.

오는 시간만 지키는 게 아니라 가는 시간도 지킵니다. 아무튼 이것이 문제입니다. 들은 대로니까요. 소망교회 출신 교인은 소망교회에서 배운 대로지요. 그야 안 배울 수 있나요? 들은 대로 달라진 것입니다. 이거 어쩔 수 없는 것이 다른 곳에 가면 반드시 드러납니다. 안 보고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어느 교회 출신이구나, 이 사람은 또 어느 교회 출신이구나 하고 말 한 해도 알 수 있습니다

듣는 대로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문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야겠는데 막혔습니다. 무엇인가가 막혔습니다. 병들었습니다. 선입관에 막혔습니다. 죄와 교만과 욕심과 몰이해-이런 것으로 미리 막혀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그릇이 있습니다. 여기에 무엇을 담으려면 먼저 이 그릇을 깨끗이 씻고 나서 거기에 담아야 합니다. 깨끗이 씻지 않고 무엇을 담으면 어떻게 됩니까? 저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을 가끔 기억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구멍가게에서 과자 하나를 사먹었는데 죽었습니다. 왜 죽었느냐-과자를 암만 뒤져보아야 과자에는 나쁜 것이 없어요.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에 가서 밝혀진 사실인즉 과자를 싸준 종이, 다시 말하면 과자봉지가 농약봉지였다는 것입니다. 농약 쓰고 비워놓은 그 봉지를 가게 아주머니가 아무 생각 없이 과자봉지로 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죽은 것입니다. 내용물이 나쁜 게 아니라 그릇이 나빴던 것입니다. 그릇에 오물이 있고 독물이 묻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 못한 채 아직도 응어리진 무엇, 앙금진 무엇, 풀지 못한 무엇, 못돼먹은 무엇이 그대로 있는 데다 말씀을 들으면 듣는 말씀마다 비뚤어져 들리는 것입니다.

바로 들릴 턱이 없지요. 이래서 바로 소화하지 못하고, 바른 믿음에 서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안 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듣는데도 못 들어요. 처음에는 들려지는 것을 내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거역하고 안 듣고 안 들었더니 이제는 들어도 들려지지가 않아요. 들려지지 않는다-이처럼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늘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와서까지 못 듣고 돌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이를테면 오늘같이 눈도 많이 온 날, 이런 날에까지 왔다가 공치고 돌아가는 사람,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모처럼 왔다가 무슨 꼴입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꼭 들어야 되겠는데 바로 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시간에는 안 들음으로 못 듣게 된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안 들어서 못 듣게 되고 들으면서도 안 듣는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심판 받을 수 밖에요. 자기가 한 일에 벌받고 심판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탄식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인데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가끔 딱한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예수 꼭 믿어야 천국 가나요?" "그럼요. 예수 믿어야 천국 가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누가 전도해주지 않아서 그랬지 한마디만 전도해주었으면 꼭 믿을 사람이었는데요. 참 착한 분이었어요. 그런데 예수 못 믿고 세상 떠났거든요. 천국 갔을까요, 지옥 갔을까요?"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입니다. 그와 같이 복음을 듣기만 하면 한번만 들어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정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듣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교인 가운데도 그런 분 얘기 한번 들어봤습니다. 어느 아파트에 사는데, 그 동안 자기는 예수 믿는 이웃을 얼마든지 가져봤다는 것입니다. 친구며 이웃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데도 아무도 자기보고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를 갔더니 바로 건너편에 사는 사람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데, 못 견디겠더랍니다. 하도 교회 나가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억지로 한번 나와보았다는 것입니다. 나와보니까 또 다른 불평이 하나 생기는데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좋은 예수를 어찌하여 그 동안 저희들끼리만 믿었는가, 왜 날보고 같이 나가자는 소리를 안 했느냐 하는 원망스러움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주위 사람들, 참 고약했구나 싶더랍니다. 이제 이분은 대단히 열심입니다. 늦게 믿었으니 빨리 따라가기 위해서는 '과외수업' 좀 해야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수년 동안 모인 우리 교회의 설교 카세트 테이프를 빠짐없이 사가지고 가서 전부 듣는 것입니다. 빨리 따라가기 위해서라고 하니, 그런 분을 볼 때 그동안 예수 모르고 지내온 것이 참 아깝구나 싶어요. 그런가하면 더욱 불행한 탄식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들은 분은 아실 것입니다. 얼마전에 북한에 다녀온 교수님이 계십니다. 그 교수님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그곳엘 갔더니 김일성대학 학생들이 감시자요 안내자로 따라다니더랍니다. 어디로 나들이만 하면 두 학생(하나는 여학생이고 하나는 남학생)이 따라다니는데 하루는 방안에 함께 앉아 밤늦도록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성경이라는 책이 어떤 책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답니다. 모른다고 하더랍니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책인데 모르느냐,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베스트 셀러인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했더니 그런 소리 못 들어 봤다고 하더랍니다. "한번 보여줄까?" ", 그러세요." 그래서 성경 두권 내놓고 여학생에게는 아가서를 읽어보라고 했답니다. 거기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남학생한테는 잠언을 읽으라고 해놓고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보자고 했답니다. 이튿날에 보니 두 학생이 다 잠언과 아가서를 읽었더랍니다. 밤새껏 읽었답니다. 좋은 책인데 주실 수 없느냐고 하기에 주었답니다. 그리고 금강산을 구경갔는데 보아하니 그 두 학생은 쉬는 틈틈이 나무 밑에 앉아서는 성경책을 열심히 보고 있더랍니다. 교수님은 멀리서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고 그 사진을 저도 보았습니다. 따라서 증거가 분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나무 밑에 앉아서 성경책을 읽고 있는 두 북한학생-그 모습이 제게는 하나의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성경이 무엇인지 모른다-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40년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황차 교회가 무엇인지 알턱이 없지요.

얼마 전에 김만철씨 일가가 남쪽으로 넘어왔을 때, 한 달도 못되어 우리가 한번 불러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강연할 때에 김만철씨가 말했지요? 교회가 있는 줄 아십니까, 교회가 뭡니까, 교회란 미신 하는 곳이라는 정도로 들어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밖에는 들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김만철씨가 지금은 집사 됐습니다. 여러분, 그거 아셔야 돼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북녘땅, 2,000만 우리 동포가 복음이라는 것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번도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하고 있다니, 하늘보고 탄식할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듣고, 듣고 또 듣고도, 그러고도 안 믿었다면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들을 기회가 없어서 구원 못 받았고 한번만 들어도 예수 믿을 깨끗한 마음인데 못 들었고, 온유 겸손하고 청결한 마음인데도 복음을 들어본 일이 없어서 못믿는 경우라면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닙니까? 이 우주에는 지금 얼마나 많은 전파가 있습니까?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케이 비에스, 그리고 무슨 파() 무슨 파…… 그 많은 전파가 오가는데도 내 손에 수신기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안 들립니다. 라디오가 있어야 들리는 방송이 있습니다. 라디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채널이 맞아야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채널이 맞으면 그 좋은 음악도 들리고, 좋은 말씀도 듣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참으로 가엾은 일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밝고, 방송도 많고, 책도 많고 그리고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온 세계에 참으로 많습니다마는 저 북녘 땅은 상금도 캄캄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합디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리라 하셨는데 그 땅 끝이 어디냐? 그게 북한이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땅 끝이라는 것이 거리로나 지정학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복음이 전혀 들어갈 수 없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그곳이 바로 땅 끝이 아니겠느냐,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전혀 들을 기회가 없어서 못 듣는 불행한 사람, 귀가 꽉 막혀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살아온 불쌍한 사람, 그런 사람을 두고 주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십니다. 이 불쌍한 사람아, 너는 어이하여 그토록 단 한마디의 소리도 못 듣고 살았단 말이냐-귀한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탄식이야말로 온 인류를 향한 탄식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탄식입니다. 복음들을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대표적인 탄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따로 데리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주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하시니(3334)"-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귀머거리나 벙어리는 굉장히 민감합니다. 의사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겁을 냅니다.

여느 사람은 상상도 못할 만큼 굉장히 신경이 예민하고 민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참 이상한 행동을 하셨지 않습니까? 이리 나오라고 해서 따로 데려다가 (조용한 데 가서), 두 귀에 손가락을 넣고, 그리고 침을 혀에다 바르셨단 말입니다. 이상하다 싶은 것은 그런 과정을 거치는데도 이 사람은 조금도 반항을 하거나 겁을 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망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런 착하고 순진한 사람아, 너는 듣지를 못했구나-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도와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장애자에 대한 특별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의사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믿음을 주시려 함이요 확신을 심어놓으시려고 그와 같은 일을 하신 줄 압니다. 예수님의 그 행동은 수화(手話)와도 같았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touching communication'------손을 대어서, 접촉을 통해서 의사 소통을 하신 것입니다. 'skinship'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렇게 만짐으로써 사랑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피부 접촉을 통해서 그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심어주고, 위로를 주고, 확실함을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위대한 배려요 중대한 사역이십니다.

그리고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다고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고래로 해석이 구구합니다. 이를테면 희랍의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개인적인 능력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지 않으셔서 이렇게 하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른 능력은 대중 앞에서 거리낌없이 행하셨는데 왜 이 경우만은 비밀로 하시려고 했겠습니까? 그런가하면 윌리엄 바클리의 해석은 한결 재미가 있습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를 자세히 관찰해본 사람의 해석입니다. 당황하기 쉬운 장애자의 신경질적인 반응과 심정을 고려하셨으리라 는 해석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면 자칫하다간 도망가기 쉽습니다. 이것을 아시고 따로 데리고 가시는 배려를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섬세한 사랑이 나타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에바다"라고 소리를 치르십니다. '에바다'는 아람말로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님의 그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들리지 않는 자로 듣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요한 문제 하나를 생각해야 됩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열리라고 소리치시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귀가 열리고 듣게 됩니다. 말씀의 능력을 우리는 언제나 믿습니다. 주검을 향해서 일어나라 하실 때에 시체가 일어납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사로야 나오라"-죽었던 사람이 산 사람이 되어 걸어나옵니다. 바다를 향해서 조용하라 하실 때에 바다가 고요해졌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저 듣고 이해하고, 그리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합니다마는 성경이 말씀하는 말씀의 근본은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빛이 있으라"-천지가 창조됩니다. 말씀의 능력-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내 심령 속에, 내 인격 속에, 심지어는 내 육체에까지도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음, 본문의 끝 대목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36)"-소문 안 나게 되기를 당부하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마가복음을 흔히 '비밀의 복음'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간간이 비밀에 붙일 것을 당부하곤 하십니다. 다시 뒤에 말씀드릴 때가 있겠습니다마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병 고치는 자로 알려지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시지 않았습니다. 병을 고쳐주시지마는 병 고치러 오신 예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저러한 이적들을 행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소문 따라 자꾸 모여들기 때문에 그 군중 심리가 달갑지 않으셨으며, 한 걸음 나아가 예수님의 그러한 인기와 군중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사람들이 많이 생길 것이어서 당신의 사역이 곡해되어 정치에 이용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비밀에 붙이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러 오셨습니다. 병자 치다꺼리나 하자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해 없이 하기 위해서 아무에게나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36)." 주님의 그런 당부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당부하신 깊은 의도를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이 사람 고쳐주시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영적으로 복음에 귀머거리 된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귀머거리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또 한번도 듣지 못해서 못 믿는 불쌍한 심령들-북한은 북한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온 세계가 그 나름대로 복음 귀머거리인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의 가까운 주위에 나와 늘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도 복음을 한번도 진정으로 들어보지 못해서 신앙 생활을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까도 어떤 분하고 잠깐 얘기를 같이 하는데, 자기 아내의 생일이 되었대요. 그래서 "내가 무슨 선물을 해줄까?"하고 모처럼 한번 기억을 해서 한마디했더니 "선물 하나 꼭 줄 게 있어요." "뭐요?" "다음 주일날 교회 갑시다." 그르더랍니다. 그래서 안 믿는 이 사람인데 ", 이거 난처한데요."하기에 ", 돈도 안 드는 일인데 얼마나 좋습니까? 한번 가주시죠 뭐." 제가 농반으로 한마디 해두었습니다.

여러분, 복음을 듣는 일, 중요합니다. 전하는 일,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생명의 역사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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