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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यू की-सेओङ

사랑만 하며 삽시다 요일3:17-24

by 【고동엽】 2024. 3. 19.

사랑만 하며 삽시다             요일3:17-24 

<요한일서의 개요>
1:1~4  - 서론 ‘하나님과의 사귐’
1:5~3:10 – 1대지 ‘하나님은 빛이시다’    
3:11~5:17 – 2대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5:18~21 - 결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을 앎(사귐)’
 
요일3:11절 이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2대지가 계속됩니다.
그 큰 주제 가운데, 오늘의 본문이 이어집니다.

.....................................

어느 목사님께서 전도훈련을 하는데, 
도무지 전도에 자신을 갖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더랍니다. 

그들을 어떻게 전도하게 할까, 생각하다가 상가로 데려가 
가게마다 찾아가서 단순히 말 한마디만 하게 하였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시 인사를 하고 나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전도 못하겠다던 교인들이 전도의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노라고 
간증하더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에 신선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고백만 분명히 해도 
전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고백도 못하고 삽니다. 
간단할 것 같은 이 고백이 쉽지 않습니다. 
이 고백을 떳떳하게 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히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 받았다면, 교인으로 등록되었다면, 집사라면?’

△오래 전에 ‘무슨 로비 사건’이 있어서 몇몇 고위층의 부인들까지 
국회청문회 자리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주일에 누구라고 하면 다 아실 목사님 한 분이 
주일 설교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대신에 선교사님 한 분께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도무지 주일 설교를 하지 못하겠더라는 것입니다. 
청문회 자리에 선 부인들, 평소에 잘 알던 사람들이었고 믿음 좋은 사람들
이라고 여겼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성경책에 손을 얹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 변화되어 더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었겠지만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과연 누가 이 고백을 떳떳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기준을 주셨습니다.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실제로 사랑하지 못하면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부부싸움 하고 나면 큐티하기도 쑥스럽고 새벽기도회 나오기도 쑥스럽죠.

“위선자, 그러고도 큐티할 수 있어? 기도만 하면 다야?” 
운전하다 다투고 난 뒤 교회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참 쑥스럽습니다. 
사람들이 비웃는 것을 느낍니다.

▲요일3: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 
그리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이 축복입니다.

올해부터 금요성령집회 때 전체 헌금시간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구제헌금입니다. 

예수님을 믿든지 아니든지, 어려운 이웃, 어려운 교회, 선교단체들을 
돕는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헌금시간마다 그렇게 감사한 것입니다.

“복이다! 이건 정말 우리가 받은 복이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헌금하자면 기쁘십니까?

잠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궁핍한 사람은 이것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 번 어려운 이들을 도와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기쁘냐?’는 것입니다.


▲18절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19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는 것이 축복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하나님은 나에 복을 주셔.’ 확신이 생기면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확신있는 삶을 사는 열쇠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말씀만 나오면 언제나 자신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항상 마음에 찔리는 문제입니다. 이기적이었고 인색했고 용서하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햇습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사랑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로 인하여 마음의 가책이 있다면 
아직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씨, 사랑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20절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책을 받고 있는 정도이지만 
반드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사랑하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가책을 느끼는 것을 알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리되게 하실 것입니다.

△캐나다 집회 중에 어느 권사님 댁에서 묵는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 하루라도 꼭 묵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그 권사님 집에서 묵었습니다. 

너무나 좋은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정 분위기는 어두웠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 그 가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30년 전에 이민을 하여 예수를 믿었는데, 많은 은사를 체험했답니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몇번 교회를 옮기다가 
지금은 어느 교회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중풍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느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심방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에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설교 중에 물었습니다.
“당신은 정말‘사랑이 제일이지’하고 여기고 있습니까?”

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괴로워하셨습니다. 
저는 그 권사님께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간은 특히 우리 마음에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가책만 느끼다 
인생을 마치겠습니까?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성령충만은 믿음충만, 사랑충만입니다. 지금은 가책을 느끼지만 
반드시 “주님 저는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담대히 외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충만하면 마음에 두려움이 없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21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기도를 해도

주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 믿어집니다.

22절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 집사님이 미국 이민을 갔는데, 사기를 당하여 돈을 다 잃어 버리고 
심지어 폭행도 당하며 마음에 분노와 미움, 좌절감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죠. 
그런데 공부 잘하던 두 아들 마저 방황하며 제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미움의 영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버린 것 같은 위기감에 집사님 내외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며 열심히 기도했는데, 
자꾸 마음에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가족들 사이에서 회개와 용서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손해를 끼치고 말과 행동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두 아들이 공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형제 둘 다 함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그 집사님이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진작 이렇게 마음을 정리했다면 
돈은 잃어 버렸을지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아이들까지 
이런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사랑하라” 결코 무거운 계명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고, 가족을 살리는 길이고 
교회도, 사회도.. 살리는 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나 간단하고 뜻은 선명합니다. 더 이상 먹고 사는 걱정을 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 하며 사는 것입니다.

▲23절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힘든 것이 아닙니다. 
이 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사회가 이토록 과격하고 흥분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사랑이 회복되지 않으면 사회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찾는 것이 왜 이리 힘들어야 합니까? 
나라가 잘 되는 길을 의논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는 미움의 영입니다.

‘잘해보자, 바로 해 보자’하면서 미움을 갖는 것은 전혀 다른 영입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미워하고 싸우면 다 망한다’고 자녀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도 
어른들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영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만약 파업 현장에 나가서, 청와대에 가서 “우리 사랑합시다!” 하면 
양쪽에서 돌을 맞을 것입니다. 하품하고 조롱하고 무시할 것입니다. 
영 분별이 안되니 미워하고 싸우면서 다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 2천만이 다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2천만 한 민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고 외쳤습니다. 
그가 민족을 위하여 고민하고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사랑의 힘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라” 우리 힘으로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닙니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24절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우리는 압니다.

사랑해야 성령님이 오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가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심을 알게 되면 
누구나 믿음으로 사랑으로 살게 됩니다.

△크리스티 김 선교사님이 청년 때, 어느 날 룸메이트가 
많은 형제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는데, 자기에게 꽃다발을 가져다주는 형제는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 자기 혼자 방에서 울었답니다.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창 밖을 보라! 무엇이 보이느냐?’
‘가로수가 보입니다.’
‘이것이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황홀하더랍니다.

그 때부터 김선교사님은 봄 가을로 황홀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그 분이 그렇게 놀랍게 사역하시는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살 거야!”

그러나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다려야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 컴패션>의 서정인 목사님의 책 [고맙다]가 출간되었습니다. 
추천사를 부탁하셔서 읽다가 몇 번이고 울컥하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죠.

그 중에 이런 일화가 있었습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한 여자아이를 위하여 
서정인 목사는 자기 골수를 이식해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골수이식을 해주려면 1주일 동안 입원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골반에 구멍을 내서 주사기로 골수를 채취해야 했는데, 
그만 의료 사고가 일어나 큰 일 날뻔 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골수를 받은 아이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렇지만 5개월쯤 지나 아이의 병이 재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문제는 골수 기증을 다시 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이제 다른 사람의 골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식을 해도 아이가 살 확률이 1% 정도였고 
지난 번 사고도 있어, 아내도 전문의인 매제도, 
주변 사람들 마다 다 말렸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이번에는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그럼요, 어떻게 두 번이나 하겠어요.” 
“목사님, 잘하셨어요. 몸도 약하시고 할 일도 많으신데요.”
  ☞관련기사 https://www.wikitree.co.kr/articles/563153

그런 중에 에콰도르에 비젼트립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난 장로님께 또 그간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인을 얻고 싶었었는데, 
의외로 그 장로님은 “목사님… 하시지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 큰 아이가 백혈병으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 심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들 것입니다. 
그 아이가 살고 죽고를 떠나, 그 아이와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날 호텔로 돌아와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여자아이가 네 친딸이었다면 너는 그 아이를 포기할 수 있겠니? 
설사 1%의 가능성 밖에 없다고 해도 말이야.’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못을 박듯 제게 
다시 한 번 마음을 울리셨습니다. ‘그 아이는 내 것이라!’

이제와서 병원과 아이의 부모에게 생각이 바뀌었다고 전하기가 민망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자원하는 마음도 아니었고 숭고한 동기도 없었다는 것을 
꼭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딸 아이의 생명을 놓고 부모가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을지 느껴졌기 때문이었죠.
‘부끄러운 목사’라고 편지 제목을 쓰고 
그 간의 자기 마음과 상황을 솔직하게 적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항복했기에 골수이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예수님께 매달립시다.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붙잡읍시다.”

한국에 돌아온 후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이식 준비를 하는데, 
아이의 어머니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다섯 장의 긴 편지였는데 
장마다 눈물이 떨어진 흔적이 보였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골수이식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애가 무균실에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감사의 편지를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저도 목사님이 얘기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매달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매달림과 기도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딸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교회에 다니고 있으며, 
그 아이의 아버지도 다른 아이한테 골수이식을 해줬다고 합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힘이 들지만 
주님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기적을 이루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담대히 “나는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하고 외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힘이 내 안에서 강과 같이 흘러나가게 되어,
우리 자신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민족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면 안됩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 주간 오직 주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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