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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비유2(마태복음 13:18-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약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앞장에서 우리는 씨앗을 통한 객관적인 생명의 역사가 우선적임과 아무리 좋은 씨앗이 있더라도 뿌려줄 사람이 없으면 무익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씨앗을 잘 받아들여줄 좋은 밭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씨앗은 좋은 밭을 만나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유산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예 그 씨앗 자체마저 빼앗기고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로 일단 이 마음 밭이 잘 받아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씨를 뿌릴 때에 더러는 길가에 뿌려졌는가 하면 더러는 옥토에 뿌려진다면 이는 반타작은 한 셈이며, 완전치는 못해도 열심히 뿌리기만 한다면 그 중 얼마는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옥토만을 가려가며 뿌리지 않더라도 열심히 뿌리는 그 중에 옥토에 떨어지는 씨앗은 결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케 되는 말씀의 진리는 "열심히 뿌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씨앗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씨앗을 가져다가 뿌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창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복음 그대로를 가감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열심히 뿌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렇게 뿌리고 내일 당장 나지 않는다고 조급해 해서는 안됩니다. 농사하는 이치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기한이 찰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요즈음은 만사가 1분 라면으로 통하기 때문에 걱정입니다. 무엇이든 빨리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 '전자자'라는 것이 좋은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옛날 같으면 남편이 마루에 앉아 음식을 빨리 가져오라고 재촉을 하여도 아내는 "뜸들어야 먹지요, 기다리세요"
음식이야 만들어지고 익혀져야 먹는 것이지 서두른다고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즈음은 3분이다, 1분이다, 게다가 전자자, 속전속결하면서 집안에 앉아서까지 괜히 조급해 합니다. 그래도 옛날에는 남편들의 성미는 급해도 부인들은 급하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전자자 때문에 부인들까지 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가지만은 속성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좌우간 열 달은 채워야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무어라 해도 그것까지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아직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생명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생명에 관계된 모든 것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특별히 인격적 관계나 신앙의 성장이 더욱 그러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예,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쉽게 나와준다면 얼마나 반갑고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문제는 있고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돌밭과 같아서 냄비처럼 쉬 뜨거워지고 쉽게 식어버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빨리 난다고 안심해도 좋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저 부지런히 뿌려두면 언젠가는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가르쳐보면 도대체 가만히 앉아 듣지를 못하고 장난을 치며 말썽을 부립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물어 보며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어른들은 좋은 자세로 머리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싸인(sign) 을 보내고는 앉았는데, 뒤에 물어보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어느 편이 효력이 있고 어느 편이 옥토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장 무엇을 어쩌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오로지 자주 들으며 계속 참여하는 길밖에 다른 지름길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한 시간 참여하고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나오고 또 나와 우선 듣는 기회, 만나지는 기회를 끊이지 않게 갖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자주, 그리고 부지런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깨닫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 변화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오늘부터 당장 변화되겠다고 하여 손가락을 자르며 혈서를 쓰고 맹세를 하는 일들은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렇게 별나고 야단스럽게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마치 씨앗이 자라는 그것처럼 조용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의 배경에 비추어진 복음에 대한 이해요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는 돌밭과 같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주의할 점은 내 마음대로 돌밭을 상상하고 생각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적하시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깊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깊이가 없다는 것은 뿌리가 내려 머무를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싹이 빨리 나기는 하는데 깊이가 없어서 빨리 나고, 더구나 돌 때문에 뜨거워서 빨리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빨리 나온 이 싹이 곧 시들고 말라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 전인격을 가지고 전적으로 위탁한 가운데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말씀을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예수 믿고 "아멘, 할렐루야"하고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며 좋아라고 뛰었는데 그후에 "왜 좋으냐?"고 물으면 "글쎄" 하고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는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인 신앙이어서 지적으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상태입니다. 한 쪽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가슴으로만 받았지 머리로, 의지로 받는 것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뜨거운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이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적으로 받아들여 만족해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공부하며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옳은 말씀, 좋은 말씀"으로 찬사를 보내며 지적인 매력을 느끼면서 끌려갑니다. 그러나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가슴이 싸늘한 것입니다. 아무런 열매도 맺혀지질 않습니다. 잠깐 잠깐은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는 듯 하지만 생활 속에 진정한 복음적 변화가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지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신앙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의지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성현의 말씀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의 도덕률로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고 희생, 봉사하며 사랑으로 산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도덕률로 감탄하고 있음에도 그 생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는 그 심령의 깊은 곳으로부터 생명적 변화가 이루어지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 또한 문제이며 역시 부분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단편적인 교인이 적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말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교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한국 교회에만 있는 학습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제도를 왜 한국 교회는 만들어야 했을까요?
예수 믿는 것을 쉽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세례도 가벼운 흥분 속에 받았다가는 곧잘 달아나 버리고 맙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어떤 책임 의식이나 죄의식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무래도 안되겠다 생각하여 적어도 6개월은 기다리라는 것에서 학습제도가 나온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나오면 그 자리에서 당장 세례 받아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6개월을 기다리라고 했겠습니까? 너무나도 즉흥적이고, 너무나도 감정적입니다. 너무나도 깊이가 없습니다. 마치 돌밭과 같습니다. 좀더 두고 보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6개월을 기다린 다음에 보자는 것이 학습제도가 나온 이유인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한국 교인들을 향하여 이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편에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변덕 장이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인도나 파키스탄 쪽에 가면 세례 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방글라데시 같은 곳에서는 한 사람 세례 받고 한사람 세례 주는 데서 받는 사람도 쫓겨나고 선교사도 쫓겨나야 했습니다. 세례 받음으로 인하여 그 족속, 그 가문, 그 가정에서 쫓겨났고 선교사는 그 나라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한 사람 세례 주었는데 이토록 큰 문제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교나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세례 한 번 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생명을 거는 일인데, 우리는 그렇게 심각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쉽게 대함으로 돌밭과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일시적인 기쁨은 있습니다. 따라서 돌밭은 현재적이고 찰나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기쁨, 감격해서 즐거워지는 첫째의 기쁨은 죄 사함 받은 그 기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면서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는 사실, 과거에 지은 죄와 죄책감, 저주 의식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는 이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감격과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죄 사함을 받았다면 이제는 남의 죄를 사하여주어야 하고 남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내가 용서받았으니 남도 용서를 하여야지요.
그런데 내가 용서받은 기쁨만 가지고 뛰며 좋아했지 남은 용서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돌밭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어떤 때는 축복의 감격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축복을 받았으면 이제는 또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축복은 사명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돈을 복으로 받았으면 돈으로 일해야지요. 누가 은행에 묶어두며, 누가 땅 사놓으라 했습니까? 그것으로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받은 건강이 있다면 그 건강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야지요. 방탕하라고 주신 건강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내가 남달리 좋은 환경에서 은혜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그 쌓은 지식 갖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맑은 총명을 가졌다면 일하는 데 쓰이어야 합니다. 그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축복은 사명 자체입니다. 사명을 알지 못하는 축복에 대한 감격이란 돌밭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사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축복관이란 안개처럼 곧 뒤이어 사라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현재적이고 찰나적이며 순간적인 기쁨만 생각하는 가벼움에 빠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저 앞에는 희생을 요구하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믿음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수고를 치러야 하고 핍박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다 팔아 주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무슨 뜻이겠습니까? 진정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거든 내 가치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영생 중심적인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중심에서 나머지 중요한 모든 것을 팔아 주라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안되니까요. 다 없앨 수가 있고 다 버릴 수도 있을 만큼의 소중함과 행동적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만 있고 기분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저는 잃은 양의 비유를 대할 때면 가끔 짓궂은 생각을 하며 웃어보기도 합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가 애쓴 끝에 찾게됩니다. 주인은 잃은 양을 찾은 것이 너무 기뻐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친구와 이웃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하면서 무엇을 잡아먹었는지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음식의 주가 양이고 보면 분명히 양을 잡아먹었을 터인데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았다고 몇 마리의 양이 죽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어쨌든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저 기쁘고 감사할 때에는 거기에 합당한 또 다른 희생과 봉사가 지불되기 마련인데 그것이 생산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행동화되고 생산화 되지 못하는 감격은 가슴에 맴돌다 식어버리는 죽은 감격일 뿐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입술로 표현하다 닫아버리는 정도의 감격 가지고는 며칠 가지를 못합니다. 조금 전 "할렐루야" 해놓고 지금은 저주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는 비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받은 바 은혜가 깊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돌밭과 같고 깊이가 없어서 입술에서 맴돌다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손발을 움직여주지 않으니 뿌리가 내려가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은혜가 단순히 가슴에서 입으로 이어져 끝나는 정도의 얕은 감상적 은혜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돌밭처럼 얕고 냄비처럼 쉬 끓어 넘치는 변덕스러움이 있는 한 마음의 뿌리는 내리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지적되는 바는 핍박을 이기지 못하는 나약한 믿음을 말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존재(being) 의 문제입니다. 요즈음 심리학에서는 흔히 "비잉(being)이냐? 비캄(become)이냐?"라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비잉(being)은 존재이며 비캄(become)은 되어진 바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본래적인 것과 환경적인 것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을 환경적 존재라고 말할 때에는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면 좋은 사람되고 나쁜 환경에서 지내다보면 나쁜 사람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인간은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생명 또한 역설적인 데가 많습니다. 비바람을 맞음으로 오히려 강해지며, 역경 속에서 더욱 강인하고 순수하게 그리고 크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만 좋은 사람 난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좋은 여건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생명의 이치요 근원입니다. 동물도, 식물도, 인간도, 인격도,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순탄한 환경 속에서 언제나 순탄하게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인간은 환경의 열매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역설적일 때가 많습니다. 핍박이 있으므로 복음 전파가 더 잘 되고, 환난이 있고 고난을 당하므로 더욱 순수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분명 역설적인 것입니다. 결코 환경을 따라가거나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믿음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버틸 만한 생명, 그 자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핍박과 환난을 오히려 역이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것들을 넘어설 수가 있고, 그리하여 더욱 강하고 온전하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그것이 곧 바른 신앙이라 믿어집니다.
이제 세 번째로 생각하게 되는 밭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시떨기, 가시덤불입니다. 여기는 흙이 있는 곳입니다. 흙이 있고 옥토인데 함께 자라는 잡초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면 영양을 다른 데로 다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김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옥토에 알곡이라지만 잡초가 우거지면 영양을 빼앗겨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비실비실 자라다가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을 맨다는 것은 알곡만 남기고 주위의 모든 잡초를 뽑아버리는 작업입니다. 그 뜨거운 햇볕 아래서 어떤 밭은 네 번, 다섯 번까지 김매기를 해야 합니다. 요즈음 같으면 제초제이라도 뿌리면 쉽겠지만 옛날에는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김을 맸는지 모릅니다.
이제 여기 가시덤불이 있다는 것은 그 좋은 말씀의 영양을 잡초들이 다 빼앗아감으로 영양실조가 되어 제대로 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쓰러질 듯 허약한 상태입니다. 이는 또한 복음 아닌 다른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이 온전하게 자라지를 못하고 가시에 찔리며 잡초에게 영양을 빼앗기게 되고, 그것들에 가려서 햇볕도, 바람도 제대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자랄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한다"고 22절에서 해설하고 계십니다. 말씀 그대로를 생각해보면 세상 염려와 근심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는 믿었는데 걱정거리는 여전히 많습니다. 끊지 못한 과거가 있고 버리지 못한 습관 때문에 문제는 계속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맡겨버리지 못하고 예수는 예수대로 믿으면서 걱정은 걱정대로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자니 교회에 왔을 때는 은혜 안에 있고, 집에 돌아가면 또 걱정거리입니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아무 쓸모도 없는 걱정으로 병적인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걱정 가운데 50퍼센트는 전혀 있을 수 없는 걱정이랍니다. 그리고 나머지 50퍼센트 중 40퍼센트는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10퍼센트는 꼭 그렇다는 것이 되겠는데 저기에 대한 보장은 10퍼센트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1퍼센트도 안 되는 어떤 불투명한 가능성의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걱정한다고 안될 일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걱정에 매여 사는 사람처럼 바보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정력 낭비이며 인생 낭비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시간, 좋은 건강, 많은 물질, 어떤 가능성, 많은 정력을 다 낭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돈을 허비하는 것만 낭비하는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얼마나 엄청난 낭비이며 큰 죄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걱정이 지나쳐 습관이 되고 이제는 병리적으로 젖어들어 끊을 수 없는 단계에서 여전히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신앙 생활을 오래 한다 할지라도 이처럼 끊지 못한 걱정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문제를 안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길어지기 마련입니다. 걱정을 다 보고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구하기 전에 다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돈 팔촌의 이름까지 열람식으로 다 보고해야 하는 걱정 타입의 기도 형식은 아직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꼭 그렇게 말을 해야 될 것 같다면 이것은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염려와 근심 때문에 신앙이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얼굴 한 번 제대로 펴고 밝게 웃을 수가 없으며,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못해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신앙 생활이 이 모양이 되었는가요? 그것은 잡초가 우거졌기 때문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혔다고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혹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돈이어서 이 돈 때문에 문제입니다. 이 말씀의 중요한 뜻은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문제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교회에 나오는 동기가 좋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중간에 동기가 변했으니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처음에는 깨끗한 마음으로 나왔는데 어쩌다가 예수 믿는 것이 돈벌고 복 받는 것으로 마음이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출발하였는데 명예를 좋아하게 되고, 칭찬을 좋아하며, 안 알아준다고 뒤로 물러서도 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렸던 것입니까? 목적이 순수하지 못합니다. 여기 잡스러운 동기가 끼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친구를 만나러 오는 곳이 아니며, 명예를 얻으러 오는 곳도 아니요, 돈을 벌기 위한 곳도 아닙니다. 오직 구원받으려 온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말씀 듣고 그리고 능력을 얻어서 전도하면 이것으로 다입니다. 교회는 친교 단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구제 단체도 아닙니다. 가끔 교회를 찾아와 무리하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저는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드리는 곳이지 당신들 도와주는 곳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교회 존재의 목적은 오직 복음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누가 알아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교역자이지만 워낙 건망증이 심해서 무엇이든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직도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매 주일 헌금 봉사하러 나온 분들을 보면서 저 분이 언제 우리 교회 교인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가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가끔 "목사님, 저 모르시지요?" 하고 묻는 분들에게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는 한가지 자신 있는 변명을 합니다. "제가 알면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시면 되지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목사가 개인적으로 알아주는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도 한때는 심방갈 때 그 집 아이 이름을 외워가서 "아무개 있느냐?"고 불러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날 아침에야 교적부를 보고 외워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무슨 가소로운 것인 줄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순수한동기와 깨끗한 마음으로 나오십시오. 그래야 실망이 없으며 그래야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로부터도 더 이상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좋으나 받으려고 하는 것만은 일찍이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각은 오로지 구원, 오로지 복음, 그것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순수치 못한 동기에서 명예, 재리 등에 대한 생각들이 가시덤불처럼 우거져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운 것은 모든 유혹의 뿌리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는데 물질이 시험이 되겠습니까? 식욕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음식이 시험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서 1:14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시험 자체는 객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시험을 받고 그 시험에 대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에 담겨진 동기가 순수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복음을 받아들이려는 깨끗한 마음으로만 나온다면 시험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가시덤불 같은 것이 도사리고 앉아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한국 교회는 분명히 옥토입니다. 그런데 그 옥토에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습니다. 여기에 무속적인 종교가 있고, 샤머니즘(shamanism) 이 있으며, 유교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불교적인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샤머니즘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정말 무당끼가 많습니다. 이 우거진 잡초, 이 가시덤불 때문에 신앙이 바로 자라지 못하고 조금만 비끗 하면 벌써 가시에 찔리고 맙니다.
또한 불교적인 세계관에 있어서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사바 세계로 보고 언제나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기독교를 명상 종교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런가하면 유교적인 영향에서 비롯된 귀족적인 것이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선민적인 것까지 덧붙여져서 심지어는 장로, 권사, 집사 하는 교회의 직분까지도 무슨 귀족의 서열로 아는 그러한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물질주의의 계층사회 속에서 그러한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알게 모르게 이 의식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가시덤불을 불살라버리고 다시 기경하기 전에는 바른 신앙생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무당과 예수를 비슷하게 믿는가 하면 석가의 철학을 따름인지, 공자의 사상을 따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가시덤불이기 때문입니다. 옥토는 옥토인데 가시가 우거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좋은 땅, 옥토와 같은 마음을 설명하게 됩니다.
옥토는 부드럽습니다. 돌이 없으니 흙이 부드럽고, 잡초와 가시덤불이 없으니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그리고 흙이 깊어서 깊이 받아들입니다. 이제는 전인격을 가지고 전적으로 위탁하여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신앙, 이러한 수용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옥토라는 말은 수용적 자세를 뜻하는 말입니다. 잘 받아들이는가 하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믿으며,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있는 백부장처럼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얼마나 좋은 믿음입니까? 이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시기를 "온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전적으로 위탁하는 믿음입니다. 나아가서는 순종하는 믿음이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네 아들을 바치라 하여도 순종하며, 고향을 떠나라 하면 떠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들으며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럴 때의 말씀의 씨앗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된다, 안된다 말하지 마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하라 하셨으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 가능한 것입니다. "가라" 하면 갈 수 있기 대문에 가라는 것이고, "하라" 하면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받아들여 순종하면 그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씨앗은 옥토에서만 계속 자랄 수가 있고 그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 밭도 옥토가 되고서야 구원의 열매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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