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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춰주니라. 이 같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인들과 이 세상에 대한 관계를 소금과 빛으로 상징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앞에서는 소금에 대해 공부했고, 여기서는 빛에 대해 공부하려 합니다. 소금이 겸손한 마음이요 낮은 마음이라면, 빛은 높은 마음이요 고귀한 마음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천하고 흔하여서 어디가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빛은 고고하고 높은 곳에 있어 묻힐 수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소금은 타협적이어서 어떤 물체에 들어가면 동화되어 자신이 없어지지만 빛은 심판적이어서 어두움과 함께 공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없고 어두움이 있으면 빛은 없습니다. 이렇게 빛은 힘의 대결로써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 라고 하신 뜻은 그리스도인에게 양면의 신분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백성의 신분을 가지고 이 땅에 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너희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늘 시민권을 가진 높고 고귀한 신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은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서 녹아 그들로 하여금 맛을 내게 하고 자신은 흔적도 없이 흡수되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성격을 조화 있고 균형 있게 갖추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분입니다.
빛이란 내 자신이 곧 빛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장에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가 빛의 관계에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빛은 자전하는 스스로의 빛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입니다.
요한복음 9:5에 보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빛이라"고 예수님은 친히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태양과 같고 우리는 달과 같아서 일차적인 태양의 빛을 받아 우리는 반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빛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요,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 빛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유대사람들이 가진 빛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의 교훈 미쉬나에 보면 "예루살렘은 이방의 빛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사람들의 종교가 온 이방사람, 즉 전 세계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유대사람들이 세계에서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 : 16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계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어두움 속에, 즉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데, 이제 예루살렘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차차 밝아져 온다는 내용입니다. 베드로후서 1 : 19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이 세상이 다 어두운데 이제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라는 예언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야할 문제는 어두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이 상징이듯이 어두움도 역시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어두움이란 첫째, 무지함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중의 하나가 무지한 사람입니다. 알기만 하면 쉬운데 모르기 때문에 어렵고 두렵습니다. 알고 있을 때는 용감하게 행할 수 있지만 모르니까 움츠러지고 불가능하게만 생각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척에 있어도 모르면 멀고 깜깜하게 느껴집니다.
둘째로, 어두움은 양심의 어두움을 말합니다. 필자의 친구 한 사람은 열쇠꾸러미에 조그마한 나침반을 함께 끼워 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열쇠를 꺼낼 때마다 손안에서 나침판을 보곤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열쇠를 꺼낼 때마다 "지금 나는 어디를 가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모른다면 나의 모든 수고는 무효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양심의 방향, 도덕의 방향, 가치관의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를 어두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어리석음, 즉 무능함이나 무기력, 무질서 혼돈을 어두움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두움 가운데서는 힘이 소용이 없습니다. 힘의 장사 삼손도, 그가 설사 머리를 잘리우지 않았더라도 눈만 빼 놓으면 삼손인들 무슨 힘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눈 없는 사람, 즉 빛이 없는 사람의 몸이라면 아무리 센 힘을 가졌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빛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빛이 없다면 밝은 눈을 가졌다 해도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물을 보는 데는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는 빛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도마뱀들은 지나다니는 중에 굴속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그 굴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몇 년을 지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벌레를 잡아먹고 이럭저럭 사는데, 얼마 지나고 나면 그 도마뱀의 눈이 아주 멀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빛을 보지 못하면 눈은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빛이 없는 어두움이란 무기력, 무질서, 혼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 5 : 14-15), 이 말씀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빛의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경 위에 둔다'고 하는, 등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은 보통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창문은 대부분이 예루살렘 쪽으로 내어서 창문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풍습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이 창문은 아주 높이 달려 있어 해만 지면 집 안은 깜깜하여 이 때에 불을 켜서 높은 곳에 두어 온 방 안을 비추게 됨을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가옥에는 등경(등잔을 걸어놓는 기구)이 부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예수님은 좀더 극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시기를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자가 어디 있느냐, 즉 등불을 덮어두는 사람은 없고 어디나 높은 곳에 두어 모든 것을 비추게 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분이 높임을 받는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유행어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명예 등은 신통치 않아도 의와 양심과 선에 대해서는 누구나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이어야 참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래야만 등불처럼 높이 둘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빛은 숨길 수가 없다라는 말은 대단히 귀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숨은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만 믿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리켜서 고백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백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습니다. 나는 그 분을 사랑합니다"라고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나는 교회는 안가지만 마음으로 믿는다. 또는 조용히 믿고 싶다"라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나팔을 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신앙은 절대로 숨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할 때도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끔 비밀 사랑이니 짝사랑이니 하는 말을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런 사랑은 전혀 의미가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고백하여 나타냄으로써 그 사랑은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도 숨기는 존재가 되서는 안 됩니다. 흔히 순교적 신앙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순교자란 드러내 놓고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왜정말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사 앞에 가서 꾸벅 절하더라도 속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겠지 하며 자기합리화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속으로가 아니라 드러내어 놓고 믿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으면 범사에 믿는 사람으로써 행위가 있어야 하므로 결코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한 일을 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합니다만 적어도 신앙에 대해서만은 감춰놓고 믿는다는 것이 말이 안됩니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나올 때 버젓이 성경 찬송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아직도 조그만 책을 일부러 사서, 핸드백 속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어디 가느냐"는 인사를 받으면 우물쭈물하며 "저기 간다"고 어물쩡하게 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믿지 않는 형제나 친지들에게 숨겨가면서 믿어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해서 슬쩍 넘어가면 전도하기는 더욱 요원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핍박이 오고 당장 어려움을 당해도 극복하면서 신앙을 나타내야만 누구에겐가 감동을 주게되고 구원의 역사도 일어나게 됩니다. 숨기는 동안에는 자기도 구원 못하고 남도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핍박이 있을 것이라면 있어야 하고 부러져야 할 것이면 부러져야 합니다. 신앙만은 항상 노출되어 등경 위에 높이 올려진 상태에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고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저런 사람이 믿는 자라면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비난까지도 듣습니다. 아니 자기 생각에도 나 정도의 윤리 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기에는 예수님께 욕을 돌리겠다 라는 제법 양심적(?)인 이유로 신앙을 숨기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수준이 높거나 낮거나, 어떤 모양이라도 믿는다는 것은 사실이므로 믿는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만은 시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순교가 오는 것입니다. 나타낸다는 것은 순교적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 유대인이 유대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를 유혹하기를 돼지고기를 먹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은 그 유혹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자 그것을 지켜보던 한 간수가 그를 살려주고 싶어 한 가지 지혜를 생각해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소고기를 가져가서 말하기를 "여보시오. 이것은 소고기입니다. 그러나 다른 재판관들은 모두 돼지고기인줄 알고 있으니 빨리 이것을 먹고 풀려나시오"라고 유대인에게 먹기를 권했습니다. 그때 유대인이 말하기를 "나는 이것이 소고기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돼지고기인줄 알고 있으므로 먹을 수가 없군요. 당신의 호의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죽기를 자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숨겨진 신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전혀 숨겨질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처럼 산 위에 있는 동네도 이 조그마한 불 하나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빛은 반드시 드러나고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좀더 다른 면으로 볼 때에 빛은 드러내야 될 뿐만 아니라,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필자는 기독교인이라고 특별한 표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많은 여성들은 십자가 목걸이를 좋아해서 걸고 다닙니다. 그분들 모두가 기독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남자들은 십자가 뺏지들을 붙이고 다니는데, 사실 이런 표식들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행동에 어려움이 따르리라 생각됩니다. 버스에서는 가리를 양보해야 하고, 사람들께 친절도 해야 하며, 물건을 살 때도 값을 깍기가 조심스러우며, 가야할 곳도 가려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뺏지는 없어도 어딘가에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얼굴만 보고도 어딘가 모르게 보통사람들과는 달라 보여야 한단 말입니다. 골상학적으로 잘 생겨야 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이(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무튼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주는 그 인상이 아예 그 사람됨이라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버스 속에서 쓰리꾼들이 가방을 찢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방을 찢기는 친구만 계속해서 자주 찢겨서 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결론 내리기를 이것은 "관상 때문이다"라고 의견일치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쓰리꾼들에게 그 친구의 관상이 아무래도 돈 있는 사람으로 보였기에 가방이 자주 찢겼으나 목사되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겠다고 농담까지 했습니다. 사실 어느 모로 보나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풍겨나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나 교인들이 무엇을 잘못하면 소문이 널리나고 말이 많아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면 섭섭해하고 듣기 싫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물러서서 생각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바가 있기에 이야기하고, 기독교인만은 적어도 그렇지 않기를 바라기에 조그마한 잘못에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아주 더러워진 옷에는 무엇이 묻었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만 깨끗한 옷에는 조금만 묻어도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드러나기 때문에 받는 비평을 마음 아프게 생각지 말고 당연하게 또는 고맙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서는 지금까지보다 좀더 적극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을 비추라는 말씀 속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두움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리워지지만 빛이 나타나면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두운 가운데서는 허물이 보이지 않지만 빛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흔히 고급 식당에 들어가면 좋은 등은 다 꺼 버리고 식탁마다 촛불을 켜 놓고 거기에다 또 갓을 씌워 어두운 채 식사를 하게 합니다. 필자는 미국의 어느 식당에서 짓궂게도 웨이터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장난기로 물었는데 의외로 그 웨이터는 아주 중요한 철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아무리 어두워도 밥은 자기 입에 정확하게 가져가니 어두움이 문제될 리 없고 둘째로, 어두운 빛 앞에서는 미녀나 미남 아닌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대답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지나치게 밝으면 남의 얼굴에 있는 흉터나 주름살까지 다 보이고 화장이 잘못된 것까지 나타나니 미인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흐릿한 촛불 앞에서는 누구나 선남선녀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서는 무드를 낸다고 밝은 전등보다는 촛불을 여러 개 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움 앞에서는 허물이 가려져 누구나 미인이며 웬만하면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 앞에서는 조그마한 흠도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거짓과 불의가 통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불의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비껴라도 가야한단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그리스도인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비추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는 세대이나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여기에 선이 있고, 여기에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비춰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영적인 지식을 비추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과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자기를 알고 자기의 운명을 알아보도록 그런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빛이란 길을 보여 줍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길을 볼 수 없지만 빛이 있으면 환하게 길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길이 꽉 막혔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그 길이 열리고, 절망이었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소망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빛은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방향을 잃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잃었던 방향 감각을 되찾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방향이 분명하여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자기 방향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빛은 경고의 등(warning light)이기도 합니다. 등대는 망망한 대해에 홀로 서서 빛을 비추며 위험에 대한 경고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위기를 알리고 함정을 알리며 죽음과 멸망에 대한 경고를 사전에 미리 해야 합니다.
일곱째, 빛을 비추라는 말은 힘을 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아무 힘이 없지만,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가치가 살게 됩니다. 우리들이 입고 있는 갖가지의 아름다운 옷의 색채들이 빛이 없으면 어떻게 그 색깔들을 알릴 수 있습니까? 빛이 없으면 모든 색들이 무효입니다. 오직 빛 앞에서만 색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혜도 있고 능력도 있고 재력도 있지만 만일 그에게 마음의 빛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무효입니다. 모든 재능과 지혜가 효과를 나타내려면 비춰주는 빛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은 생명이요, 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적극적으로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복음을 들음으로써 알게 하시고, 또한 보는 것으로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계명을 통해 순종하는 길을 주셨고, 또한 먼저 믿는 사람을 통해서 어떤 가능성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진실하면 살 수 없고, 양보하면 손해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리스도인들을 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진실하고도 살 길이 있고, 양보하고도 편안하며, 주일을 지키고도 얼마든지 사업을 잘 하는 모범을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선한 일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효과적인 교육은 모방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하니 따라 하자는 마음이 생기도록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곧은 나무 틈에 자라는 풀은 곧게 자라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놓은 분위기 속에서 주위의 사람들도 따라서 곧게 자랄 수 있도록 먼저 곧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는 존재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어야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입이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체온이 되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의 마음까지도 녹여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무나 귀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우리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해서 누구에게나 그 사랑을 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계시해야 합니다. 참 선과 거룩이 무엇인가를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참되게 사는 길입니다. 이런 빛을 비춤으로 그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주안에서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무나 엄청난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신분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빛과 소금이 되어 귀한 역사를 나타내어야만 합니다. 깜깜할 때는 작은 빛이나 잠깐 동안 비추는 빛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각자의 생활 현장에서 비록 작은 빛이나마 빛의 역할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삶이 되어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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