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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사랑의 성숙〈고린도전서 13장 11~1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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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성숙고린도전서 131113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통계에 따르면 1986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자살한 사람의 수가 7천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인구의 반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까운 일본에서는 25천여 명의 자살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실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그렇게 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마는 개중에는 죽을 뻔했던 사람들도 많으며 이 순간에도 죽고 싶은 마음으로 인생을 저울질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위기를 넘기면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인간이란 항상 죽음과 삶 사이를 왕래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살 심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학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자살 심리에 공통적인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배고픈 사람이 자살하는 일은 없다고 하는 점입니다. 단지 배고픔의 고통만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의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굶주림 그 자체가 자살의 이유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문제가 아닌 까닭에 경제적으로 풍부한 나라일수록 자살 인구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자살자의 대부분이 이기적인, 즉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자살의 순간에, 나 아닌 단 하나의 다른 사람이라도 생각을 해보았다면 그렇게 죽지는 않습니다. 나 하나만을 생각하므로 그 생각이 자살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다음 또 하나의 공통적 특징은 대체로 교만한 사람들이 자살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협소한 자존심에 매이기 시작하면 이렇게 외곬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보통 터널에 비유합니다. 터널 속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멀리 끝에 동그랗게 딴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분명 그 터널 밖에는 보다 넓은 세계가 있음에도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것은 저 조그마한 동전 한닢만한 구멍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협소한 마음의 소유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살자들은 자살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는 피해 당하고 있다는 의식과 더불어 피살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공통 문제는 하나같이 사랑을 모르며, 사랑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부모의 사랑도 못 받고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함은 물론,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나 스스로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밥만을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 세계에 있어서는 언제나 사랑과 보람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만약 이러한 것이 없는 삶이라면 그 인생은 이미 죽은 삶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문제는 사랑의 성숙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심리학적인 발달단계를, 네 가지 재미있는 유형으로 분리해 놓은 것을 한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첫째는 병원 침대의 모델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마취된 사람이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것과 같아서 그 환경에 수동적으로 응하고 있을 뿐 아무런 자유나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째면 째이는 것이고 간호원이 피를 뽑으면 뽑히는 대로 모두를 내맡기고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유원지 모델로서 이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들떠 있는 유형입니다. 막상 가보면 별일도 없는데 소풍을 가는 어린아이의 마음은 그냥 들떠 있어서, 꼭 좋은 일이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처럼 낭만적이고 꿈같은 생활을 원하는 유형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수영 대회의 모델이 있다고 합니다. 수영장의 수영 선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분위기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출발 신호가 땅하고 울린 다음에는 앞, , 그 누구도 의식함이 없이 오직 자기 앞에 놓인 코스만을 향해 전력을 다하여 독립적으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코스로만 줄달음치는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정구 대회의 모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친 공을 내가 어떻게 받아넘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는 절대적인 실력도 필요하지만 상대적인 여건이 문제가 됩니다. 저 앞의 상대 선수가 나보다 실력이 나은 경우에는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나로 하여금 긴장케 합니다. 어떤 모양으로 서어브가 올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긴장관계 속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상당히 성숙한 단계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를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네 단계를 거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 때엔 그저 주는 대로 먹고 누이면 누이는 대로 안으면 안는 대로 지내야만 했고, 그러다가 조금 자라게 되어서는 좋기만 한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엔 세상이 거꾸로 가는지 바로 가는지 모를 지경이어서 피난 가는 트럭을 타고 가면서도 피크닉을 가는 마음입니다. 그런가하면 입시 지옥에 빠져서는 원하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죽자살자 공부하면서 고독하게 경쟁에 임해야 합니다.

이상의 모델에 사랑의 문제를 놓고 한번 생각해보면 오늘 본문 말씀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사랑의 수준은 어느 정도에 이르고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어서 아예 선택의 여지도 없이 부모 형제의 사랑은 물론 전적으로 보호와 사랑을 받기만 하며 사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유약한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게 되면 지금까지 받기만 했던 것과는 달리 만족한 사랑을 받지 못할 때에는 불평과 원망을 하며 웁니다.

유아기에는 매사가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저 모두가 나를 위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의 심리를 두고 어떤 분이 묘사하기를 "어머니의 젖이 왜 둘이냐 할 때에 하나는 내가 먹으라는 것이고, 하나는 내가 가지고 놀라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한쪽도 나누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사과가 하나만 있어도 저것은 내 것이다 여깁니다. 아버지는 필요한 것을 가질 수 있게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요, 어머니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다, 오빠는 내가 말타기 할 때 올라타는 등판이다, 이런 식으로 전부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우주의 중심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자라 동생이 생기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때에는 사과 한 개가 있으면 반은 동생 것이고 반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성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자라게 되면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니 4분의 1만 내 것이라 할 정도는 성장을 해야 됩니다.

더 자라나 아동기에 이르면 이제는 주관적이고 직감적이 되어서 지극히 동기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버지, 저 자전거 하나 사주세요"라고 졸랐을 때,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좁은 골목길에서 위험할 것 같아 "좀더 크면 사줄께. 지금은 위험해서 안돼"라고 한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동기적으로 풀이하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실 자체만을 생각하여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그리고 반사적이고도 직관적으로 판단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년이 되고 성인이 되면 이제는 사회중심적, 혹은 타인중심의 보편적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는 곧 다른 차원에서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른스러워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건강하면 축복이라 생각하는 반면에 병이 들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단계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며, 사업이 실패하였을 때에 여기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때로는 하나님의 채찍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내가 예수를 핍박할 때에 주님은 나를 부르셨으며 나를 위하여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사랑의 뿌리를 십자가에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내게 되어지는 모든 일이 다 은사요 축복이며,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앞날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기에, 지금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어려운 과정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수준에서 이해해야 함은 물론,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어른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날 독립운동 중에 있던 김구 선생이 어머니로부터 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고생스럽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때라 먹을 것이 없어 하루는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 채소장사가 버린 시래기를 주워 다가 국을 끓이게 되었습니다. 저녁 식탁에서 이 일을 알게 된 김구 선생이 어머니를 보고 "그렇게 내다버린 것을 주워오시면 되겠습니까?"하고 말했더니 어머니가 정색을 하시면서 "이놈아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져졌느냐? 일어나 종아리를 걷어라" 하시고는 회초리를 들어 때리십니다. 김구 선생은 공손히 매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매를 맞던 김구 선생이 훌쩍훌쩍 웁니다. "너 왜 우느냐?" 어머니께서 물으십니다. 김구 선생은 대답합니다. "작년에 때리실 때보다 힘이 없으십니다. 어머니께서 점점 늙으시는 것이 마음 아파서 웁니다."

내가 맞는 상처가 아파서 우는 것도 아니요, 이 일이 창피해서 우는 것도 아니며, 체면이 깎이거나 자존심이 상하여 우는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가 노쇠해지는 것이 마음 아파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곧 성숙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좀 더 높은 차원에서 생각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보다 어른스러워져야 하겠습니다. 이는 행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잘하든 못하든 인정하고 칭찬하면서 가르치고 지도하라는 것이 교육학에서 말하는 일관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어디 어른이 되어서까지 매사에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어린이들은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변덕스러운 것이 특징입니다.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렇게 변덕스러워서야 되겠습니까? 그저 조용한 가운데 알아주든 말든 꾸준히 내가 가진 바의 사랑을 지켜나가며 그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어른입니다. 어린이들은 주고받는 일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받으면 사랑이고 주게 되면 빼앗기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에는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 반면에 주는 것이 좋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면 자꾸만 더 주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조금 더 성숙해지면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우리가 대접을 받고 선물을 받았다면 배가 고파서 또는 못살아서 받는 것이겠습니까? 아무리 하찮은 선물이라도 마음으로 주는 것이기에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른들의 성숙에서 주고받는 정리요 이치입니다. 여기에 누구를 무시한다거나 무시를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흔히들 걸핏하면 '무시한다'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다 유치한 것입니다.

높이 성숙하고 보면 받는 것도 사랑이요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고받는 것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줄 때도 감사하고 받을 때도 감사하며 그저 모두가 고마운 것뿐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들으며,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사랑의 말, 사랑의 행위가 어색해지겠습니까? 변변치 못한 자존심, 자기 의라고 하는 그 쓸모 없는 교만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완전히 꺾어

버릴 때에 비로소 부드러워지게 되어, 줄 때에도 고맙고 받을 때에도 고마운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요즈음 청년들이 탕자의 처지가 되었더라면 차라리 자

살을 하고 말더라도 끝까지 돌아오지 아니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제멋대로 다 날려버린 자식이 무슨 낮으로 돌아온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탕자는 돌아왔고, 돌아올 때의 그 자신은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 때에 그가 무슨 체면으로 앉아서 그 음식을 받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자기의 의는 완전히 매장해버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염치없는 것 같으면서도 그 음식을 잘 받아먹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아무런 공로도 없이, 염치없이 받을 때에 여기에는 나라고 하는 자기 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의가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며 사랑을 알게 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합니다.

'산 순교자'라고도 일컬어지는 루마니아의 리차드 범브란드 목사님이 한번은 기독교인 30명과 함께 어느 감옥에 갇혀 있는데 하루는 바로 자기를 잡아넣고 고문하던 비밀경찰 대위가 잡혀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떻게 여기를 들어오게 되었소?"하고 물어보았더니 "나도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다시 "무슨 영문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얘기합니다.

열두 살 난 어린이가 꽃다발을 들고 자기를 찾아와서는 자기 아내에게 갖다 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 것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어린이가 "저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어머니의 생일에는 꽃다발을 드려 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다 붙잡아갔기 때문에 오늘은 드릴 수가 없어서 당신께 가져왔어요. 이것을 당신 부인께 갖다주세요"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건 왜?" "어머니께서 항상 가르쳐주셨어요.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붙잡아간 원수인 당신을 내가 사랑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후 이 경찰은 어린이가 안겨준 사랑의 꽃다발을 붙들고 이 아이와 함께 울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마침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어린아이의 성숙한 사랑이 마침내 원수도 정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숙한 사랑이 되었을 때, 이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고 사랑으로 끝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문제는 사랑의 성숙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하는 성숙한 사랑에 이르게 될 때에 모든 것을 사랑으로 소화하며, 사랑 안에서 창조적인 역사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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