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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의 비유(마태복음 12 : 43 - 45)

by 【고동엽】 2024. 12. 14.
목차

빈 집의 비유(마태복음 12 : 43 - 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비유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맨 마지막에 주시는 말씀이 그 주제이거나 결론인 경우가 많은데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며 아주 심판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이 악한 세대라고 하시는 말씀의 뜻은 지금의 현실적인 죄, 혹은 요즈음 흔히 말하는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개념에서 악한 세대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윤리나 도덕적으로도 타락을 했기에 그런 면에서도 그렇게 깨끗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악한 세대"라고 지적하시는 말씀의 배경은 회개하지 않는 세대를 말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하고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어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의 세대! 회개하지 않는 세대를 가리켜서 이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아가 더욱 악한 상태가 될 것이며 마지막에는 멸망으로 치닫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매우 종말적인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엑소시즘(Exorcism), 곧 무당 푸닥거리 같은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로부터 "목사님께서는 귀신이 있는 것을 믿습니까?"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이면 아마 여러분께서는 귀신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없다고 할 것인지가 아리송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로 아리송할 것이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있다고 하셨으니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직 못 만났고 모르는 것뿐이지 귀신에 씌여 잘못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귀신에 씌인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귀신에 씌인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무엇인가 악령에 사로잡혀서는 제 정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실수는 그 사람으로서는 할 실수가 아닌데 그 속에 있는 악령이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은 확실히 있으며, 그 귀신에 씌여 본의 아닌 악으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회개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마는 그런 예가 얼마든지 있다고 하는 것을 일단 믿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무엇은 두고라도 성경에서 "군대 귀신", "일곱 귀신"하면서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모양으로 많이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이들은 자기 딴에는 과학적이라는 입장에서 전적으로 부정하려 들지만 그것이 그렇지를 않습니다. 지금은 귀신론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므로 거기에 대한 언급은 그만두겠습니다마는 아무튼 귀신이 신통한 데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는 사람보다도 훨씬 지혜롭고 간사하며 여간 재주를 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런 귀신을 놓고 하나의 비유의 예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바로 직전에 된 사건만 보더라도 귀신 들려 벙어리되고 장님된 사람을 귀신을 내어쫓아 온전케 해주심으로 그 일로 인해 오히려 시비가 벌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는 그 시비의 끝에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다가 귀신이 나감으로 깨끗해졌다는 것입니다. 한편 여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귀신이 들리지 않았음을 자처하고 있는 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빈집이 더욱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귀신이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하자, 본문에 의하면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하고서는 다시 전에 있던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 집이 청소를 해놓은 빈집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아! 잘되었구나하고 이번에는 다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함께 거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전보다 더욱 포악하고, 더욱 더럽게 일그러진 그런 모습의 귀신 들린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그리고 이어 결론적으로 하신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중요한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자기들의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시에 있어 헬라와 로마에서 성행하던 우상 섬기는 예식을 자기들은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신 놀음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상도 귀신도 섬기지 않는, 그러니까 우상으로부터도 자유하고 귀신으로부터도 자유 한다는 그것을 자처하며 자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소극적인 의에 만족하고 있어서 우리는 살인하지도 않았고, 간음도 않으며, 도둑질도,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런 것으로 크게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다 지켰나이다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자부심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빈집이란 말입니다. 우상도 섬기지 않고 귀신도 섬기지 않아요.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참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심령을 충만히 채운 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있어요. 또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함으로, 다시 말하면 기피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을 가짐으로 결국은 더욱 악한 귀신에 말려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교만 죄입니다. 귀신이나 우상은 섬기지 않는데 교만한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남을 멸시하고 있으니 이것이 또 다른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귀신을 섬기는 사람은 이제 회개하면 되겠으나 이 교만한 사람은 회개할 자유를 갖지 못했어요. 그러므로 일곱 귀신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은 외식주의에 빠져 겉으로 나타나는 종교적인 생활로 볼 때에는 매우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잘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물론 반성이나 뉘우침 같은 것을 할 저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들에게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이며 그렇다면 이는 일곱 귀신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저들이 강퍅한 가운데서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있는 동안 마침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저들은 차라리 우상이나 귀신을 섬기는 사람보다 훨씬 더 악한 것이 아니더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직설적으로는 바로 앞에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상대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너희들은 귀신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 같으나 회개하지 않음으로 결국은 일곱 귀신에 사로잡힌 것과 같은 너희들의 처지라는 비판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에 매인 사람을 그 고통에서 풀어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풀려난 사람이 그 귀한 자유와 새 생활을 얻었습니다마는 어딘가 모르게 다시금 귀신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에 매여 있는 상태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풀려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신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는 이상 심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병 중에 있는 환자가 건강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로 많은 노력을 하는 한편, 묘한 것은 동시에 그 병든 상태에 계속 머무르고자 하는 심리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어린이들을 두고 보면 앓게 되어 이 약 저 약 싫은 것 먹으며 놀지도 못할 때에는 빨리 나아야겠다며 애를 쓰지만 그렇게 하여 다 나은 다음에 가만히 보면 다시 앓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왜냐 하면 앓고 있을 때에 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공부하라는 소리도 없었고, 때리거나 꾸중하는 일없이 그저 위해 주기만 하니 병에 걸리는 것이 제법 재미가 있고 괜찮더라는 것이지요. 거기에서부터 묘한 이상 심리적인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매력도 그렇고 귀신의 매력도 그러합니다. 그래서는 거기에 대한 연연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그 쪽을 향해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과 직접 상담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접대부로 고생하며 지내다가 이제 예수를 믿고 회개하여 모처럼 깨끗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활을 할 때에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매냥 시달리기 때문에 너무도 지긋지긋하여 내 일생 다시는 남자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하고서는 그 생활을 청산했었는데 지금 자기가 기도하면서 애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시금 그 생활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저가 그런 분들을 위하여 나라에서 기술 훈련도 시키고 직업도 알선해 주면서 손수 벌어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니 그런 기술 하나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지 않는 가라고 하였더니 그 분이 받아 하는 말이 "밥만 먹으면 사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밥 못 먹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시달린 그 때에는 그렇게도 괴로웠지만 한번 떠나와 보면 다시 그 생활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묘한 심리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끗이" "깨끗이"하고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그 결백하고자 하는 뜻 하나만으로서는 도저히 결백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깨끗하고자 할 때가 오히려 다른 귀신을 영접해 들이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되므로 진정한 문제의 해결은 적극적인 대책에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흔히 스포츠 중계석의 해설자를 통하여서 듣는 말 가운데 "최대의 수비는 공격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특별히 요즈음은 월드컵 축구의 열기로 온 국민의 마음이 흥분되어 있는 때인데 비단 축구나 권투 등의 스포츠뿐만 아니라 인생 철학에 있어서도 이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최대의 수비는 공격이다! 공격함으로 수비가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진리입니까? 이제 나쁜 버릇을 끊겠다는 그 마음만 가지고서는 결코 나쁜 버릇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좋은 버릇을 들여야지요. 그럴 때에 나쁜 버릇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쁜 습관으로 끊겠다는 생각이나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그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생각도 그렇습니다. 간혹 좋지 못한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그것을 지워버리겠다고 애를 쓰지만 그렇게 애를 쓴다고 잊어버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아닌 다른 좋은 생각을 하도록 힘써야지요. 좋은 생각!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많은 기도를 함으로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채우게 될 때에 비로소 다른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빈집이 되어 있는 동안은 또 어느 귀신이 들어올런지 몰라요. 그래서는 지나가던 잡다한 귀신들이 들어와서는 또 다시 망치게 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도피적이고 소극적인 생각만 가지고는 결코 정결하게 지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언어 생활에 실수가 많고 부덕한 말에 젖어 있다면 이제는 선한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좋은 말, 칭찬하는 말, 덕스러운 말을 하려고 애를 쓰다 보면 자연히 나쁜 말은 안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나쁜 말은 안 해야지 하는 결심이나 맹세만 가지고는 거듭거듭 다짐을 하여도 아무런 변화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말을 생활 속에서 익힘으로써 나쁜 말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행동함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나쁜 습관이 있을 경우 안 하겠다고 하는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고만 있다가는 오히려 더 잘못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는데 있어서도 안식일을 깨끗이 거룩하게 지키겠다하여 안식일에는 일을 안 하겠다는 것으로만 애를 쓰다보니 그 다음에 오는 문제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오히려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함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지 일을 안 하려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안식일을 지키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선한 주인을 영접함으로써 과거의 악한 주인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게 되며, 만약 선한 새 주인을 영접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여전히 옛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좀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일을 처리해야 하고, 적극적인 행동으로부터 해결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게을러도 안되지만 한가해서도 아니됩니다. 아주 바쁘게 꽉 차게 살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대개는 가장 무서운 죄의 대부분이 한가한 때에 저질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흘러가는 물은 썩지 않듯이 바쁘게 일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이 스며들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지 상태에 있게 될 때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에 있어서도 생각하고 반성해야 될 것이 참으로 많은 것으로 보아집니다. 아이들을 향한 부모들의 언어가 그저 하지 말라는 것에 일관되어 있어서 거기 앉지 말라, 서지 말라, 만지지 말라 에서부터 계속 하지 말라고만 하였지 무엇을 하라는 것은 없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저들은 무엇을 하란 말입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어머니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려무나, 저것은 어떻니? 하고서는 적극적으로 "하라"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지 결코 하지 말라는 것으로 끝내지를 않습니다.

이제 만약 어린애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이리 내어놓아라 할 경우에도 무조건 내어 놓으라 해서 어린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 갔다주면 어련히 내어놓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가르침이요, 적극적인 처사입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좋은 것으로, 더 은혜스러운 것으로 꽉 채우게 되면 자연히 이 악한 것은 물러가게 될터인데 단순히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애쓰는 소극적인 방법으로서는 깨끗한 심령을 지켜 나갈 수가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이 말한 것에도 보면 "도적질하는 자가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4:28)로 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적어도 세 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먼저는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으로 이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도적질 않겠다는 결심만 가지고는 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일을 해야지요. 이제는 나의 생활은 내가 벌어서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탈무드에도 보면 "자녀에게 벌어 먹을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녀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먹긴 먹어야겠는데 벌어 먹을 수 있는 기술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나가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결국은 도적질을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것이지요. 도적질을 하지 않으려면 어쨌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할 때에 좀더 나아가 적극적인 입장에서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던 사람도 도적질하지 않으려면 구제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나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한 지난날에는 내가 남의 것을 가져왔으니 이제는 남을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번다면 그는 도둑질을 안 할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건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른 사람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어느 한 구석엔들 도둑질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도둑질을 안하겠다는 그 마음 하나만 가지고는 도둑질을 안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먹어야 하겠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좀더 적극적인 의식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볼 때이면 "충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성서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는 충만 자체를 위해서 충만을 구한 기도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고 보는 대로 "성령을 충만하게 해주세요"하는, 다시 말하면 충만을 위해서 충만을 구하는 그런 기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대체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보니 여러 가지로 충만한 역사가 나타났더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부흥회 기간 중에 철야 기도를 하면서 계속 손을 맞잡고는 "충만" "충만"하면서 밤새껏 그 기도만 하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분이 물어 보기를 "아니 그 정도면 성령이 충만한 것 같은데 아직도 모자랍니까?" 하고서는 "그렇게 충만해서 무엇하시렵니까?" 하였더니 그 분의 대답인즉 "충만해야 돈을 벌지요"하더랍니다. 그러니 어찌 충만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충만 자체를 위하여 충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그리고 많이 전하게 해 주세요"하고 이렇게만 기도하면 필요한 충만은 뒤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은 우리는 충만을 기다리다가 끝나는 셈입니다. 속담에 망건 쓰자 파장된다는 말이 있듯이 충만할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세월 다 가고 말았어요. 그러나 이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세요 하고서는 그리고 나가서 전하세요. 전하면 충만해질 터이니까 말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이기도 합니다. 이에 마태 복음 1019-20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가서 전하면, 저들 앞에 서게 되면 무슨 말을 할런지 주의 성령이 가르쳐 주마고 하시는 적극적인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인데 한번은 서울을 오르내리는 기차를 타고 보니 나의 바로 뒷좌석에 고등학생들이 앉아 있는데 가만히 보니 어느 장로님의 아들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생인데 교회에 잘 나오지를 않아 아버지이신 장로님께서 늘 마음 아파하시는 터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이 학생의 친구가 교회를 핍박하자 그 친구를 향해 교회를 변호하면서 전도를 하는데 참으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못 본 척하고서는 뒤에 앉아 다 들었지요. 그런 후에 기차에서 내리면서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 너 전도 잘하더구나"하고 한 마디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들으셨어요?"하고서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내가 예수를 이렇게 잘 믿는 줄 미처 몰랐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몰랐어요!

여러분! 그러므로 충만해 가지고 전도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먼저 담대하게 전도를 시작하세요. 그러노라면 충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빈 집을 가지고 충만을 기다리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꽉 채워진 집으로, 그리하여 시간도 채우고 정력도 채우며,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그리고 우리의 행위도 하나님의 역사로 꽉 차게 되는 그 때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주시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위험은 언제나 빈집에 있고 진공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과 뜻, 그리고

우리의 활동이 게으르고 한가하다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선한 일, 하나님의 일들로 바빠야 합니다. 저는 목회 25년 동안에 참 묘하다고 생각되는 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구역장이 있기 마련인데 가정 살림을 하면서 이 구역장의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가정마다 자녀들을 적게 낳아서 어린애들이 많지를 않습니다마는 10, 20년 전만 하여도 한 가정에 넷, 다섯은 보통이고 심지어 여섯, 일곱 되는 가정도 많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 더 많은 일을 하는가인데 일반적으로 생각하여 자녀가 다 컸거나 없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도 좀 여유가 있는 분이 구역장을 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를 않고 애들이 몇이고 줄줄이 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서 한 몸으로 여러 가지의 수고를 해야 하는 분이 구역장을 맡아서는 심방까지 하느라 애를 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일하는 자에게는 더 일할 거리가 생겨지며 그것을 위해 더 힘이 나고 더 바빠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반면에 한가한 사람은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아니하며 손톱이나 매만지고 앉았다가 병원 출입이나 하고 있으니 생각해 보면 양쪽 다 이상하다 할 것입니다.

문제는 빈집이요, 그것은 언제나 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여러분! 짧은 인생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얼마를 살았고 얼마가 남은 것 같습니까? 어차피 절반은 꺾였고 그나마 남은 것은 사향길이라서 조금 있으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날이 불원간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오는 것도 며칠이나 더 나올지 몰라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옳은 이야기이지요. 우리의 건강이 항상 보장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꽉 채우십시오. 그저 열심히 뛰세요. 그렇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쓰지 않는 건강, 필요치 않는 건강은 주어서 무엇하겠습니까? 오히려 그 건강이 있으므로 많은 죄를 짓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건강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고, 참된 믿음으로 채우며,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열심히 일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열심히 전도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내 마음의 집을 꽉 채워 나갈 것이면 이제는 의심이나 나약함도 다 이기게 될 것입니다.

달리 의심을 없애겠다며 애쓰지 마십시오. 그래서 무디(Moody)같은 분은 그의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심이 있으면 기도한다는 것에 비해 자기는 의심이 나게 되면 나가서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다가도 의심이 나게 되면 나가서 예수 믿으라고 한번 소리를 지르고 와서 다시 성경을 보게 되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 집을 마련해 놓음으로 귀신을 영접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심령이 되어서 귀신도 이기고 죄악도 이기며 모든 좌절과 허무함도 이길 수 있는 승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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