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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무자비한 종(마태복음 18:21-3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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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종(마태복음 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네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의 풍속에 젖은 베드로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의 교훈과 행동하심을 통하여 많은 감화를 받고 느낀 바가 있어서 하는 질문으로 보여집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이는 용서의 한계를 묻고있는 질문입니다. 추측하건대 예수님의 말씀과 생활을 듣고 보는 가운데 복음은 곧 사랑이며, 또한 용서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베드로의 마음에 조그만 의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한다면 몇 번이나 하고 얼마나 용서를 하면 되는 것일까? 어떠한 조건, 어떠한 형편에서 몇 번이나 용서를 하면 되는 것일까? 하는 상당히 구체적인 궁금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물으면서 거기에 덧붙이는 말이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두고 주석가였던 교부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는 이때의 베드로는 무엇을 생각하였겠는가를 나름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용서하는 한계는 세 번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크고, 제일 많이 용서하는 것이 세 번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약간의 암시가 아모스 1:3, 2:6, 욥기 33:29-30 등에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전승에는 세 번까지 용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통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중의 하나인 베드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 번만 용서하면 많이 해주는 용서이고 할만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노라니 예수님의 말씀은 일반 랍비들의 교훈에 비해 그 한계가 더 넓고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생각에는 넉넉잡아 일곱 번쯤이면 아마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계산으로는 아주 큰마음 먹고, 크게 한계를 넓혀서 하게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엉뚱하게 나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를 계산하면 490번이 됩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계산하고 앉았는데 이는 곱셈을 통하여 답을 구하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490번이 아니라, 4900번이 된다 할지라도 이 말씀의 뜻은 얼마든지 끝까지 용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용서의 한계를 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용서할 수 있고 저러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이나 말을 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오직 한계 없는 용서만을 용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학자들은 베드로가 일곱 번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모름지기 안식년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를 사들여와 일을 시키다가도 안식년이 되면 다시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러한 안식년이나 노예해방 같은 것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어쨌든 베드로로서는 큰 마음먹고 "일곱 번까지면 되겠지요"하는 의미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시니 그 결국은 너희들은 절대로 남을 정죄할 자격이나 권한도 없으며 또한 정죄할 수 있는 조건이나 어떠한 한계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의 성격을 분석해보면 베드로의 질문과는 그 동기와 방향이 전혀 다른 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용서의 한계를 묻는다는 것은 곧 용서의 조건을 묻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을 용서하고 언제까지 용서하리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한계나 조건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동기적으로 대답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용서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방향이 어느 방향에서 생각되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근본적인 문제 위에서 이 용서의 문제를 대답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사노라면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소정의 판단을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고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하며, 내가 따를 것인가 아니면 거역해야 할 것인가 등 여러 경우에 있어서 선택의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수밖에 없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여건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웃 관계를 전제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조건 없는 용서가 있어야함을 설명하십니다. 용서라는 말을 그 의미와 과정을 생각하며 사랑이라고 바꾸어 표현해본다면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을 알든 모르든, 사랑을 받든 못 받든, 사랑에 대한 이해가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용서, 한계가 없는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환경과 경험, 과거와 현재의 모든 상황을 다 초월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과거가 어떻고 현재의 환경이 이렇다는 등의 어떠한 조건들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상대방의 상태나 태도가 나의 용서나 사랑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악할 때에는 나도 악할 필요가 있고 또한 괜찮다고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 하면 나도 "" 하고, 상대방이 사랑하면 나도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종속 윤리라고 하게 되는데 이는 상대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윤리나 규범을 가리킴입니다. 한 마디로 남에게 속해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물건을 도둑 맞았다고 해서 이제는 내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해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니 나도 미워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윤리는 절대적 윤리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적인 윤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엇무엇 때문에 하는 이유나 설명은 필요치가 않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이 자신은 제외한 채 세상을 탓하고 부모, 형제, 아니면 그 누구를 탓하며 그것 때문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본문 말씀에는 때문이라는 변명은 용납치를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없으니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상대적인 윤리가 아닌 절대적인 윤리, 절대적인 은혜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수평적 관계에서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 관계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 감격스러운 사랑의 관계, 그것만이 윤리의 동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동기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이웃의 관계도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부디 명심할 것은 절대로 이웃을 탓하지 맙시다. 그 누구 때문에 내가 악해졌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누구 때문에 어떻게 되었다는 생각을 예수님께서는 절대 용납하지를 않으십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 자기 회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중요한 요점을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그 문맥을 보면,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역시 하나님의 나라임을 쉬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곧 천국은 이것과 같다는 말씀으로 그 주제를 천국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거듭되는 설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두 가지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원한 세계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현재적으로 하나의 지부와 같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현재의 선 자리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을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적인 하나님의 생각해야 함은 물론이고 오늘 본문에서는 거기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사랑과 용서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천국 백성은 이와 같으니!", "천국 백성의 윤리는 이러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사는 사람, 진정으로 마음의 천국이 이루어진 사람, 심령적으로 천국을 살고 있는 그 사람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오늘 여기에서는 본문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원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는 원수 갚는 것은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무려 일만 달란트나 빚을 진 사람이 이제는 빚을 갚으라는 명을 받고 주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자기가 못 갚으면 그 아들이 갚아야 하고 아들과 부인도 갚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과 가족이 다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제도 속에서 갚을 능력이 없는 한 빚진 자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는 주인의 명령을 듣게됩니다. 이 때에 그는 주인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조금만 더 참아주면 다 갚겠다고 애걸을 합니다. 그럴 때 이 장면을 보는 주인이 그 진심으로 엎드려 애걸하는 것이 불쌍해서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의 채무증서를 찢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순간적으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고마왔겠습니까? 어쩌면 꿈인지 생시인지 하고 자기 살을 꼬집어 볼만도 합니다. 여기 본문에는 상세하게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머리를 숙인 채 백골 난망이라고 거듭 아뢰이며 감사를 표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나오는데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그의 목을 붙잡고 빚을 갚으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주면 갚겠다고 애원을 합니다만 안된다 하고는 감옥에 가두고 맙니다. 이 소식을 만 달란트 탕감해준 주인이 듣게되자 너무 섭섭하여 다시 그 종을 불러들인 후 "내가 너를 그렇게 많이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그것도 탕감해줄 수 없느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며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감옥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극적이면서도 얼마나 오묘하고 또 논리적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하나 하나 차근하게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천국 백성이요, 여기 탕감 받은 자의 마음이 곧 천국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이 탕감 받은 기쁨이 있는 한 그 누구도 탓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받은 탕감이 너무 크고 기쁘고 감사해서 이제는 내게 잘못한 사람, 내게 억울하게 한 사람 그 누구라도, 그 어떤 잘못이라도 탓할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에 어떠한 섭섭함이나 원통함에도 나무랄 마음이 추호도 없는 그러한 마음, 이 마음이 곧 천국의 마음이요, 천국 백성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 맡기고 믿음으로 생각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탓할 마음이 없으며 평론하거나 심판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될 때 대개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몇 가지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내가 용서함으로써 내 인격과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얼마를 탕감해준다든가 아니면 내게 잘못한 사람을 무조건 용서해주면 자신이 꼭 무시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멍청한 것 같고 저 사람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 같아서 기어이 한바탕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몇 푼 안 되는 자존심과 그 인격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좀더 크게 사회적으로 생각하여 이렇게 못된 인간을 용서하면 사회 질서가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악의 생성이 자유로워서는 안되겠으니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부득불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생각으로 거창하게 나옵니다. 어쨌든 용서할 수 없다는 이유는 자신이 무시당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과 사회 질서를 파괴시키지 않겠다는 두 생각 중 어느 하나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나라고 하는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 나 아닌 그 어느 인간에 의해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권리를 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제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이는 결코 내가 갚을 문제가 하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며, 아무도 탓하지 않는 그 마음, 곧 천국 백성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의 동기가 문제입니다. 용서의 동기는 주위 환경이나 이웃의 태도 혹은 어떤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저를 용서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에 있다든가, 아니면 용서함으로써 나에게 얼마나 잘하고 못할 것인가라든가, 용서할만한 사람인가 하지 말아야할 사람인가를 저울질하며 그 상태나 태도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건 없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동기가 이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32에는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하였으며, 골로새서 3:13에서는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주님이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용서하심과 같이 하나님이 용서 하셨기 때문에 나 또한 저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를 사랑하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 외에 저가 내 사랑을 알아주기 때문이 아니요, 지난날 내가 받았던 사랑의 빚 때문도 아니며, 돌아올 보상을 계산하는 장사치의 마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로 나를 용서하셨으니 이제 내가 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의 동기는 하나님께 있고, 십자가에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용서받았다고 하는 거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이 절대적인 윤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 받고 못 받고는 관계될 바가 아닙니다. 남이 알아주느냐 못 알아주느냐도 관계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기에 용서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오늘도 사랑하는 그것뿐입니다. 그 외에 어떠한 이유도 없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세 번째로는 먼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백 데나리온 빚진 그 불쌍한 동관이 빚을 갚으라는 야단을 맞자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자기 앞에서 엎드리어 빌고있는 동관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의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자기의 자화상과 같은 장면이 벌어졌는데도 자기가 엎드려 빌던 때의 형편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 장면 앞에서는 나를 먼저 생각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탓하고, 남을 심판하기 전에 나를 심판하게 되면 이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요, 겸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있음을 고백하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감사'라는 말은 기독교인들의 언어생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감사를 연발하다가도 어디에서 좋지 않은 말 한마디 듣게되면 그만 자기가 자기 됨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은혜에 대한 건망증 환자,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만물의 때만도 못한 죄인의 괴수,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죄수가 가장 큰 용서를 받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살고있다는,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인 은혜의 관계를 소중하게 지켜나간다면 더는 누구를 탓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기 됨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자기상실은 곧 은혜의 상실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은혜 안에 있는 자기를 먼저 생각할 수 있었더라면 이 사람의 처지가 이제 와서 이렇게 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생각할 것은 비교하건대 자기가 더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큰 용서, 더 큰사랑, 더 큰 자비, 더 큰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에게 베푸는 일에 그렇게도 인색해하고 있습니다.

본문 속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대단한 비교를 하셨습니다. 금화 일만 달란트의 거금과 몇 푼 안 되는 백 데나리온, 이는 옛날 화폐의 단위라 계산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만 대략 미화 천만 불과 이십 불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교하면 50만 대 1입니다. 이를 만약 은화로 계산한다면 더 많은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천만 불 탕감 받은 사람이 이십 불을 탕감해줄 수 없다니 세상에 이런 모순과 잘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 같은데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해보라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데 도대체 누구를 탓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원망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해 "네 빚은 만 달란트나 되는데 그까짓 백 데나리온 가지고 그렇게 영악스럽게 하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남아있는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큰 빚을 졌고 가장 큰 빚을 탕감 받은 오직 은혜 속의 자유인임을 생각할 때 그 누구, 그 무엇으로부터 오는 어떤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생각할 것은 은혜의 감격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출애굽 때의 감격을 잊어버려서입니다. 그 놀라운 감격과 기쁨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감히 누가 하는 일이라고 원망의 소리를 내뱉는단 말입니까? 지난날에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맙시다. 이것을 망각하면 곧 문제가 됩니다. 감사로부터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을 때에 관용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자연히 용서하게 됩니다. 내 마음에 큰 기쁨이 있을 때에 조그만 문제, 조그만 어려움, 작은 부조리나 어려움을 참고 용서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제일 중요한 문제가 남았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용서를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므로, 주인이 그를 다시 불러 이미 용서했던 사건을 다시 문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너도 갚으라"고 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주인이 만 달란트를 탕감해주기에 앞서 네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것을 너도 탕감해주면 나 역시 탕감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용서하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용서가 공로로 되는 근거 위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 용서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용서에는 조건으로 첨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조건적 용서를 받은 자들이 이제 조건을 걸어서 남을 심판하게 될 때에는 무조건 베풀었던 그 용서를 다시 조건으로 바꾸겠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독교인의 윤리란 당연의 윤리입니다. 만 달란트 용서받은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백 데나리온 용서하는 그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너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입니다. 백 번 마땅한 윤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용서받은 것에 대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이미 받은 용서가 무효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문책하고 베푸신 은혜를 취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할 것이요, 용서받았으니 용서할 것입니다. 무조건 용서받았으니 우리도 무조건 용서할 것입니다. 한계 없는 용서를 받았으니 우리도 한계 없는 용서를 해야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일 뿐 특별한 행위로 설명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일은 몰라도 용서에만은 완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본문은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봉사하고 구제하며 굉장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의 마음속에 누구를 미워하거나 섭섭해하는 마음, 더구나 원수 맺힌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없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거나 스쳐간다면 다 회개하고, 다 풀어헤치고 용서하여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아무도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가복음 6:37에는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5:9에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기도의 표본으로 주신 주기도문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분은 주기도문을 드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없기에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은 드릴 수 없는 사람, 주기도문의 내용이 곧 나의 마음이어야 하는데도 그 기도를 드릴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깨끗한 용서, 완전한 용서, 그것은 상대방의 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는 나와 그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구속하시고 용서하신 그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너무도 커서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무조건 용서할 수 있게 될 때 그가 천국 백성이요 그러한 마음으로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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