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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마 5:1~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에서 5장 6장 7장은 예수께서 특별히 산에서 말씀하셨다하여 산상보훈 또는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견해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이 산상수훈을 가리며 복음 전체의 중심이다, 성경의 종합이다 라고 격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산상수훈은 기독교의 윤리와 교리, 그리고 복음 내용을 요약한 귀한 말씀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공부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산상보훈이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의 복음적 의의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성경 66권은 모두가 귀한 말씀으로 골고루 읽어야 합니다. 그 중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므로 가장 중점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사이비 단체들이나 이단들은 한결같이 복음서를 제쳐놓고,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 이사야서 에스겔서등에 치중하여 성경을 봅니다. 오늘 우리 교회들도 신앙적으로 잘못되기 쉬운 점이 바로 이것으로써, 성경을 보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신약을 중심으로 해서 구약을 참조하고, 신약 중에서도 복음서를 중심하여 다른 말씀 등을 참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근거한 신앙이라야 실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학에서도 설교 본문을 채택할 때 구약과 신약의 비율을 1 : 3으로 하는 것이 균형 있는 설교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책으로써 구약의 종장이요, 신약의 서장입니다. 구약의 맨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가 세상을 떠난 뒤로 이스라엘에서는 400년동안이나 침묵이 흘렀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계속적으로 당신의 사람들(왕, 선지자, 예언자)을 부르시어 역사 하셨는데, 말라기 이후에는 선지자가 뚝 끊어진 것입니다. 더우기 메시아가 곧 올 것이다 라는 예언이 있은 후로 400년 동안의 긴 세월이 침묵하고 있었으니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여기서 마태복음이 말라기서의 예언을 연결해 주는 복음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아 대망사상이 마태복음에 와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 왔다"는 식의 "성취"라는 말이 무려 15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취"(fulfill)란 이룬다는 뜻으로, 예언은 이루어져야 그 예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예언을 했어도 그 예언이 성취되지 아니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이란 부도수표와 같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이 이루어졌다. 메시아가 오리라고 한대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택된 대명사가 바로「다윗의 아들」이란 명칭입니다. 신약 성경의 첫 포문인 마태복음 1장 1절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말 성경에서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에서는 다윗의 아들(Son of David)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란 말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10번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7번이 마태복음에서 사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왜 다윗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다윗이란 인물은 유대 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메시아의 예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옛날 다윗이 다스리던 그런 왕국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합법적인 다윗의 왕가(Royal Family)로 표현하여 왕권의 소유자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구약에서 예표로 말씀하신 약속들이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구약을 낡은 언약(Old testament), 신약을 새 언약 (New testament)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다음은 산상수훈이 전해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산상수훈이 있기 바로 이전에 예수님은 두 가지 사건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첫째는 세례를 받으셨고, 둘째는 40일 금식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 두 사건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를 받으셨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 사업의 의미가 결정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요한복음 1 : 29에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만민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으심은 복음 사업의 의미와 그 목적이 결정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다음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40일간 금식하셨고 이어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십니다. 가장 굶주린 상태에서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셨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첫 시험을 물리치셨고(마 4 :4),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 4:5-6) 이 때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당당히 대답하셨고, 셋째는 마귀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에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8―10)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 모든 대답들은 구약을 인용하신 것으로 복음사업의 방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례 받음으로 복음 사업의 목표가 세워졌고, 세 가지 시험을 통해서는 복음 사업의 방법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복음 사업의 방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돌로 떡을 만드는 마술적인 것이거나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인기 전술도 아니며, 사탄이나 죄악과 타협하는 안일한 길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희생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 방법을 결정하고 나서 맨 먼저 역사 하신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에도 다소 산만하지만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 두 복음에 있는 산상수훈을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에는 총 107절로 모아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해 누가복음에서는 6:20절에서 49절 속에 29절이 기록되어 있고, 34절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나머지 47절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다른 방법으로 편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산상수훈은 누구를 대상으로 해서 말씀하셨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며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과 어려움에 속에서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여기에 왔다고 하는 설명인 것입니다. 둘째는 열 두 제자들에게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임명하시면서 "너희들이 내 제자가 되려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안수하시며 주신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온 백성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 5:1), 여기서 예수님은 앉아서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가르칠 때 주로 앉아서 가르치고 제자들은 서기도 하고 앉기도 했다고 합니다. 필자는 앉아서 말을 하면 말이 잘 안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로 일어서서, 듣는 분들의 얼굴을 골고루 보면서 말하는데, 그래야만 생각이 잘 풀립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여덟 가지 복을 차례차례로 말씀하십니다. 이 여덟 가지 복은 신앙생활의 계단과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복 중에서 첫째 되는 복이요, 복의 기초가 되는 것은 마음이 가난한 것임을 본문이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2―3), 그리고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의 순서로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신앙생활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계단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맨 나중 계단이 핍박받은 자로, 핍박이 가장 높은 수준의 계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복의 개념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의 개념과 성경이 말하는 개념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많이 소유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감을 생각해서, 부자를 복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의미하는 '복'은 거룩하고 신성한 기쁨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기쁨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본문을 번역하기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행복은 기쁨이요, 이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 얻어지는 기쁨이기에 참인 것입니다.
그러면, 가난하다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히브리 개념으로 가난(ebion)이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단순한 의미에서의 가난이 있고, 또한 돈은 있지만 권력이 없거나 낮은 신분이면 가난하다 했고, 눌린 자나 노예 같은 자도 여기에 포함되며, 그리고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즉 물질적으로 아주 빈한 자를 가난하다 라고 했습니다.
사실 가난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물질적 가난, 지식적 가난, 건강의 가난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의 가난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가난입니다. 원문을 보면 심령이 주어가 아니고 "심령에 대하여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부자는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부르지만 거지는 먹어도, 먹어도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이라는 것이 반드시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사업가가 고백하기를 자기 아이가 넷이 있는데, 위의 두 아이는 가난할 때 키웠다고 합니다. 부자가 된 다음에도 이 두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무엇을 해도 마음이 놓이는데, 사업에 성공한 후에 키운 두 아이는 늘 마음이 놓이질 않고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하게 가난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그분은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가령, 지식적인 부를 가진 사람이 스스로 많이 안다고 자부한다면, 그 이상 다시는 지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족하고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덕적인 성장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도 "나는 항상 믿음이 부족하다"라고 겸손하게 생각해야만 신앙의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간혹 성도들 중에는 "저는 10여년 동안 예수를 믿었지만 이래 가지고서 천당 갈 수 있을까요?"하고 자신의 부족한 면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야 뭐 틀림없이 천당갑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는 신앙적인 교만에 차 있는 사람입니다. 필자 생각에는 "나 같은 사람도 천당 갈 수 있을까요?"하고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 겸손한 사람들이 천당에 가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적인 부유함은 위험합니다.
또한 물질적인 부에는 중요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과 명예도 지식도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나아가서는 신분까지도 높이 보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6:24) 돈이라고 하는 귀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돈이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부모보다 자식보다 돈이 우선인 경우를 종종 봅니다. 어쩌면 모두가 돈에 미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이 있어야만 평안하고 지식도 인격도 있는 것 같고 마침내 신앙까지도 돈으로 저울질하게 되니 말입니다. 내가 잘 살아야 하나님도 내 편인 것 같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돈이 없으면 하나님도 나를 버린 것으로 단정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돈의 위력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영적인 가난입니다. 영적인 가난을 알기 위해 먼저 영적인 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적으로 부한 자란 한마디로 자기 의(self-righteous)에 도취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자기 의에 만족해서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모든 것을 충족했다고 착각하는 불행한 자입니다. 영적으로 부한 자로서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리새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지식도 있고 신앙도 있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얼굴을 들고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옵기는, 나는 토색도 아니하고 불의한 일을 한 적도 없고 간음도 하지 않았으며 일년에 두 번씩 기도를 하며 십일조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 세리들과 같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라고 구할 것이 없는 거만한 기도를 했습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가난한 세리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들은 성전에 들어 왔지만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누가 영적으로 부한 자입니까? 자기충족에 빠진 자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무엇인가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마음은 단순합니다. 가령, 끼니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만 있으면" 하고 모든 것을 먹는 것에 집중시킵니다. 즉, 끼니만 해결되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이 단순하지 않습니까? 집 없이 셋방으로 전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오막살이라도 자기 집만 있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이 소원이 단순합니다. 물론 그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이 생기지만, 아무튼 가난이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단순하게 만들어 줍니다.
가난을 이야기할 때마다 필자에게는 하나의 추억이 있습니다. 이북에서 홀로 피난을 나와 무척 고생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파, 차고 있던 팔목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4개를 얻었습니다. 따끈따끈한 고구마를 손에 쥐고 돌아서는데 왜 그렇게도 눈물이 떨어지는지 주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의 감정은 행복을 넘어서서 감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알맞을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을 대한다 해도 그 때의 그런 감격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가난은 모든 자유, 심지어는 생존의 자유권마저도 바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부정하고 아버지께로 손들고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여기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먹어도 또 먹어야 하고 배워도 또 배워야 하고 계속적으로 구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것에 대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복은 천국이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만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모두「하나님의 나라」라고 기록한 데 비해 마태복음에서는 주로「하늘 나라」라고 말했고(30회),「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3회 정도뿐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하기를 조심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3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어 일컫지 말라"(출 20:7)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곳에는 모두 대명사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건하게 표현하느라고 하늘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늘 나라 라고 하면, 푸른 하늘만 생각하는 잘못이 있어 문제입니다.
그러면,「하나님의 나라」란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히 행사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냐 현재냐 미래냐에 상관할 것 없고 그곳이 하늘이냐 땅이냐에 관계없이,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실현되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하늘나라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정 또는 나라가 하늘나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해서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 가지 더 첨부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임하고, 복음전파와 함께 확장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되는 곳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나라가 여기에 왔다는 뜻입니다. 가깝다는 말에 대해, 우리는 "과연 몇 년이 남았는가?"라고 시간적으로 오해하게 되는데, 사실은 공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he Kingdom of Heaven is at your hand"라고 손이 닿는 바로 여기에 와 있다라고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간적이거나 거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기 와 있으니 내가 영접하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거부하면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지금 여기 오시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니이까"라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자기 마음속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이하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중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너희 안(among you)에 있다"고 바리새인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란 바리새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지 2천년 후의 우리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천국이란 예수님 자신이요, 말씀이 전파되는 것이요, 말씀이 실현되는 곳으로써 곧 그리스도의 주권이 역사 되는 곳입니다. 이런 천국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마음만 가난하고 겸손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까? 물론 있기는 합니다만, 참 복은 마음이 가난한 그가 천국을 영접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복이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복은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영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복이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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