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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믿음과 행함2(야고보서 2:20-26)

by 【고동엽】 2022.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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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2(야고보서 2:20-26)

 

아아 허탈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두 시간에 걸쳐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이 야고보서의 핵심 부분이라 할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야고보는 거짓 믿음에 대하여 누누이 설명해주었습니다. 말로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는 신앙, 지식뿐인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간단해 보이면서도 이는 히브리적인 사상을 가지고 헬라철학에 도전하는 명제, 강한 도전(challenge)이 있는 명제라 하겠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 이웃에게도 덕을 끼치지 못하는 믿음, 아무 열매가 없는 이런 믿음이 무슨 소용 있는가, 자신에게도 무익하고 이웃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하는 이런 믿음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벌벌 떠는 믿음도 그렇다 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께 떨지 않는가, 하나님이 두려워 떨기만 하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두렵다면 회개를 할 것이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지 떨고만 있다면 무슨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가, 떨기만 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이렇게 공부했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저러한 믿음은 모두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야고보는 누누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적극적인 면으로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부정적인 면을 말씀하고 이 시간에는 긍정적인 면을 말씀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참믿음이란 어떤 것이냐---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행함이 없는 믿음의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행함뿐인 믿음도 믿음 없는 행함도 아닙니다. 믿음과 관계없는 별개의 행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을 생산하는 못하는 믿음,' '행함'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로 말씀합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참 믿음이란 행함을 생산하는 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신앙의 질을 말씀함이지 신앙의 양을 말씀함이 아닙니다. 이렇듯 살아 있는 믿음을 때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20)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들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히브리적인 설명 방법입니다 마는 상징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증거가 여기 있다, 아브라함을 보라, 기생 라합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기생 라합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했고 주로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디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는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믿는다 하지만 믿음대로 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종종 넘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그 믿음이 너무 귀하고 믿는 마음이 너무 착실하기 때문에 그 한 가지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허물들을 다 덮어주셨습니다. '덮어주셨다'라고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고 하는 뜻이 뒵니다. 그래서 죄를 다 가리움 받고 용서받았습니다. 선택된 사람으로 인정해주셨고, 그 자녀로 그 백성으로 선택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토록 높이 사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습니까? 이 믿음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이 웅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적어도 세 가지 큰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확증했습니다. 첫째로, 히브리서 118절을 보십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너는 나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합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동쪽으로 가라든가 서쪽으로 가라든가, 막연한 방향 지시도 없으셨습니다. 덮어놓고 '떠나라'고만 하십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떠납니다. 마치 난리를 피해 피난길 나서는 형국입니다. 어디로 피해가면 안전하다-아무도 모릅니다. 이끌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산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떠나야 하는 것이 피난입니다.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입장이 그와도 같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떠나라 하신 분이 가야 할 곳도 인도해주실 줄 믿었던 것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떠나라 하셨을 때에 ''하고 순종해서 떠나고 보았더니 '여기다'하고 가르쳐주십니다. '일단 순종한 다음에'-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대모험입니다. 그러나 떠났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둘째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아들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을 기다려보아도 아들이 없어요. 그래 편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실수였지요. 이 이스마엘이라도 대를 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잘못했다. 네 아내 사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한데 사라는 자꾸 늙어갑니다. 90세가 다 되어갑니다. 단산(斷産)하고도 오랩니다. 야단났습니다. 실로 난감한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나는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서는 아무래도 납득을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經水)는 끊어졌는지라(18 : 10, 11)." 사라가 픽 웃지 않습니까? 저는 이 장면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철없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거든요. '하나님이여, 사람 웃기지 마세요'-이런 형편입니다. 왜 웃느냐고 하나님께서 추궁하시자 웃지 않았다고 얼버무리지만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8 : 15)"하십니다.

그러나 책망하시지는 않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습니다. 믿고 아내를 가까이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의 위대함을 로마서 4182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얻은 그 귀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셨을 때, 그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다시 한번 확증됩니다. 이삭의 나이 스물대여섯쯤 되었을 때, 아직 장가들기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기막힐 일이 아닙니까? 참으로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이도 순종합니다. 히브리서 1117절에서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믿음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믿음으로 해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하나님께 충분히 '할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이 아이를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들, 아직 장가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을 지금 바친다면 저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장차 어찌되는 것입니까?" 왜 할말이 없겠습니까?

언젠가천지창조라는 이름의 외국 영화를 보았더니 거기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이 고민하는 장면을 작가가 추상적으로 상상해서 그려놓았어요. 큰 바위가 있고, 아브라함이 뒷짐을 진 채 근심하며 왔다갔다합니다. '거 참 이상한걸. 하나님이 이상해. 약속이 틀리는데……' 이렇게 회의하면서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장가간 다음이라면, 장가들어 득남이라도 해놓은 다음이라면 또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틀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의 피를 제물로 요구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잡아 바치라 하십니다. 살인을 하라 하심입니까? 정히 야단났습니다. '왜 그러실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국 위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말씀하시니 바치겠습니다, 하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달라 하시니 바쳐야지요---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피크요 절정입니다. Peak experience입니다. 엄청난 체험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갔고, 이삭을 바칩니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22 : 10)"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22 : 12)" 하시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면서 큰 복을 주십니다. 신학적으로는 네 후손 중에 메시야가 나리라고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여기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정리해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마디로 '순종'인 것입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말씀드립니다.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로 '노티티아'-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믿고나서 비로소 알게 되는 그것입니다. 둘째로 '아센수스(assensus)'-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믿어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피두키아(fiducia)'-의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힘을 낼 수가 있고, 행동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이 세 가지 요소, 이것이 동시에 역사 하면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마음도 불안합니다. 평안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는 마지막 한 가지,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일단은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의지적 결단입니다. 신앙을 의지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마는, 신앙의 마지막 보루는 어디까지나 의지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 신앙에는 지적인 요소가 있고 감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오늘도 보십시오. 예수 믿고 그저 좋아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외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마지막은 기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음식을 먹습니다. 이 음식은 몸에 좋은 것이다, 영양가가 있다. 먹으면 건강도 도움이 된다-납득이 가서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영양가는 어떻든 간에 맛이 좋아서, 기분이 좋아서, 분위기가 좋아서 먹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저도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맛도 없고, 그렇다고 몸에 좋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마는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먹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손수 만드신 것이니 먹어야 한다, 저 사람이 특별히 내게 대접하는 것이니 먹어야 한다, 그래서 먹는 것입니다. 요즘 주위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아침식사를 안 한다고 하는 사람이 꽤 됩니다. 입맛이 없어서 안 먹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빤히 쳐다봅니다.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해서입니다. 그쪽에서는 혹 그러는 저를 보고 이상하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아침식사를 못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음식을 늘상 맛으로만 먹습니까? 일을 해야 하니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먹다보면 입맛도 자연히 살아나는 것이지요. 입맛이 없어서 안 먹는다는 그 정신상태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비실비실할밖에요. 음식을 놓고 먹기 싫고 좋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 기분이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과 상관없이 음식은 먹어야 합니다. 먹고서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어야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지적인 요소도 있고 감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분대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아는 대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을 의지라고 말해서는 안되겠지만 마지막 결정은 의지로써 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을 때, 아브라함이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따랐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 귀한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이 아닙니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불합리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주셨으니 바치겠습니다.'-의지로써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감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본디 믿음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기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에 따르는 믿음, 순종이 따르는 믿음-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지식과 이성과 감정과 모든 흔들리는 마음을 다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순종하는 행위가 따를 때에 비로소 믿음입니다. 믿으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22점의 말씀을 보십시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함께 일하고'-헬라원문에서는 '수네르게이'입니다. ''이라고 하는 말은 '함께'라는 뜻이요, '에르게이''일 하다'라는 뜻으로 영어의 '에너지(energy)'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네르게이'라는 말은 '함께 일한다' '같이 효력을 낸다' '협력하여 역사 한다'라는 뜻이 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믿음이 힘을 주어서 행함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행위를 유발합니다. 믿음이 힘이 되어서 행함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더욱 중요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헬라원문의 '에델레데'라고 하는 이 말은 '완전하다'라는 뜻의 '델레이오'라고 하는 말의 과거형으로 '완성되었다'라는 뜻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완성되었다. 뜻한 바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행하면서 믿음이 완전해집니다. 행함으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경험이요 구체적인 일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우선, 믿음이 어떻게 역사 하는가 보십시다. 맨 처음에는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 그 행위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구나' '여기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구나'---행하면서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행하면서 기쁨을 얻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잘했구나' '맞구나, 이 길에 생명이 있구나'-기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보십시다. 순서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의지가 먼저요, 다음이 지식이요, 마지막이 감정입니다. 신앙의 노정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하여 먼저 알고, 느끼고, 그 다음에 순종하려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알고서 하는 것이 있습니까? '밥은 오른손으로 먹어라.' 이것 하나 제대로 배우기 위하여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습니까? 꾸중을 또 얼마나 들었던가요? 그렇게 해서 그것 하나 배운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왼손잡이들이 많겠습니다마는, 따지고 보면 그들은 반역자들입니다. 말 안들은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이 왼손으로 먹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도 끝까지 부모님 말을 안들은 고집쟁이였을 게 뻔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열심히 공부해라'-어떻습니까? 어느 것 하나 처음부터 기쁜 마음으로 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억지가 있었습니다. 다소라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가 내게 필요하니까 하신 말씀이다' 혹은 '인생의 선배인 아버지가 내게 유익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라고 믿고 일단 순종했을 것입니다. 일단 순종하고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이치를 깨닫고 보니 기쁨이 옵니다. 유쾌해집니다. 모든 것이 이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간혹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다고 인사하면서 오가는 말이 이렇습니다. "이 친구가 10년을 두고 권하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랴 싶어 나왔습니다." "나와보니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나올만합니다." "그러면 조금 더 나와보십시오." 조금 더 나오다보면 나오기를 정말 잘했다 싶을 때가 올 것입니다. 처음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기쁨으로 예수 믿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하기야 죽을 지경이 되어서 제 발로 기어 교회에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답답하니 교회에나 나가보자 하여 나오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순종으로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깨닫고, 그리고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선행도 배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배워야 합니다 교역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심방을 부탁하는 전화를 받습니다. 당연히 귀찮을 수 밖에요. '내가 어쩌다 목사가 되어서……' 억지로 가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밤에 와달라 하면 기분이 별로 좋지를 않습니다. '당장 죽을 일도 아닌데, 아침에 전화하든지 할 것이지'하고 짜증이 납니다. 그래도 전화는 받았으니 투덜투덜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가서 만나보면 그런 짜증이 말끔히 사라집니다. '이래서 와달라 했구나'싶습니다.

깨닫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감상적으로 산다고 할 것은 아닙니다. 억지 십자가도 역시 지기를 잘한 것입니다.

또한, 억지로 헌금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고 난 다음에 보면 퍽 잘했다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홀랑 망하고 보니 남은 것은 헌금한 것밖에 없더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은 것은 그것뿐이지요. 주인이 하는 일은 설령 억지로 하더라도 절대 후회되는 것이 없습니다.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행함이 따릅니다. 이것이 먼저요, 다음에 행함과 함께 온전케 됩니다. 처음에는 의지로 했습니다마는, 다음에는 지적으로 그리고 정적으로 채워집니다.

마지막에는 완전해집니다. 믿음 안에서 행함이 그토록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완숙한 행위를 얻게 됩니다.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확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이러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23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제가 특별히 사랑하는 빌립보서 112절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왜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받음을 피하고자 하는 그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재판도 받지 아니한 채 옥살이 2년 년을 보내면서 무척이나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배로 로마로 호송될 때에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로마의 지하감옥에 갇혀서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그는 깨닫습니다. 나의 이 고난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고통과 고난에 묵묵히 순종해왔더니, 이제야 그 일이 잘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섭리가 그 안에 있었음을 깨닫고 마침내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인하여 온전하게 된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이이 기생 라합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아시는 대로 라합은 여리고 사건 때에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줍니다. 그는 변변치 못한 기생의 신분입니다. 도덕적으로 온전치 못한 사람인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오자 그들을 숨겨 보호해줍니다.

그로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의 종을 잘 영접한 것 하나로 그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안에 자비가 있고, 그 안에 용기가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인 줄로 믿었기 때문에, 이 나라는 망하고 이스라엘이 설 것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거기에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에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 용기로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정탐꾼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고 이제 여리고 성을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니 우리를 좀 숨겨주십시오." 당연히 숨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위험합니다." 이렇게 나왔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을 믿었으면 이제 그 일에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협력자가 되어 그들을 숨겨줍니다. 마침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지막 26절에서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몸입니다. 썩어서 필경은 내버려지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산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나타날 것이요, 그 행함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단정합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앙, 단순하고 감정적인 신앙을 정죄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을 때에 비로소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다, 행함과 믿음이 함께 하고 믿음이 행함과 함께할 때에, 나아가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더욱 온전하게 되느니라-믿음과 행함이 함께 하는 온전한 믿음을 갈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의 목소리입니다.  

믿음과 행함2(야고보서 2:20-26)

 

아아 허탈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주제를 가지고 두 시간에 걸쳐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이 야고보서의 핵심 부분이라 할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야고보는 거짓 믿음에 대하여 누누이 설명해주었습니다. 말로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는 신앙, 지식뿐인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간단해 보이면서도 이는 히브리적인 사상을 가지고 헬라철학에 도전하는 명제, 강한 도전(challenge)이 있는 명제라 하겠습니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 이웃에게도 덕을 끼치지 못하는 믿음, 아무 열매가 없는 이런 믿음이 무슨 소용 있는가, 자신에게도 무익하고 이웃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하는 이런 믿음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벌벌 떠는 믿음도 그렇다 했습니다. 귀신도 하나님께 떨지 않는가, 하나님이 두려워 떨기만 하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두렵다면 회개를 할 것이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지 떨고만 있다면 무슨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가, 떨기만 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이렇게 공부했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저러한 믿음은 모두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야고보는 누누이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적극적인 면으로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부정적인 면을 말씀하고 이 시간에는 긍정적인 면을 말씀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참믿음이란 어떤 것이냐---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분명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행함이 없는 믿음의 개념입니다. 이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행함뿐인 믿음도 믿음 없는 행함도 아닙니다. 믿음과 관계없는 별개의 행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행함을 생산하는 못하는 믿음,' '행함'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로 말씀합니다. 야고보가 생각하는 참 믿음이란 행함을 생산하는 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신앙의 질을 말씀함이지 신앙의 양을 말씀함이 아닙니다. 이렇듯 살아 있는 믿음을 때에 자신을 구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20)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들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극히 히브리적인 설명 방법입니다 마는 상징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증거가 여기 있다, 아브라함을 보라, 기생 라합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기생 라합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했고 주로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디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는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믿는다 하지만 믿음대로 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종종 넘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그 믿음이 너무 귀하고 믿는 마음이 너무 착실하기 때문에 그 한 가지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허물들을 다 덮어주셨습니다. '덮어주셨다'라고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고 하는 뜻이 뒵니다. 그래서 죄를 다 가리움 받고 용서받았습니다. 선택된 사람으로 인정해주셨고, 그 자녀로 그 백성으로 선택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토록 높이 사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습니까? 이 믿음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이 웅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적어도 세 가지 큰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확증했습니다. 첫째로, 히브리서 118절을 보십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너는 나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합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동쪽으로 가라든가 서쪽으로 가라든가, 막연한 방향 지시도 없으셨습니다. 덮어놓고 '떠나라'고만 하십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떠납니다. 마치 난리를 피해 피난길 나서는 형국입니다. 어디로 피해가면 안전하다-아무도 모릅니다. 이끌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산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떠나야 하는 것이 피난입니다.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만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는 입장이 그와도 같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떠나라 하신 분이 가야 할 곳도 인도해주실 줄 믿었던 것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떠나라 하셨을 때에 ''하고 순종해서 떠나고 보았더니 '여기다'하고 가르쳐주십니다. '일단 순종한 다음에'-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대모험입니다. 그러나 떠났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둘째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아들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을 기다려보아도 아들이 없어요. 그래 편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실수였지요. 이 이스마엘이라도 대를 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잘못했다. 네 아내 사리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한데 사라는 자꾸 늙어갑니다. 90세가 다 되어갑니다. 단산(斷産)하고도 오랩니다. 야단났습니다. 실로 난감한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나는 엘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서는 아무래도 납득을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經水)는 끊어졌는지라(18 : 10, 11)." 사라가 픽 웃지 않습니까? 저는 이 장면이 참 아름다워 보입니다. 철없이 말한다면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거든요. '하나님이여, 사람 웃기지 마세요'-이런 형편입니다. 왜 웃느냐고 하나님께서 추궁하시자 웃지 않았다고 얼버무리지만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8 : 15)"하십니다.

그러나 책망하시지는 않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라"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습니다. 믿고 아내를 가까이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 믿음의 위대함을 로마서 4182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얻은 그 귀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셨을 때, 그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다시 한번 확증됩니다. 이삭의 나이 스물대여섯쯤 되었을 때, 아직 장가들기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기막힐 일이 아닙니까? 참으로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이도 순종합니다. 히브리서 1117절에서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믿음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믿음으로 해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하나님께 충분히 '할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이 아이를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들, 아직 장가조차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을 지금 바친다면 저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장차 어찌되는 것입니까?" 왜 할말이 없겠습니까?

언젠가천지창조라는 이름의 외국 영화를 보았더니 거기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순간에 아브라함이 고민하는 장면을 작가가 추상적으로 상상해서 그려놓았어요. 큰 바위가 있고, 아브라함이 뒷짐을 진 채 근심하며 왔다갔다합니다. '거 참 이상한걸. 하나님이 이상해. 약속이 틀리는데……' 이렇게 회의하면서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장가간 다음이라면, 장가들어 득남이라도 해놓은 다음이라면 또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틀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람의 피를 제물로 요구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을 잡아 바치라 하십니다. 살인을 하라 하심입니까? 정히 야단났습니다. '왜 그러실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국 위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말씀하시니 바치겠습니다, 하고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고, 하나님께서 달라 하시니 바쳐야지요---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피크요 절정입니다. Peak experience입니다. 엄청난 체험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갔고, 이삭을 바칩니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22 : 10)"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22 : 12)" 하시고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면서 큰 복을 주십니다. 신학적으로는 네 후손 중에 메시야가 나리라고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여기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정리해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마디로 '순종'인 것입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말씀드립니다. 믿음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로 '노티티아'-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믿고나서 비로소 알게 되는 그것입니다. 둘째로 '아센수스(assensus)'-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믿어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피두키아(fiducia)'-의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힘을 낼 수가 있고, 행동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이 세 가지 요소, 이것이 동시에 역사 하면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마음도 불안합니다. 평안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는 마지막 한 가지,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일단은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의지적 결단입니다. 신앙을 의지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마는, 신앙의 마지막 보루는 어디까지나 의지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 신앙에는 지적인 요소가 있고 감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오늘도 보십시오. 예수 믿고 그저 좋아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외치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마지막은 기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늘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음식을 먹습니다. 이 음식은 몸에 좋은 것이다, 영양가가 있다. 먹으면 건강도 도움이 된다-납득이 가서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영양가는 어떻든 간에 맛이 좋아서, 기분이 좋아서, 분위기가 좋아서 먹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저도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맛도 없고, 그렇다고 몸에 좋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마는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먹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손수 만드신 것이니 먹어야 한다, 저 사람이 특별히 내게 대접하는 것이니 먹어야 한다, 그래서 먹는 것입니다. 요즘 주위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아침식사를 안 한다고 하는 사람이 꽤 됩니다. 입맛이 없어서 안 먹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빤히 쳐다봅니다.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해서입니다. 그쪽에서는 혹 그러는 저를 보고 이상하다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아침식사를 못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음식을 늘상 맛으로만 먹습니까? 일을 해야 하니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먹다보면 입맛도 자연히 살아나는 것이지요. 입맛이 없어서 안 먹는다는 그 정신상태가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비실비실할밖에요. 음식을 놓고 먹기 싫고 좋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로 기분이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겠습니다마는, 그것과 상관없이 음식은 먹어야 합니다. 먹고서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어야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지적인 요소도 있고 감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분대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아는 대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을 의지라고 말해서는 안되겠지만 마지막 결정은 의지로써 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을 때, 아브라함이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따랐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 귀한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이 아닙니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불합리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주셨으니 바치겠습니다.'-의지로써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감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본디 믿음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기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에 따르는 믿음, 순종이 따르는 믿음-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지식과 이성과 감정과 모든 흔들리는 마음을 다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순종하는 행위가 따를 때에 비로소 믿음입니다. 믿으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22점의 말씀을 보십시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함께 일하고'-헬라원문에서는 '수네르게이'입니다. ''이라고 하는 말은 '함께'라는 뜻이요, '에르게이''일 하다'라는 뜻으로 영어의 '에너지(energy)'가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네르게이'라는 말은 '함께 일한다' '같이 효력을 낸다' '협력하여 역사 한다'라는 뜻이 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믿음이 힘을 주어서 행함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행위를 유발합니다. 믿음이 힘이 되어서 행함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더욱 중요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헬라원문의 '에델레데'라고 하는 이 말은 '완전하다'라는 뜻의 '델레이오'라고 하는 말의 과거형으로 '완성되었다'라는 뜻입니다. 행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완성되었다. 뜻한 바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행하면서 믿음이 완전해집니다. 행함으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경험이요 구체적인 일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우선, 믿음이 어떻게 역사 하는가 보십시다. 맨 처음에는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 그 행위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구나' '여기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구나'---행하면서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행하면서 기쁨을 얻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잘했구나' '맞구나, 이 길에 생명이 있구나'-기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해보십시다. 순서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의지가 먼저요, 다음이 지식이요, 마지막이 감정입니다. 신앙의 노정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하여 먼저 알고, 느끼고, 그 다음에 순종하려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알고서 하는 것이 있습니까? '밥은 오른손으로 먹어라.' 이것 하나 제대로 배우기 위하여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습니까? 꾸중을 또 얼마나 들었던가요? 그렇게 해서 그것 하나 배운 것입니다. 이 자리에도 왼손잡이들이 많겠습니다마는, 따지고 보면 그들은 반역자들입니다. 말 안들은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이 왼손으로 먹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도 끝까지 부모님 말을 안들은 고집쟁이였을 게 뻔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열심히 공부해라'-어떻습니까? 어느 것 하나 처음부터 기쁜 마음으로 되어진 것이 없습니다. 억지가 있었습니다. 다소라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가 내게 필요하니까 하신 말씀이다' 혹은 '인생의 선배인 아버지가 내게 유익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라고 믿고 일단 순종했을 것입니다. 일단 순종하고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이치를 깨닫고 보니 기쁨이 옵니다. 유쾌해집니다. 모든 것이 이렇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간혹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다고 인사하면서 오가는 말이 이렇습니다. "이 친구가 10년을 두고 권하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랴 싶어 나왔습니다." "나와보니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나올만합니다." "그러면 조금 더 나와보십시오." 조금 더 나오다보면 나오기를 정말 잘했다 싶을 때가 올 것입니다. 처음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처음부터 기쁨으로 예수 믿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하기야 죽을 지경이 되어서 제 발로 기어 교회에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답답하니 교회에나 나가보자 하여 나오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순종으로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깨닫고, 그리고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선행도 배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배워야 합니다 교역자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심방을 부탁하는 전화를 받습니다. 당연히 귀찮을 수 밖에요. '내가 어쩌다 목사가 되어서……' 억지로 가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밤에 와달라 하면 기분이 별로 좋지를 않습니다. '당장 죽을 일도 아닌데, 아침에 전화하든지 할 것이지'하고 짜증이 납니다. 그래도 전화는 받았으니 투덜투덜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가서 만나보면 그런 짜증이 말끔히 사라집니다. '이래서 와달라 했구나'싶습니다.

깨닫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감상적으로 산다고 할 것은 아닙니다. 억지 십자가도 역시 지기를 잘한 것입니다.

또한, 억지로 헌금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고 난 다음에 보면 퍽 잘했다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홀랑 망하고 보니 남은 것은 헌금한 것밖에 없더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바친 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은 것은 그것뿐이지요. 주인이 하는 일은 설령 억지로 하더라도 절대 후회되는 것이 없습니다.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행함이 따릅니다. 이것이 먼저요, 다음에 행함과 함께 온전케 됩니다. 처음에는 의지로 했습니다마는, 다음에는 지적으로 그리고 정적으로 채워집니다.

마지막에는 완전해집니다. 믿음 안에서 행함이 그토록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완숙한 행위를 얻게 됩니다.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확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이러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23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나님의 벗,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제가 특별히 사랑하는 빌립보서 112절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왜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핍박받음을 피하고자 하는 그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재판도 받지 아니한 채 옥살이 2년 년을 보내면서 무척이나 속이 상했을 것입니다. 배로 로마로 호송될 때에는 더욱 고통스러웠습니다. 로마의 지하감옥에 갇혀서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그는 깨닫습니다. 나의 이 고난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고통과 고난에 묵묵히 순종해왔더니, 이제야 그 일이 잘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섭리가 그 안에 있었음을 깨닫고 마침내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인하여 온전하게 된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이이 기생 라합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아시는 대로 라합은 여리고 사건 때에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줍니다. 그는 변변치 못한 기생의 신분입니다. 도덕적으로 온전치 못한 사람인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오자 그들을 숨겨 보호해줍니다.

그로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의 종을 잘 영접한 것 하나로 그는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안에 자비가 있고, 그 안에 용기가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인 줄로 믿었기 때문에, 이 나라는 망하고 이스라엘이 설 것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거기에 있을 것임을 믿었기 때문에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 용기로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정탐꾼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고 이제 여리고 성을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니 우리를 좀 숨겨주십시오." 당연히 숨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위험합니다." 이렇게 나왔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을 믿었으면 이제 그 일에 협력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협력자가 되어 그들을 숨겨줍니다. 마침내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지막 26절에서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몸입니다. 썩어서 필경은 내버려지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산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나타날 것이요, 그 행함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단정합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앙, 단순하고 감정적인 신앙을 정죄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열매를 맺을 때에 비로소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다, 행함과 믿음이 함께 하고 믿음이 행함과 함께할 때에, 나아가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더욱 온전하게 되느니라-믿음과 행함이 함께 하는 온전한 믿음을 갈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의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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