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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 : 14-2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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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 : 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제 야고보서 강해도 열네 번째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아마도 야고보서 전체에 걸쳐 가장 문제가 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믿음이야 행함이냐, 믿음이 중요하냐 행함이 중요하냐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때마다 논란을 불러 일으켜온 이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대조해서 자상히 설명한 다음에 못박듯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가끔 청년들의 모임에 가보면 '믿음이냐 행함이냐'해서 토론회 같은 것을 합니다. 양쪽으로 나뉘어서 열심히들 논란을 벌이는데 끝에 가서는 저보고 평가를 해달라고 해서 총평을 해준 일이 몇 번 있습니다. 참으로 큰 문제가 여기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이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 하는가 하면 '행함 없는 믿음이 무슨 소용이냐'하고 행함을 강조 하다보니 믿음이 빠져나가고, 그래서 필경은 믿음 없는 행함을 강조하게 까지 됩니다. 이로 인하여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적어도 믿음과 행함, 행함과 믿음의 문제는 야고보가 목회하던 그때도 오늘도 끊임없이 중요한 이슈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을 놓고 보더라도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행함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믿음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당장 죽으면 괜찮겠는데 그렇지를 않은 데에 점차로 문제가 나타납니다. 예수는 믿었는데 행위를 보면 달라진 것이 없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으나, 도대체 내가 나를 보아도 변화가 없어요. 미워하던 사람 보면 여전히 밉고, 좋은 것 보면 여전히 탐나고, 질투도 시기도 여전하고, 사촌이 논을 사면 여전히 배가 아픕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믿음은 왜 가지는 것인가, 의문이 없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러구러 회의에 빠지고,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에서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첫째로, '믿음만이 중요하다, 행함은 필요 없다'-믿음 만이면 된다는 착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교파라고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사이비 교파 가운데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만 있으면 빚진 것을 갚지 않아도 된다'라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모두 사함 받았다, 천국 가는 티켓을 받아놓았으니 걱정할 것 없다, 이제부터 행함은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행함을 송두리째 무시하고 있습니다마는,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행함만을 강조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믿는 것으로는 안된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행함을 전적으로 강조합니다. 바로 살아야 한다,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빠지고 공로주의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한 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 : 3)" 이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했을 때에는 '오직 믿음으로'였습니다 마는, 얼마 지나보니 '행함으로, 행함으로'가 되었습니다. 어느 신학자가 이 문제를 가지고 통계를 내보았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들의 설교를 분석해본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나 그 안에는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 주제에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가,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가를 조사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목사님의 80퍼센트가 설교에서 주로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대체로 믿음에 관하여는 부흥회 때에 한번 설교하고 그만인 것입니다. 특별한 때에 한번 설교하고는 다시 안 하는 것입니다. 이제 믿었으니까 행하여야 한다-행함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믿음은 빠져나가고 율법주의만이 남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다-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언제 행함으로 구원받았습니까? 잘못되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행함을 바로 가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가지고 평가를 하려드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공로주의에 빠지고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선행을 사다리 삼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은혜가 간데없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행함이 있는 공로로 구원받는다. 은혜 없이는 공로를 세울 수가 없다."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아리송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마디의 말 속에서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은혜와 행함, 이 둘의 관계를 바로 소화하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에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나 자신을 비판하거나 남을 비판하게 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함만으로 따지려듭니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구제하고 봉사하고 희생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어느새 은혜는 다 빠져나갔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한 일을 하였다, 내가 의를 행하였다 하고 전적으로 나의 의가 되어버렸습니다. 율법주의나 공로주의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세째로, 행함대로 믿음을 평가하려드는 잘못을 범합니다. 행함은 외형적인 것이요 형식적인 것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람을 놓고 평가할 때에도 보면 그렇습니다. '저사람에게 얼마나 믿음이 있는가'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믿음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와의 내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 삼일저녁에 교회에 나왔던가?" "새벽기도회에는 나오는가?" "십일조는 잘하는가?" "몇 사람이나 전도를 했는가?" 이런 것으로 평가하려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다 지키면 과연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서 그렇게 열심일 수 있겠습니다마는, 반대로 그것을 다했다고 하여 반드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선행에 근거하여 믿음을 평가하려는 것도 잘못입니다. 구제할 때에도, 구제 많이 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 구제 안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21 : 3)." 부자들이 교회에 나와 연보궤에 헌금을 넣습니다. 가난한 과부도 넣습니다. 그것을 보시고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 더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21:4)." 과부의 헌금을 가리켜 그의 '전부'라고 말씀하십니다마는, 당장 먹어야 할 저녁거리 정도는 그 과부에게 남아 있었겠지요. 다 바쳤다고 다음날 죽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의 전부를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믿음이 밖으로 드러난 행위에 따라서 평가받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나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같습니다. 특별히 나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스스로 외적인 선행이나 구제를 하고 나서 생각하기를 '나도 할 것을 했다. 나는 의로운 것이다' 하는가 하면 외적인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나는 믿음이 없다' 라고 여긴다면 엄청난 잘못입니다.

네째로, 무서운 잘못이 있습니다. 절망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귀한 것이므로 내가 행하여야 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습니다. 이만큼 기도해야 하겠다, 저만큼 선하게 살아야 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겠거든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14:38)." 가만히 보면 그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내일부터는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가겠다' 고 결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바로 다음날에도 못나옵니다. 이런 습관이 거듭됩니다. '내일부터는' '내일부터는'…… 그러다가 자포자기합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절망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좋아서 박수치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마귀 사단입니다.

행하는 것도 좋고, 행함을 위해서 애쓰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채점하려들지는 말 것입니다. 내가 받는 은혜를 저울질할 것도 아닙니다. 나의 존재, 나의 믿음을 평가할 것도 아닙니다. 그로 말미암아 절망하게 되어서는 안되기에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일마다 겸손히 임할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할 수 있게 된 것도 고마운 일이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일도 보통일이 아닌데, 참 귀한 일인데, 내가 오늘 새벽기도에 나왔다, 참 고맙구나, 이렇게 여길 것입니다. 오늘 내가 선한 일을 한 가지 했다. 나는 남의 입에 들어간 것조차 빼앗던 인간이 아닌가, 그런 내가 남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모든 일을 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다는 행할 수 없다. 원하는 만큼 행하지 못한다.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불만이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불만이 쌓이면 필경 절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에 대한 이적(利敵)행위가 되고 신앙마저 저버리는 행위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인 동시에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행위로,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이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믿고 교회에 나오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를 믿고, 또 특별히 잘 믿으려고 하거나 잘 믿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면 부디 이 야고보서를 읽을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참신앙이 무엇이며 바른 신앙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 살아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본문은 거짓 믿음, 외식적인 믿음, 의식적인 믿음에 대하여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안믿는 사람에 대하여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사람에 대하여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된다고 강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행함은 율법적인 행함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은혜적인 행함입니다. 질적으로 평가하여야 하며, 내면적으로 평가하여야 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 평가하여야 하는 행함입니다. 물량적으로 외식적으로 평가되는 행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분명히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한대로 교회사적으로 보아 오래도록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온 문제가 '믿음이냐 행함이냐' 입니다. 그래서 루터 같은 분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지푸라기라고 하면 쓸데없는 것으로, 내버릴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여기서 '지푸라기(복음)'라 한 것은 그런 뜻에서가 아닙니다. 루터의 성경관은 이렇습니다. 말구유 안에 아기 예수가 누워 있습니다. 말구유는 성경이요, 아기 예수는 복음입니다. 성경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말구유가 있습니다. 구유 안에 '지푸라기'가 깔려 있고, 그 위에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가 누워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복음이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는 강보쯤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의 '지푸라기'가 바로 야고보서에 해당된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 한 것이지, 내버릴 정도로 쓸데없다 하여 지푸라기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흔히 루터가 야고보서를 소홀히 했다고들 말합니다마는, 깊이 알고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실 루터가 바울과 야고보를 놓고 바울 쪽을 선택하기는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의 행함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과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 그 사이에는 무엇인가 분명 통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2절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마침내 믿음과 행함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의 문제를 놓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지혜로운 설명을 합니다. '바울은 믿음에 앞선 행함을 논했다'---믿음과 관계없는 행함, 믿음 이전의 행함, 예수 믿기 전에 가지는 행함, 예수 안믿는 사람들의 행함을 논했다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의 행함은 율법주의자의 행함이요, 안 믿는 사람들의 행함이요,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의 행함이므로 단어 자체가 야고보의 그것과는 다르다.' 바울의 것은 믿음에 앞선 행함이요 야고보의 것은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밝게 보았습니다. 지혜롭습니다.

야고보는 믿기 전의 행함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믿은 다음에 행하는, 그 행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용어는 똑같은 '행함'입니다만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보면 둘의 개념이 완전히 다름 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율법적이요, 하나는 은혜적입니다. 하나는 예수 믿기 전의 행함이요, 하나는 예수 믿은 다음의 행함입니다. 하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행함이요, 하나는 구원받은 사람의 행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이 충돌할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분명한 설명입니다.

헤이즈(D.A.Hayes)는 말합니다. "바울은 뿌리를 보고, 야고보는 열매를 보았다"-이 또한 지혜로운 설명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훼퍼(Bonhaeffer, D)도 말합니다. "믿음과 행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행함과 믿음,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있다. 믿음만 중시하게 되면 자칫 값싼 은혜에 빠지게 된다." 여러분, 값싼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은혜'하고 떠들고 다니다보면 간혹 은혜를 값싸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거저 받아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진정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순교를 해야 한다고 떠들면서 순교는커녕 도망 다니기에 바쁘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그 믿음이 어디로 간 것입니까? 믿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허풍선이가 아닙니다. 믿음에는 거기에 따르는 마땅한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입버릇처럼 '믿음, 믿음' 하면서 값싼 믿음에 빠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행함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행위를 통하여 율법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모두 잘못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본훼퍼의 설명입니다.

우리는 사도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조금도 충돌함이 없이 유연하게 설명하는 것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믿음에 대하여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상하게 말씀합니다.

첫째가 "믿음이 있노라"하는 믿음입니다. 곧 말로만 하는 믿음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노라." 이름만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 나가십니까?" "못나갑니다." "교회에 나가본 일도 없습니까?" "제가 그래도 유아세례 받은 교인입니다." 유아세례 받은 교인이 물간 것이지요. 이런 경우가 바로 이름만 있는 교인인 것입니다. 무슨 신상카드같은 것을 작성하게 될 때면 종교란에 으레 '기독교'라고 적어 놓습니다마는, 한번도 교회에 나온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맹랑한 일입니다. 신분상으로 내놓는 이름만의 교인, 이름만의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둘째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는 가짜믿음이기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생명이 없는 믿음이기에 나를 구원하지도 못합니다. '자기 구원'이라 함은 곧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시험을 이기지 못해서, 죄를 이기지 못해서 넘어지는, 이러한 믿음으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인격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셋째가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떠는 믿음"이 있습니다. 요새도 보면 떠는 믿음이 많습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을 알고 벌벌 떱니다.

벌받을까봐 떨고 저주받을까봐 떨고, 죽을까봐 떨고 지옥갈까봐 떱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아이쿠, 또 죄를 지었구나.' 사업이 좀 잘못되면 '십일조를 안냈더니 망하나보다.' 민감합니다. 딴사람을 볼 때에도 그렇게 봅니다. 자동차 사고라도 나면 '주일날 교회에 안나갔더니 사고가 났구나'합니다. 떠는 믿음입니다. 벌벌 떱니다. 특별히 무당 섬기던 사람들은 떠는 데 소질이 있습니다. 본디 무당이 무섭습니다. 무당의 협박공갈에 벌벌 떨던 사람들이 이제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도 그저 무섭기만 한 것입니다. 자칫 잘못되어 벌받을까봐 마음 한번 편히 가지지 못하고 늘 움츠려 떨고 있습니다. 바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두려워합니다. 값으로 칠 수 없는 믿음이지요. 떠는 믿음입니다.

넷째로,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냄새나는 믿음입니다. 시체도 사람은 사람이지요 마는 죽은 것입니다. 옛날 있었던 믿음이지 이제는 없는 믿음입니다. 지금은 생명이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무익한 믿음'이라 합니다. 14, 16절에서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정욕 하나 이기지 못하니, 나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니 이익이 없고, 또한 1516절에서 말씀하는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다른 사람에게도 무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이라면 남이 배고픈 줄을 알 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입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춥지요? 몸을 녹이셔야지, 배고프지요? 뭘 좀 드셔야지." 말로만 하고 주는 것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주위에 보면 이렇게 말로만 생색내는 사람이 뜻밖에도 많습니다. 행함이 없으면 말은 더욱 미끈해집니다.

또한 '무능한 믿음'이고 합니다.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시간시간 믿음만 강조하였습니다. 매주일 믿음에 대한 설교만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합니다. 어느 날 한 교인이 목사님께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그 믿음 이야기는 그만하십시오. 믿음 하나면 답니까?"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으면 되지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습니다마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 하신 말씀을 믿었으면 따먹었겠습니까? 불이 나서 '불이야'하고 소리쳤는데 그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지 않으면 죽습니다." 믿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하늘나라를 믿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오래 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한 2년 간 신당동 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가대원이며 집사님이신 국민학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아주 똑똑한 분인데, 한번은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전도사님, 심각한 문제인데 길게 설명하지 마시고 YesNo로 간단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래서 우선 질문부터 해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까?" "전도사한테 그런 것을 묻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전도사님한테 묻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에게 묻는 것입니다. 정말로 있습니까?" 제가 대답을 해주고나서 왜 그런 질문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전도사님, 다른 설교는 할 것 없습니다. 그것만 믿게 해주세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만 확실하게 믿어지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실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명랑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아서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천국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얼굴이 왜 그토록 썩어 있어야 합니까? 지옥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 모양입니까? 살아 있는 믿음이란 엄청난 것입니다. 파워풀(powerful), 아주 강력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믿음이 병들고 시원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마지막에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17 : 5)"였습니다. 따라다니면서 보니 예수님이 믿음이 굉장합니다.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 앞에 부끄러워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무능한 믿음입니다. 다시 오늘의 20절에서 '헛된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산성 없는 믿음은 헛된 믿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참믿음은 무엇입니까?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 이 구절에 대해 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18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재미있는 변증이 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너는 믿음이 있다, 나는 행함이 있다 하고 서로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행함만 일 수 없습니다. 믿음만일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 행위가 있을 수 없고, 믿음이 있으면서 행위가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안 찾을까"-짠 음식을 먹었으면 물을 찾게 마련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하게 마련입니다. 믿음에는 절로 행함이 따릅니다.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19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습니다. 심판이 있을 것도 믿습니다. 지옥도 믿습니다. 그런데도 비생산적입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아무리 강하게 내리쳐도 안됩니다. 참 회개는 사랑에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햇볕과 바람의 내기' 는 누구나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어느 날,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두고 바람과 햇볕이 내기를 합니다. "누가 저 사람의 옷을 벗기는가 내기하자." 먼저 바람이 나섭니다. 그런데 바람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사람은 옷을 여며 쥐고 점점 더 웅크립니다.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햇볕이 나섭니다. 따뜻한 햇볕을 쨍쨍 내리쬡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옷을 훨훨 벗어 던지고 맙니다. 어느 쪽이 더 효과적입니까? 귀신은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그를 회개시키지 못합니다. 벌벌 떠는 신앙은 참신앙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습니다. 벌벌 떠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참 회개와 참 진실과 참 믿음은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게 될 때에 진정 사랑 안에서 생산적 신앙, 긍정적 신앙,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사명적인 신앙이 좇아나는 것입니다. 참 믿음, 그것은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대한 사랑의 응답이 따를 때에 나를 부정하는 행위가 있고, 죄를 이기는 행위가 있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선한 행위가 우러나게 됩니다. 참 믿음은 두려움에 떠는 신앙이 아닙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이지 두려워 떨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데에 참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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