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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있는 마음(말라기 4 : 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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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있는 마음(말라기 4 : 1-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밝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저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의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역사상 종래의 문화를 보든지, 혹은 종교족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때때로 어린이를 무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은 어린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각종 종교 의식에서도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리 자체에서도 제외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 결과 비록 옛날이 아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심지어 어린이들을 기름가마 속에 산채로 집어넣어 우상의 제물로 바치는 일들이 흔하게 있어 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무당들이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를 인질로 삼기도 하고, 사고 팔며, 그 때문에 딸을 낳으면 살림 밑천이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고약한 풍습이며, 잘못된 생활 철학이었습니까?

살펴보건대 오직 기독교만이 어린이의 존재를 소중히 여깁니다.

저들을 천국 백성으로 여겼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어 가면서까지 어린이의 존재를 높였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어린 아이 하나를 범죄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습니다.(18:6) 이와 같이 성경은 어린이의 존재를 천국의 의미에까지 높이며 가장 귀한 존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도 기독교는 역시 소망의 종교요, 미래적 종교임이 틀림없습니다.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만 60년대 초반 어머니 주일에 어느 미국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주일도 주일이거니와 이 어머니 주일은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굉장한 행사라도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카네이션 꽃 한 송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는 가운데 그저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하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 후에 그 목사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어머니 주일이 당신의 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굉장할 줄 알고 기대를 했었는데 오늘 아주 실망했으며, 그리고 어머니 주일인데 어찌하여 '어머니'라는 말이 없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에게 실망을 주어서 미안한데, 우리는 어머니 주일을 지키지 못한 지가 19년이 넘고, 우리 교인 가운데 적어도 3분의 1은 어머니란 소리만 나와도 이를 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부모들이 이혼하여 헤어지고 하면서 고아원에 갔다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자란 상처가 한이 맺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미운 생각부터 치솟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앞에 놓고 어머니의 사랑은 고귀하다느니 하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어머니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비통한 처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당시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기, 이곳은 정말 딴 세계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보니 그들이나, 우리나 피장파장입니다. 여기, 우리 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끔찍한 통계를 차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을 우리의 어머니들이 몸으로 자식을 버립니다. 부모들이 정신적으로 자기 자식을 버렸습니다. 사회적으로 버렸습니다. 이미 마음에서 버렸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가끔 우리 주변에서 가출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출이 아니라 이미 버린 것입니다. 마음으로 버렸기에 오늘 이 사건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생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두고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잘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새겨 보십시다.

그 원인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 세계도 나라도 상관이 없고, 남편도 아내도 상관없이, 심지어는 자식도 눈에 보이지 않고 오직 나 하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살겠다고 하다가 결국은 나도 죽도 남도 죽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요, 현대의 인간입니다.

또 하나의 원인은 현실주의입니다. 당장의 현재만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조급하게 생각합니다. 기다리지도 못하고 먼 앞날도 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꿈나무라고 말합니다. 미래 지향적인 귀한 꿈입니다. 따라서 너무 급하게 서둘러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아는 아인슈타인(Einstein) 박사도 중학생 때의 생활기록부에 보면 "이 아이는 앞으로 무엇을 하여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이상한 질문만 하고, 엉뚱한 생각만 하는 학생이었기에 선생은 일찍이 저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너는 남과 같아지려면 뒤떨어지지만 남과 다르게 나아가면 훌륭해질 수가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믿었습니다. 그는 훗날, 세계의 아인슈타인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아이가 어떠한 아이가 되기늘 원하십니까? 자라면 그저 자고, 먹으라면 먹고,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공부하라면 공부하는 이러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러한 아이는 신통한 아이가 아닙니다. 더러 싸우기도 하고, 맞고 터지기도 하며, 깨뜨리기도 하고, 말썽도 부리는 그런 아이들이 두고 보면 무엇인가 큰 일을 해낼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부모님들은 서둘러 속단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너무 쉽게 절망합니다. 계속 100점을 받던 아이가 어쩌다 99점만 받아도 싹이 노랗다며, 태산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야단이 납니다. 또한 어린 마음에 단순히 가지고 싶은 충동에서 몰래 남의 물건이라도 하나 가지게 되면 무슨 굉장한 도둑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마치 천부적인 도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소란을 피우며 절망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 남의 것 한두 번 도둑질 해보지 않은 어린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예 도둑질하고, 뭐고 하며 판단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우선 가지고 싶으니까 그냥 가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급하게 속단을 내리며 당장에 절망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오토매틱(automatic),자동 기계들이 우리 인간을 다 버려 놓았습니다. 가만히 앉았다가도 그저 스위치만 누르면 원하는 대로 처리가 되다 보니 만사가 다 이렇게 될 줄 아는데 자녀 교육만은 예외입니다.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당장에 하라고 했다 해서 "" 하며 그 일을 처리하던가요?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먼 훗날, 아주 먼 훗날에 기억할 것입니다. 당장에 무슨 열매가 맺혀지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유치원생을 보고 효자가 되어 달라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는 아무 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조급한 현실주의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극단적인 안일주의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 마음들이 문제란 말입니다. 저의 친구 중에 대단히 마음 아픈 일을 겪는 가정이 하나 있습니다. 제 친구가 유학을 떠날 즈음에 젖먹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친구의 부인되는 그 어머니가 이제 남편을 보내 놓고는 이 아들 하나를 아들겸, 남편겸, 친구겸, 애인겸, 그렇게 전심으로 사랑하며 기웠습니다. 이렇게 애지중지하며 끼고 자다가 어느 날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제는 서양식으로 한답시고 이 아이를 혼자 다른 방에다 재우게 되었는데 이 어린것이 갑작스레 이런 환경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는 울고 불며 때려부수고 하다가는 지쳐서 잠을 자고는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익숙해져서 별다른 일없이 잘 자랐고 이 부모들은 무사히 다 지나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더니 사고를 냅니다. 몹시 말썽을 부리는 중에 정신병원에까지 출입을 하게 됩니다. 이에 부모들이 담당 의사에게 그 원인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의사의 대답이 "이 아이가 당신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이 아이를 버렸오" 하더라는 것입니다. ! 보십시오. 그토록 어머니의 사랑을 받다가 어머니를 빼앗겼는데 이 아이가 아버지를 알 리가 있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웬 남자가 와서는 자기의 애인을 빼앗아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라 하고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원수요, 어머니는 배신자인데 이제와서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때에 뿌려 놓은 씨앗을 오늘에 와서 거두는 것입니다. 그 부모들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나 하나 편하자고, 나 하나 안일하자는 것 때문에 이 엄청난 악의 씨를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버렸기에 저들이 떠나는 것이지 저들이 나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극단적인 물질주의가 문제입니다. 요즈음 어느 가정을 가보든지 어린이가 있는 집이면 재미있고 좋은 장난감으로 참으로 많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그것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는 그 집 어린이에게 ", 너는 장난감이 많아서 참 좋겠다. 나는 어렸을 때 이런 것은 볼 수도 없었단다"라며 부러워하는 말을 해봅니다. 그랬더니 어떤 어린이 하나가 말하기를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나 떼어놓고 저희들끼리 둘이 놀러 가려고 사다 준 것입니다"라며 조금도 고마운 마음이 없습니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가득하고, 옷도 많고, 장난감도 이것저것, 자전거다 뭐다 해서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용돈도 잘 줍니다. 그런데도 왜 불만입니까? 이는 돈으로, 물질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자녀의 교육만은 돈으로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가 여기까지 통하겠다고 합니다만 여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마음이 빠졌고 정성이 없어요. 만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참으로 감격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도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도 돌이키게 하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나라에 임할 축복입니다.

여러분!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어려운 철학적인 설명은 그만두기로 하고, 마음은 곧 생각입니다. 이해입니다. 따라서 저들의 세계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이유 없는 반항이라지 만, 이유 없는 반항에 이유가 있습니다. 간혹 어떤 어머니들이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와서는 "이 애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요"라며 하소연을 합니다. 글쎄요. 자기가 낳은 자식이데 이제 와서는 자기는 모르겠다며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럴 때면 제가 간단히 말을 합니다. "마음이 없으니까 모르지요"라고. 마음이 있고야 이해가 되는 것인데 마음이 없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입니다. 깊은 이해와 성의 가지고 대하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자수성가를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에는 신문팔이도 하고 구두닦이도 하면서 공부를 하였는데 너는 이 좋은 조건에서도 왜 공부를 못하느냐? 먹을 것이 부족하냐? 용돈을 안 주냐? 무엇 때문에 공부를 못하느냐?"며 안달을 합니다. 자꾸만 그러니까 한 번은 그 아들이 제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한 번만 더 그 말씀을 하시면 저는 집을 나가겠습니다. 자수성가 해야겠으니까요. 나는 고아가 아닌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나도 생각이 있어서 이 굴욕을 참는 것입니다"라며 대단한 감정으로 나옵니다. 생각하면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고아가 아닌데 어떻게 고아가 되란 말입니까? 신문팔이할 처지가 아닌데 신문팔이 이야기는 왜 하는 것입니까? 그 아이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여러분, 이해하는 것은 생각을 주어야 합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마음은 시간입니다. 마음에 있는 사람과 만나게 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됩니다. 마냥 시간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시간에 인색해진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루함이 없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기다림의 시간과 그 길이가 마음을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우리의 어린 자녀들과 얼마의 시간을 나누고 있는가? 나아가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이것만이 문제입니다. 아이들은 계속 그것만을 원할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자는 것도 아니요, 많은 것을 듣고 배워야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같이 있다는 것, 함께 한다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또한 마음은 기쁨입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것을 재고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기쁜 마음으로 하시나? 억지로 하시나? 그것을 재고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선물을 주면서 말을 많이 하면 아니 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돈을 주면서도 말을 많이 하면 그것은 무효가 됩니다. 이는 왜냐하면 용돈을 달라고 했을 때에 처음에는 안 준다, 안 된다, 했다가 할 수 없이 나중에 내어놓으면 이 아이들이 그 돈을 받아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아이 참, 돈 벌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빼앗는 것이지, 주는 것,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이것은 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은 왔으나, 마음은 받은 것도 없고 준 것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위로 딸을 일곱 낳은 후에 막내로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걱정인 것이 그 딸 일곱이 무슨 말을 할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아들 하나를 낳기 위한 부산물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또 어떤 집에는 딸 이름을 신자라고 지었는데 왜 신자이냐 하면 다음 번에는 아들 낳을 줄 믿는다는 것의 신자입니다. 이 딸이 그 이름을 가지고 다니자니 지금 효도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근본적으로 태어난 것부터 싫어했더란 말입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고, 이는 실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가끔 저의 어머님의 이야기를 합니다만 어쩌다가 제가 말썽을 부리게 되면 저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어머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를 낳기 위해서 10년 동안 기도하였다. 새벽과 밤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년 동안 기도해서 너를 낳았다. 너를 낳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느냐? 온 마을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짓을 하다가 라도 이 말씀 앞에는 꼼짝 못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태어난 그 자체를 먼저 소중히 여겨야 그 다음 이야기가 무엇이고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것은 괜히 태어나 가지고 말썽이라는 식이니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 이를 마치 천국과 같이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물리치시며 어린이들과 더불어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마음을 주는 것입니까? 그리고 진정 마음으로부터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저들을 만남이 최고의 기쁨이 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아이들과 같이 있는 기쁨이 최상의 것이겠건만 무슨 핑계라도 대어 어디로든 나가고 싶어하는 어머니!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어린아이와 같이 있는 것이 한없이 즐겁고 행복한 그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요, 어머니의 자격이 있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과 같이 있는 것이 귀찮고 짜증스러워서야 어찌 감히 교육을 운운하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어린아이들은 마음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화초를 키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화초도 사실상 즐거운 마음으로 가꾸면 잘 자라지만 우울한 마음으로 키우면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한번은 미국의 어느 공원에서 한 노인이 벤치에 앉아 졸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 일이기에 구경 삼아 따라가면서 눈여겨보았습니다. 그 노인의 팔에는 시계줄 같은 팔찌가 있는데 거기에다 연락처인 아들의 이름과 주소를 써놓았습니다. 이것을 보고는 순경이 급히 그 주소로 전화를 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전화를 걸었는데도 아들이 오지를 않습니다. 알고 보니 죽었소? 살았소? 하고 묻다가 죽었다고 하자 "그럼 장의사로 보내시오"하고 끝난 것입니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조금 한가한 어느 날 한 양로원에 들러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한 노인에게 아들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양로원에 있느냐고 하였더니 그 노인의 말이 이렇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 그 아이를 돌보지 않았거든요.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귀찮아했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대우를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라오"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주지 않았으니 나 또한 마음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고아원이 많고, 양로원이 많은 나라는 망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아야지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고아원도 양로원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뒷수습이나 하는 것은 그 해결책이 아닙니다. 뒤늦었지만 여기서부터 다시 생각을 하십시다. 이제는 자식을 마음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메시아가 올 때에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곧 마음과 마음이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이 중생되어야 합니다. 한갓 자연에 불과한 생존 본능이나 종족 본능에 의한 구조적 사랑이 아니라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사랑으로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만남!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오직 그리스도의 역사와 그 은혜로만이 가능합니다. 잠언 2326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찌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그러나 이제 자녀들은 말합니다. 보다 먼저 부모님에게 부탁하는 말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을 먼저 저에게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진실한 만남이 먼저 있고서야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이 돌이키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저주로 그 땅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원수 되는 그곳이 저주받은 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으로 저들을 인도하고, 온전한 사랑의 마음을 줌으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그 결과 마음의 응답을 받아 아름다운 메시아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에게 귀한 가정을 주시고, 귀한 자녀를 주셨건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들을 영접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지 못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제는 당신 안에서 저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줌으로써 마음을 받는 응답을 받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돌아가고, 자식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있는 아름답고 귀한 가정이 되며 복된 사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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