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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알라(롬13:11~14)
이제 로마서 강해 50회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 구절구절이 다 귀한 말씀이고, 읽을 때마다 은혜가 됩니다마는 그래도 이 가운데서 어느 구절이 제일 마음에 들고, 또 어느 구절이 내게 더 많은 은혜를 준다, 하는 말씀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제가 개인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고, 때때로 이 성경을 통해서 어려움과 낙심을 이기기도 하고, 또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하는 그런 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저기 강연을 맡는다든가 혹은 설교를 한다든가 할 때에 오늘의 성경을 본문으로 해서 말씀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가리켜 흔히들 '기독교의 역사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의 시간관'이라고 제목을 붙여 말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논리적으로 많은 변증을 하며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에서 그 핵심은 다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역사관입니다-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귀한 말씀이 오늘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11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기를 알라, 이 때를 알아야 된다 함입니다. '이 때'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보셨는지 모르겠으나 소위 고급시계를 보면 시계라고 쓰지 않고 '크로노미터'라고 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크로노스 미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크로노스 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카이로스'는 '어디서 어디까지'-이런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시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우리 인간의 시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이 '카이로스'라고 하는 것은 딱 정해진 것입니다.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카이로스'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시간입니다.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느만큼의 한계를 정해주십니다. 여기서 여기까지--이것은 우리 몫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에요. 그뿐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내가 더 늘릴 수는 없어요. 더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어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서 바른 인식을 가져야 됩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은 시간이 항상 있는 줄 알아요. 잘못된 것이지요. 언젠가 나이가 좀 많은 처녀한테 '어쩌다가 그렇게 노처녀가 됐소?'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주 명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젊은 줄 알았지요. 젊음이 계속될 줄로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사이게 다 지나버리더군요." 이제 내 인생 되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렇잖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이 소중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 마음대로 더 연장할 수도 없고, 더 크게 만들 수도 없어요. 어찌할 수가 없는 거예요. 주어진 시간-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시간에 대한 질적 이해가 중요한 거예요. 그 양을 늘릴 수는 없어요. 시간을 질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성공하려면 적어도 자본이 있어야 하고, 지식이 있어야 하고, 경험이 있어야 하고, 노력이 있어야 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나 절대적인 것이 하나 있어요. 플러스 알파-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혹 시험을 본다든가 할 때에 천천히 생각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정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경우도 많아요. 딱 그 시간 안에 풀어야 한다는 게 문제예요. 제가 옛날에 유학 갈 때에 TOEFL시험이라는 것을 봤는데, 그것 참 힘듭니다. 제가 시험 본 것 중에 그렇게 어려운 시험은 처음인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정해진 시간 안에 그 문제들을 다 풀어야 했으니까요. 빨리빨리 풀어야 했으니까요. 그래,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시간이 없어요. 그 시간 안에 풀지 못하면 소용없어요. 그래서 이 시험은 꼭 IQ테스트 같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말'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다 듣고 나서 한참 있다가 충청도 식으로 '그랬어유?'하면 되겠습니까? 척 듣고 척 대답해야지요. 빨리 회전이 안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에요. 무릇 시간이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그 일을 다 해야 하는 거예요. 생각해내야 하는 거예요. 두고두고 생각하겠습니다 하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지요.
주어진 시간 '카이로스'라고 하는 것은 present time이에요. 언제나 현재예요. 이것만이 현재예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예요. 현재라고 하는 카이로스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시간이요, 한때요, 동시에 내 시간입니다. 시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마는 대략 몇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첫째가 시간은 마치 원과 같다, 하나의 circle이다-시간은 동그란 원과 같이 돌고 도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빙 돌아서 그 자리에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봄이 오고 겨울이 되었다가 다시 봄이 돌아오는 것처럼 돌고 돈 거예요. 그래, 이것을 소위 윤회설의 기초라고 합니다. 윤회설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순환적으로, 원으로 이해하는 시간 개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시간은 line이라고 합니다. 시간은 직선적인 것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이것은 직선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되돌아오는 법은 없다-이것이 일반적인 헬라사람들의 시간 이해입니다. 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힌두교와 불교의 이해입니다. 또 이 둘을 합쳐 가지고 시간을 나선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돌고 돌면서 어떤 방향으로, 직선으로 가는 것이다-이런 나선형 시간 이해가 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성경이 말씀하는 시간에는 직선적인 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창조가 있고 심판이 있으니까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니까요. 이런 면에서는 직선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시간 개념은 이른바 'fact oriented time concept'입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커다란 옷장에다가 차곡차곡 물건을 재워놓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 안됩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시간이란 그 사건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이해가 바로 인간의 것입니다. 그런 개념 자체가 인간의 것이에요. 하나님께는 사건과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시간이란 당치않은 소리예요. 그 속에 시간이라고 하는 사건이 있을 뿐이에요. 그런고로 사건이 있으면 그것이 시간으로 차 있는 것이고, 사건이 없으면 그 시간도 함께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 선거운동 하는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지도를 딱 펴놓고 어느 도에는 몇 명, 또 어느 도에는 몇 명…… 이렇게 합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사람 많은 곳에서 국회의원도 많이 나오는 것이에요.
널따란 허허벌판에는 몇 사람 없어요. 그곳에서 선거운동 하러 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람 많이 모인 곳을 중심으로 해야 되는 것이지, 지도를 펴놓고 바둑판처럼 잘라 가지고 개념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그것을 생각해야지요. 거기에 중점을 두고 선교 정책도 세우고, 경제 정책도 세우고, 선거 전략도 세우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사건 중심으로, 그 시간의 질, 질량에 의해서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시간이 있을 거예요. 하루종일 멍청하게 빈둥빈둥 보냈어요. 그것은 공친 날이지요. 뭔가 하루종일 부지런히 했어요. 비록 한 시간이지만 많은 일을 해냈어요. 그러면 그 시간은 큰 시간이에요. 거기에 시간이 있었지요. 빈 공간이라는 것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시계나 달력을 기준해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자,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 자체가 생명이에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피뢰침을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젊었을 때에 서점을 경영했습니다. 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서점에 와서 책을 사고해서 아주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어떤 사람이 책을 하나 고르더니 "이것 얼마입니까?"하고 물어봅니다. 그는 "3달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이 한창 바쁜 그를 붙들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책값을 좀 깎읍시다. 얼마에 줄 수 있겠습니까?" "3달러 50센트입니다." 그러나 손님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나는 지금 책값을 좀 깎자는 것인데 오히려 더 비싸게 부르는 법이 어디 있소?" 이에 프랭클린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책값은 4달러입니다." 손님은 계속 따졌습니다. "나는 싸게 사자는 것인데 책값을 오히려 자꾸만 더 부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요?" 프랭클린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시간은 돈보다도 비싼 것입니다. 당신은 내 시간을 계속 빼앗았어요. 이제 책값은 5달러입니다." 당신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않았느냐, 3달러에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 것이지 왜 긴 이야기를 해 가지고 내 시간을 빼앗느냐 함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지요.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돈을 얼마 달라는 것은 줄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한 시간이라 해도 시간을 달라는 것은 줄 수가 없어요. 왜요 내 생명 중에서 한 시간을 잘라주는 것이니까요. 이것을 주기가 어려운 거예요. 빈둥거리는 사람의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좋겠지요. 그러나 바쁜 사람의 시간이라는 것은 한 시간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어요. 시간이라는 것은 돈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해요. 그 자체가 생명이니까요.
바울이 이해한 시간은 어떤 시간이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오시는 그 날 그 시간을 정해놓고 거기로부터 오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정해놓고 그것으로부터 오늘을 생각하면서 count down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몇 년, 이제부터 몇 년, 이렇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몇 년 남았느냐, 몇 년 남았다, 한 시간 남았다…… 이렇게 자꾸만 시간이 작아지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이제부터 얼마'-이렇게 세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재림이라는 D-DAY를 정하고 그 D-DAY로부터 거꾸로 count down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에도 어떤 사람은 그저 보약 먹고, 좋은 음식 잘 먹고, 어떻게 해서든 오래오래 살아보려고, 시간을 연장하려고 합니다. 살아봐야 별 볼일도 없으면서 말이에요. 그렇잖아요? 그것은 미련한 생각이지요. 어차피 죽어요.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놓고 거기서부터 count down을 해야지요. 얼마 남았다, 얼마 남았다, 하고 말입니다. 실례지만 저는 소망교회에서 은퇴할 날을 정해놓고 있어요. 2003년 12월 31일-그 날이 제가 소망교회에서 은퇴하는 날이에요. 이것은 요지부동이에요.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면 그대로 될 거예요. 그 날로부터 시작해서 저는 늘 생각합니다. 몇 년 남았다, 며칠 남았다, 몇 시간 남았다… count down하는 것예요. 시간을 이렇게 계산해야 하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고무줄처럼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약 한 첩 먹었다고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아니예요. 어림없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 날이 어느 날인지는 모르나 분명히 내게 주어진 날이 있어요. 그리고 그날까지의 시간은 자꾸 짧아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생각을 해야지요. 시간은 자꾸 짧아지고 있는 거예요. 나 중심으로 시간을 이해하지 말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세요. 특별히 재림 중심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Omega point, D-DAY, 거기에 기점을 두고, 거기를 기준해서 오늘을 생각하고 하나하나 count down하는, 그런 마음으로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특별히 어두움과 빛에 비유해서 말씀합니다. 지금은 어두운 시대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밝은 시대입니다. 밝음이 다가오고 있어요. 어두운 세상에 살면서 지금 밝은 빚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에요. 그것이 사도 바울의 시간 이해입니다. 어두움이라 는 것은 혼돈이요, 무질서요, 몽롱한 것이요, 그리고 무력하고 무가치한 것입니다. 또 윤리적으로 말하면 방탕한 것이요, 도덕적으로 말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듯이 수군수군하는 것이요, 당(黨) 짓는 것이요… 이런 것들이 다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것은 다 어두운 것들이에요. 밝은 데서 할 짓이 못돼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밝은 데서 남을 흉보지 못하잖아요? 밝은 데서 죄짓지 못하잖아요? 어두운 데서 하는 일이 있고, 밝은 데서 할 일이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은 어두워서 아직도 의인지 불의인지 혼미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두운 짓을 하고 있어요. 어두움에 속하고 어두움에 살고 있어요. 그것이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빛이라는 말은 무엇이냐-빛은 의식이요, 창의력이요, 질서요, 충성이요, 단정함이요, 성이요, 화목이요, 사랑이요… 이것은 다 의로운 것이에요. 이것은 다 빛에 속하는 것이에요. 자랑스러운 것이에요. 하나님께나 사람 앞에 떳떳하고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는, 빛 앞에서 자랑스럽게 행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바로 빛에 속한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현재라는 것은 밤에 속한다고 말씀합니다. "밤이 깊고(12절)"-깊은 밤이라는 이 시점에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밤을 의식해야 됩니다. 밤이 깊었어요. 아주 깊었어요. 의와 불의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사람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는 만큼 깊은 밤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악의 세력 속에 살아가고 있어요. 이것을 밤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깊은 밤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객관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밤에 대한 의식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어둡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두움 중에서 어두움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어두움에 살았으니까, 어두움에 속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빛이 있는 것도 몰라요.
죄송하지만 장님 가운데에도 세상을 살면서 장님의 된 사람도 있고, 나면서부터 장님이 된 사람도 있어요. 나면서부터 장님이 된 사람은 그리 불편하지 않아요. 빛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으니까, 빛이라는 것을 본 일이 없으니까 깜깜하게 살더라도 그런대로 불편은 없다고 합니다. 답답함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않겠어요? 그러나 중도에 장님이 된 사람은 안그래요. 밝은 세상과는 딴판으로 갑자기 어두워진 거예요. 이렇게 되면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요. 특별히 얼마 동안은 사람 미치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두움에서 나서 어두움에서 살아버린 사람은 그 불편함을 몰라요. 밝은 빛을 모르니까요. 바깥세상을 모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두움 자체를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서 도대체 어두운 것인지 밝은 것인지도 모르는, 그 의식이 없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알고, 불의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불의한 줄 모르고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세상이란 이런 것 아니겠는가-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자다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11절)"라고 말씀합니다. '깰 때가 되었다.' 또 12절에서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밤이 깊고'-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밤이 깊었어요. 밤이 깊었다는 말은 아침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중요한 말씀이 있어요. 요한 웨슬리의 아주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시간을 허비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멍청하게 지내는 것, 그것은 시간낭비다. 시간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죄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입니다. 우리는 시간과의 관계에서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시간에 충실해야 합니다. 최선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그런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더구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유감스러운 생을 살아도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이제는 깰 때가 됐어요.
벌써 깰 때가 됐어요. 그런데 깰 때가 언제냐 하는, 그 '때'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서 깨는 게 아니라 어두운데 깨는 거예요. 오늘도 보면 환하게 밝은 다음에야 눈을 뜨는 사람들이 있어요. 게으름뱅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가하면 꼭 어두운 데서 눈을 뜨고, 어두운 데서 세수를 하고, 어두운 데서 화장을 하고, 그리고 빛을 향하여 나서는 거예요. 환하게 밝아서야, 요새로 말하면 9시, 10시나 된 다음에야 눈 비비고 일어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시간만 낭비한 것이지요. 그런고로 본문에 '깰 때'라고 하는 말이 언제이고 하니 아직도 밤인 거예요. 그런데 아침이 가까워온다는 것을 미리 의식하고 오히려 미명에, 아직도 어두운데 깨는 거예요. 어두운 중에 깨어서 빛을 기다리는 거예요.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이것이 사도 바울의 시간 개념입니다. 역사에 대해서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보초병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처럼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1절)"-구원이 가까이 왔다,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함입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어요. 깜깜해요. 그런데 저 앞에 있는 빛을 미리 의식하고, 몇 시간 안 남은 것을 알고 벌써 깨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지가 바로 '단정히 한다'입니다. 어떻게요? 바로 '낮에와 같이'입니다. 이 말씀이 그렇듯 소중할 수 없어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13절)"-지금은 밤이에요. 그런데 낮에와 같이 단정히 한다 함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밤중에 일어나서 벌써 낮에와 같이 불을 환히 켜놓고, 세수하고, 화장하고, 옷 입고, 다 하고 나면 아침이 밝아와도 상관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침이 밝아올 때에 누구를 만나든지 상관없어요. 그러나 환히 밝은 다음에야 눈을 뜨면 아직도 세수를 안 했지요, 눈꼽이 있지요, 침도 흘렸지요…… 이것은 못 봐줍니다. 그렇잖아요? 그래서 어떤 책에 보니까 정말로 사랑받는 아내는 세수하지 아니한 얼굴을 남편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상당히 부지런해야겠습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내라고 해도 눈꼽 있고 침 흘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게 어떻게 아름답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늘 단정하게 해서, 깨끗하게 해서 화장하지 아니하고 단정하지 아니한 얼굴을 볼 수 없게, 남편이 눈 뜰 때마다 '언제 이렇게 단정하게 했나?'라고 생각하게끔 보여주어야 사랑을 받는 법이지요. 항상 그 자리에서 뭉개고 있으면 영 입맛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깰 때가 언제냐-깰 때가 되었어요. 아직도 어두워요. 그러나 아침이 가까워오는 것은 틀림없잖아요? 그러니까 벌써 일어나서 깨끗하게, 단정히, 낮에와 같이---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보는 사람은 없어요. 아직도 어두워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벌써 저 앞에 가 있어요.
저 아침에 가 있고 낮에 가 있어요. 그런고로 낮에와 같이 밤에 단정히 한다는 말이에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직 주님께서 재림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재림하신 것처럼, 재림한 주님을 오늘 맞이하는 것처럼 지금 벌써 단정히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어두움에 살아요. 나는 벌써 빛에 살아요.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이야 보거나 말거나 상관없어요. 미래에 살고, 종말에 살고, 영원에 살고,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의 빛 안에 벌써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저 밝은 아침에 있어요. 그리고 어두움 가운데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남이 보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밝은 빛, 그 낮에, 그 빛 앞에 벌써 자기를 다 노출시키고, 이 어두움 가운데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라고 말씀합니다. 벗고 입자어두움에서 입었던 잠옷, 어두운 데서만 가능했던 그런 것들은 다 벗어버리고, 활짝 벗어버리고, 그 다음에 빛의 갑옷을, 빛 안에서 되어질 수 있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목사님들은 갑자기 어디 가서 설교할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밤중에 집에서 나온다 해도 꼭 정장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새벽에 나올 때에는 밖은 깜깜해도 꼭 정장을 하고, 화장까지야 안 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깨끗이 하고, 면도도 하고, 넥타이도 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 인도하고 나서 바로 어디로 가더라도 그냥 갈 수가 있지요. 만일에 제가 밤에 입었던 옷을 대충 갈아입고, 넥타이도 매지 않고, 세수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나왔는데 갑자기 누가 와서 '목사님, 설교하러 좀 가십시다'하면 '잠깐 기다리세요. 가서 옷 입고 오겠습니다'-그래야 할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항상 예비 되어야, 낮에와 같이 단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일을 다 벗고 빛의 옷을 입어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대해서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 예수믿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자기행위에 있어서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방탕했던 사람이에요. 이미 타성에 젖었었어요. 믿음대로 살려고 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거예요. 선한 일 좀 하려고 했다가 또 쓰러지고, 깨끗하게 살려고 했다가 또 죄 짓고…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늘 갈등과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이 모순과 갈등의 생활을 언제까지 해 야 합니까? How long? 내일입니까, 모레입니까? 언제부터 바르게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깨끗하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는 구제불능입니까?' 어느 날, 그는 정원을 거닐면서도 계속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아이의 음성같은 소리가 가까이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Take and Read'--'취하여 읽으라.' 그는 당장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폈는데, 그 곳이 바로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본문을 읽고, 또 읽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 가운데서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게 됩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이 말씀이 확실하게 그 가슴을 때렸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받고, 옛날의 방탕했던 했던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대로 따르고, 이 말씀의 능력에 의지해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불렀습니다. 방탕아였던 그가 성자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아우구스티누스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되게 한 근거와 능력이 바로 이 로마서 본문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섯 가지 죄목을 말씀합니다. 여기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어두움에 속한 것들이에요. 그 첫째가 '방탕'이라 말씀합니다. 방탕이라는 것은 목적과 중심과 기준이 없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탕, 목적 없는 생활-이것은 어두운 데서 생활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술취함'입니다. 이것이 모든 악의 근원일 것입니다. 술로 인해서 오는 용기,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이에요. 방법도, 동기도, 결과도 술로 인해서 된 것이라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하지 말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음란'이라고 하는 말이 본문에 나옵니다. 이 말은 '코이테'라고 하는데 immorality, 부도덕성을 말합니다. 육체화환, 육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영적 사랑도, 정신적 사랑도 없는 다만 육체에 끌려가는 행위-이것을 음란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이 '호색'입니다. 이 말은 '아셀게이아'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shamelessness라고 표현합니다. 부끄러움 없는 것이 호색입니다. 비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 죄된 일에 대해서 담대한 것이에요. 아주 공개적이고 용기가 생겼어요. 부끄러운 일은 어두운 데서 숨겨져야 하는데 부끄러운 일이 당당해졌어요. 이것이 바로 호색입니다. '쟁투'라는 말은 '에리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특권 의식입니다. 자기 자랑에 속한 것이에요. 또 시기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것은 원수 맺는 그 전초적인 심리입니다. 시기가 원수를 만듭니다. 무릇 사기와 질투가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사악한, 기본적인 악입니다.
자, 이런 악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어두움에 속한 것입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은혜로 옷 입고, 구원으로 옷 입고, 생명력으로 옷 입고, 거룩함으로 옷 입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4절)"-육신에 속했지만 목적은 그리스도께 있고, 신령한 것에 있어야 합니다. 신령한 자가 다스리는 육체, 신령한 하나님의 형상을 다스리는 이성-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때를 알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우주적인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런 때가 되겠습니다마는, 우리 개별적으로는 개인적인 종말을 향해 말씀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처한 시점을 알고, 비록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앞에 다가오는 빛을 미리 의식하고, 빛의 갑옷을 입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그리스도고 옷 입고 사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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