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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네 믿음이 크도다(마태복음 15장 21~28절)

by 【고동엽】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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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크도다(마태복음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네 믿음이 크도다"-오늘 본문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신 것 같고,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도 여기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믿음이 크다.' 참 굉장한 말씀입니다. 크다는 말에도 의미가 많이 있겠습니다마는 원문대로보면 메갈레피스티스입니다. '메갈레'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메가톤'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를테면 부자도 웬만한 부자는 갑부라 하고 더 큰 부자는 거부(巨富)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이 크다는 것에도 조금 큰 것, 더 큰 것, 엄청나게 큰 것이 있겠는데, '메갈레'라고 하면 가장 큰 것, 위대하게 큰 것을 뜻한다고 할까요.

믿음에도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메갈레피스티스' '네 믿음이 위대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믿음에 대해 칭찬하신 일이 여러 번 있는데, 이상하게도 유대사람으로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그런 칭찬을 들었지만 그는 로마인입니다.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라는 칭찬을 받는 사람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게 천하게 취급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가장 높임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이 필경은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이 천하디 천한 여자를 보십시오. 창녀가 아닙니까? 이런 여자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그만큼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시쳇말로 '별 볼일 없는' 여자입니다. 당시의 세상에서야 이런 여자 하나쯤은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런 여자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믿음을 칭찬 받는 그 순간, 그 여자는 인격도 높임 받게 된 것입니다. 삶의 의미도 그 후로부터는 높임 받게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크다'-그실 사람은 믿는 만큼 크다고 생각됩니다. 아무 것도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존재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정도 믿고 사십니까? 하나님께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나 내 친구에 대해서 과연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사에 의심을 합니까, 아니면 온전히 믿어버리는 편입니까? 아무튼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는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큰 것입니다. 인격이 크고 사람됨이 큰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삽니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항상 의심만 풍깁니다. 남도 의심하고 나 자신도 믿지 못합니다.

보아하면 항상 의심에서 비롯된 소리만 지껄이고 사는 사람은 조그마한 사람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사람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필경은 눈에 띄지도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남들이 다 의심하는 사람을 두고도 "그사람, 그런 사람 아니야." 이렇게 감싸줍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점점 커지는 것을 우리는 우러러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위대한 믿음 위에 이적을 베푸십니다. 이적은 믿음 위에 주십니다. 믿음이 전제되어야, 믿음의 그릇이 있고야 이적을 선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믿음 위에 소원성취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소원이 있다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는데, 여기에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전제되고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믿음만큼, 믿음의 크기만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원이 있는데 믿음이 없다면 그 소원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소원이 있다 합시다. 그렇다면 먼저 그것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믿는 만큼의 소원이 성취된다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믿음 하나만 가지고 큰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이방사람을 격을 높여 칭찬하심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유대사람이라고, 성경 지식이 많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전통적인 유대 종교의식에 익숙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문이 웅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격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오직 하나만을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 믿음 하나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의로 여기시고, 그 믿음이 근거가 되어 오늘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다른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음 말고는 모든 조건을 다 배제한다는 신학적 의미가 오늘의 본문에 깃들여 있습니다. 그 사람의 과거도, 그 사람의 현재도, 그 사람의 처지도, 그 사람의 신분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교리가 여기에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한번 봅시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본래 이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경험에는 없지만 이런 사람도 고치고 저런 사람도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가나안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성서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여인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긴 신학적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메시야의 별명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것은 곧 '당신은 메시야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며 메시야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똑같은 이야깁니다.

틀림없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병 고치는 분, 혹은 마술적 능력을 행하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만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도 저런 문제도 모두 해결되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자도 낫고 장님도 눈을 뜨고, 내 딸도 정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단순히 의사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의 이적을 행하는 마술사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다는 것,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이런 문제 저런 문제,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부릅니다. 메시야적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는 것,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두 번째로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점은, 이 사람의 신앙의 동기에 상당히 원색적인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기가 모성애라는 것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고 좀더 깊이 캐어보면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가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입니다.

지금 딸은 그 자리에 와 있지도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 가서 무슨 미치광이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25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제 딸이 불쌍합니다. 도와주소서'가 아닙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이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여겨주소서'-이런 마음입니다. 사실 귀신들린 딸이야 남보기 딱하지 본인이야 뭘 알겠습니까? 세상모르고 소리지르며 돌아다니는 것이지요. 정작 불쌍하고 고통스러운 쪽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정신병자를 가진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 이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 아픈 가슴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도 아버지가 아들로 해서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데, "내 아들이 불 속에 뛰어들어가고 물 속에도 뛰어들어갑니다. 귀신이 이 아이를 죽이려 합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이런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제가 30년 전, 신당동 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어느 집을 심방 갔습니다. 그 집 내외분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고 가정환경도 대단히 좋아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딱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참 귀여운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소아마비였어요. 그래서 그 어머니는 그것을 치료해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여러 병원을 다니며 치료란 치료는 다 해보았답니다. 제가 심방 갔을 때도 막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왔다고 하시면서 "목사님, 저 애가 글쎄 조금 걷는답니다" 하면서 기뻐합니다. 여기까지면 좋았을 뻔했는데, 같이 갔던 집사님이 걷는 것을 한번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래 아이는 발에다 쇠로 만든 딱딱한 것을 대고 목발을 짚고는 간신히 몇 발짝 떼어놓습니다.

그러나 "이리 와라, 이리 와라"하는 소리에 몇 발짝 더 걸으려던 아이는 그만 쿵하고 쓰러져 버렸습니다. 순간, 어머니가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워서 말입니다. , 뭐라고 할말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의 간구를 들어보십시오. '나는 정신병자 아이를 가졌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는 화평이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남편과의 사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습니다. 나는 지금 이 어린아이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어머니를,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렇게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병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간절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딸을 사랑하는 간절한 어머니의 마음이 이같이 간절하고 절실한,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마는 많은 시험, 많은 굴욕을 개의치 않습니다.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저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느냐." 이것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공통적인 마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 믿음의 여인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들렸나이다.' 그 말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는 꼼짝못하고 꾸뻑하는 것을 봅니다. 자식이 아프다거나 시험을 본다던가 하면 정말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내 딸이 귀신들렸습니다'하는 말에 그 아픈 가슴에 대한 간절한 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어머니의 사랑, 이것이 동기가 되면서 이 같은 위대한 믿음을 창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사람의 신앙이 처음에 비하여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점점 강해졌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믿음이 시원치 않던 사람도 자주 시련을 겪고 어려운 일을 거듭 겪는 과정에서는 믿음이 상승작용을 해 더 굳어지는 법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처음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의 그 믿음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런 시련 저런 시련을 겪고난 연후의 믿음을 비교한다면 후자의 경우에 믿음이 더 굳습니다. 거기에다 핍박을 받게 되면 더욱 더 굳어집니다. 핍박과 함께 성장하는 신앙, 환난과 함께 점점 내용이 충실해지는 신앙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도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놓아두고, 안일해지고, 만사가 다 편안해지면, 그만 노곤해져서 잠들어버리고 맙니다. 쉬고 쉬다가 끝내는 썩고 맙니다. 그래서 조금 빡빡하게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위대한 사람의 경우엔 모르겠습니다마는 보통 사람은 무사 안일하면 안됩니다. 아무래도 일거리가 있어야 됩니다. 시험거리, 핍박, 환난도 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같은 사람이라도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를 비교하면 실패할 때가 더 간절하고, 건강할 때와 병든 때를 비교하면 병든 때가 더 진실합니다. 똑같이 기도를 한다 해도 절박한 문제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다릅니다. 계속 시험을 당해야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함께 다녔던 곽씨 성을 가진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저를 동생이라고 부르던 그분은 어렸을 적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게 아니라 나이 서른이 돼 가지고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잘 믿었고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신학대학까지 왔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다름 아닌 아내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남편을 믿게 했다고 합니다. 교회 집사인데, 남편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니까 슬슬 느슨해지더랍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제 아내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합디다. 당초에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던 사람이 새벽에 안나오더니 저녁에도 안나오고 요새는 낮에 간신히 나오는데 그것도 한 달에 한 번이랍니다. 핍박이 없으니 이렇게 시들어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확실히 핍박을 받으면서 점점 강해지고 충실해지고 온전해지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떤 역경을 겪으면서 성장했느냐, 곧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자랐는지, 어떤 시험이 있었는지-먼저 인종적인 차별이 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은 전부 이스라엘사람인데 이 사람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사람들은 가나안사람들을 근본적으로, 종교적으로 무시해왔습니다. 전혀 자기들의 세계와는 관계없는 사람들로 봅니다. 인종차별입니다. 이방사람들로서는 결코 극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하나의 문제는 그가 여자라는 점입니다. 그 당시는 남녀 차별이 많은 때였습니다. 웬 여자가 와서 소리를 지른다 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율법사도 아니고 니고데모도 아니고 로마군인도 아닌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관심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니까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그것입니다. '나를 도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나섰을 때, 예수님께서 바로 돌아서서 '그래, 무슨 문제냐?'하고 수월히 반응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는데, 대답이 없으십니다. 이 침묵, 인내하기 힘든 것입니다. 누가 질문을 했으면 대답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워낙 극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침묵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생각해보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네 동기를 생각하라. 네 처지를 생각하라. 네 마음의 중심을 다시 한번 진단해 보라.'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까? 응답이 없는 게 아닙니다. 내 기도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두 가닥입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요, 하나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이 긍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응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튼 주님의 그 침묵은 짧은 시간이지만 이 여인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지르는데 예수님께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무 응답의 고통을 잘 극복하고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기도합니다. 간구합니다.

이 여인으로서 극복하기 힘들었을 또 하나의 요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이 여자가 귀찮게 자꾸 따라오며 보채고 있으니 따돌리시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자로서야 배알이 빠지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성깔이 있거나 성미가 급한 여자였다면 "나는 예수님 만나러 왔는데, 당신들이 왜 나서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요?"하고 대들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만나려 할 때는 이 같은 주변 사람들이 거치적거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나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왔으면 좋겠는데, 옆 사람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이것이 시험이 됩니다. 대체로 처음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열심을 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가면 이와같은 시험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처음이지만 이렇게 믿느라고 애쓰는데, 아무개 보니까 20년 믿었다는 게 저모양이구만.' 이것이 시험이 됩니다. , 먼저 믿은 사람들이 시쳇말로 '폼을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또 속이 상합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서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교회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자부합니다마는 어떤 교회를 보면 전도해서 사람들을 오라 해놓고는 막상 교회에 나와보면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먼저 믿던 사람들은 그들끼리 어울려서 돌아가고, 새로 온 사람들은 물에 기름처럼 겉도는 것입니다. 소외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삼아 "우리가 이 교회에 나올 때에는 권사님, 장로님들끼리 서로 인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가능하면 낮선 사람과 인사하고, 앉을 때에도 낮선 사람 옆에 앉으십시오"라고 당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또 부부끼리 나란히 앉아 있을 때에 보면 자신이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쿡쿡 찌르면서 상대방에게만 '잘 들어둬!'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거 다 좋지 않은 짓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는 앉을 때에도, 오늘은 이 사람하고 나란히, 내일은 저 사람하고 나란히, 그렇게 앉아보십시오. 그런데, 서 있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하면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듭니다. 본인들은 좋겠지만 처음 믿는 사람이 와서 그런 모습을 보면 기분 좋지 않습니다.

다 시험거리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훼방놓는 결과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귀한 하나님의 딸을 가로막습니다. 낙심하게 만듭니다. '한마디해서 보내소서. 귀찮습니다'라고 투덜거립니다. 이 여인, 주님 따라오기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 앞에 인도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따라오는 사람까지 내치려고 합니다. 어쩌다 이러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어쩌다 이런 걸림돌이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극복하기 힘든 다섯 번째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이방사람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가슴아픈 말씀입니다. '너는 이방사람이므로 축복권 밖에 버려진 존재다'-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렇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이 여자로서는 십중팔구 좌절하고 말 수 있는 엄청난 시험인 것입니다. 자기 평가를 다시 한번 하라시는 뜻입니다. '네가 정말 은혜를 사모할만한 위치에 있느냐?' 참으로 괴로운 말씀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마는 다른 사람은 다 은혜 가운데 살아가지만 나는 은혜 밖으로 버려진 존재인가보다-우리는 이런 자의식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말씀입니다. 듣고 참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받아들입니다.

그실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교만에 빠져 가나안사람들을 으레 개로 취급합니다. 가나안사람들의 별명이 바로 ''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개같이 음란하며, 개같이 싸우고, 개 같이 무질서하다 해서입니다. 토했던 것을 다시 먹을 정도로 더러운 생활들을 한다고 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여인에게 그 말씀이 시험이 되는 것은 자기를 개라고 불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여느 유대인들처럼 우리를 멸시하는구나'라는 실망입니다. 예수님도 여느 유대사람과 다름없이 편벽된 선민사상에 빠져 있구나 싶으면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듯 예수님도 나를 무시하시는구나. 다른 사람이 나를 버리듯 예수님도 나를 버리시는구나.' 그러나 여인은 이것까지도 극복합니다. 어떻게 극복할까요? 보십시다. 마치 야곱이 복을 받을 수 없는 자로서 끝까지 복을 받아내는 과정과도 비슷합니다. 우선 이 여인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실망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격, 자신의 행위나 과거, 자신의 그 모든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과, 긍휼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시험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봐도 시험에 빠집니다. 제자들의 눈치를 보면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만 쳐다봅니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끝까지 말입니다. 위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 여인은 많은 시험을 줄기차게 당하면서도 원망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너는 개다"라고 멸시를 하는데도 "옳소이다"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는 개올시다." 엄청난 말입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는 이 여인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 죄인입니다" "너는 더럽다" "물론 더럽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받아야 되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은 이럴 수 있습니까?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이 위대한 믿음의 여인은 자신의 죄된 처지를 속속들이 깨닫고 엎어지는 사람의 철저한 겸손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을 수 있다면 개가 되어도 좋다고 하는 지혜까지 드러내 보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7)." 여기서 예수님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너의 믿음이 메가톤급이다 라고 칭찬하심입니다. '너는 앞으로 어떤 시험을 만나더라도 넘어지지 않겠구나. 그런 믿음이라면 절대로 굴하는 일이 없겠다'라고 판단하십니다. 그렇다면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십니다.

가끔씩 교인들을 보며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왔다가 아이가 울어서 데리고 나가라고 하면 그게 섭섭해서 그 뒤론 아예 안 나와 버리는 분이 있습니다. , 자동차 타고 오셨다가 안내하는 사람이 좀 잘못했다고 섭섭해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 일을 가지고 화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까?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동차 좀 찌그러지면 찌그러진 대로 타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또 누가 조금 섭섭하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구원 문제와 관계가 됩니까? 도대체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왔기에 그렇게 시시한 일에 넘어지느냐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는 개다'라고 했다가는 펄펄 뛸 사람들입니다. 저한테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야단치시는 분도 있어요. 얼마 전 이런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나오다가 안나오시는 분이었는데, 그분께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인즉 "소망교회 교인들이 저에게 장로 표를 안 찍어줍니다"하더니 되묻더군요.

"십 년 나가도 안되겠지요?" "당신 할 탓이지요." 자신이 없답니다. 여러분, 이 정도의 믿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은 원격 기적입니다. 이 여인의 딸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을 보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는 순간에 여인의 딸은 나았습니다. 당자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미국에 있든 독일에 있든 상관없습니다. 어머니 노릇만 똑똑히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정되는 순간에 여러분이 위하여 기도하는 그 자식이 거기서 복을 받습니다. 원격 응답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신 말씀이요. 이적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네 믿음이 크도다(마태복음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네 믿음이 크도다"-오늘 본문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신 것 같고,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도 여기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믿음이 크다.' 참 굉장한 말씀입니다. 크다는 말에도 의미가 많이 있겠습니다마는 원문대로보면 메갈레피스티스입니다. '메갈레'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메가톤'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를테면 부자도 웬만한 부자는 갑부라 하고 더 큰 부자는 거부(巨富)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이 크다는 것에도 조금 큰 것, 더 큰 것, 엄청나게 큰 것이 있겠는데, '메갈레'라고 하면 가장 큰 것, 위대하게 큰 것을 뜻한다고 할까요.

믿음에도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메갈레피스티스' '네 믿음이 위대하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믿음에 대해 칭찬하신 일이 여러 번 있는데, 이상하게도 유대사람으로서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그런 칭찬을 들었지만 그는 로마인입니다.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라는 칭찬을 받는 사람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게 천하게 취급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가장 높임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면서 소경 되었던 사람이 필경은 높은 위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이 천하디 천한 여자를 보십시오. 창녀가 아닙니까? 이런 여자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그만큼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은 시쳇말로 '별 볼일 없는' 여자입니다. 당시의 세상에서야 이런 여자 하나쯤은 죽는다 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런 여자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믿음을 칭찬 받는 그 순간, 그 여자는 인격도 높임 받게 된 것입니다. 삶의 의미도 그 후로부터는 높임 받게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크다'-그실 사람은 믿는 만큼 크다고 생각됩니다. 아무 것도 못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존재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정도 믿고 사십니까? 하나님께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서나 내 친구에 대해서 과연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사에 의심을 합니까, 아니면 온전히 믿어버리는 편입니까? 아무튼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는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큰 것입니다. 인격이 크고 사람됨이 큰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삽니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항상 의심만 풍깁니다. 남도 의심하고 나 자신도 믿지 못합니다.

보아하면 항상 의심에서 비롯된 소리만 지껄이고 사는 사람은 조그마한 사람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사람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필경은 눈에 띄지도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남들이 다 의심하는 사람을 두고도 "그사람, 그런 사람 아니야." 이렇게 감싸줍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점점 커지는 것을 우리는 우러러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위대한 믿음 위에 이적을 베푸십니다. 이적은 믿음 위에 주십니다. 믿음이 전제되어야, 믿음의 그릇이 있고야 이적을 선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또한 믿음 위에 소원성취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소원이 있다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는데, 여기에 믿음이 먼저입니다. 믿음이 전제되고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믿음만큼, 믿음의 크기만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원이 있는데 믿음이 없다면 그 소원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소원이 있다 합시다. 그렇다면 먼저 그것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믿는 만큼의 소원이 성취된다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믿음 하나만 가지고 큰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이방사람을 격을 높여 칭찬하심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유대사람이라고, 성경 지식이 많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전통적인 유대 종교의식에 익숙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문이 웅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격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오직 하나만을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 믿음 하나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의로 여기시고, 그 믿음이 근거가 되어 오늘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 다른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음 말고는 모든 조건을 다 배제한다는 신학적 의미가 오늘의 본문에 깃들여 있습니다. 그 사람의 과거도, 그 사람의 현재도, 그 사람의 처지도, 그 사람의 신분도 묻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교리가 여기에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한번 봅시다.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본래 이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경험에는 없지만 이런 사람도 고치고 저런 사람도 고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가나안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성서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여인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긴 신학적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메시야의 별명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것은 곧 '당신은 메시야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는 그리스도며 메시야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똑같은 이야깁니다.

틀림없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병 고치는 분, 혹은 마술적 능력을 행하는 분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만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도 저런 문제도 모두 해결되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자도 낫고 장님도 눈을 뜨고, 내 딸도 정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단순히 의사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의 이적을 행하는 마술사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다는 것,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이런 문제 저런 문제, 어떤 문제라도 해결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부릅니다. 메시야적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는 것, 이것이 그의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두 번째로 주의해서 살펴봐야 할 점은, 이 사람의 신앙의 동기에 상당히 원색적인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기가 모성애라는 것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고 좀더 깊이 캐어보면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가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입니다.

지금 딸은 그 자리에 와 있지도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디 가서 무슨 미치광이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25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제 딸이 불쌍합니다. 도와주소서'가 아닙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이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여겨주소서'-이런 마음입니다. 사실 귀신들린 딸이야 남보기 딱하지 본인이야 뭘 알겠습니까? 세상모르고 소리지르며 돌아다니는 것이지요. 정작 불쌍하고 고통스러운 쪽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정신병자를 가진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 이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 아픈 가슴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도 아버지가 아들로 해서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데, "내 아들이 불 속에 뛰어들어가고 물 속에도 뛰어들어갑니다. 귀신이 이 아이를 죽이려 합니다"라고 하소연합니다. 이런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제가 30년 전, 신당동 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어느 집을 심방 갔습니다. 그 집 내외분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고 가정환경도 대단히 좋아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딱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참 귀여운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소아마비였어요. 그래서 그 어머니는 그것을 치료해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여러 병원을 다니며 치료란 치료는 다 해보았답니다. 제가 심방 갔을 때도 막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왔다고 하시면서 "목사님, 저 애가 글쎄 조금 걷는답니다" 하면서 기뻐합니다. 여기까지면 좋았을 뻔했는데, 같이 갔던 집사님이 걷는 것을 한번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래 아이는 발에다 쇠로 만든 딱딱한 것을 대고 목발을 짚고는 간신히 몇 발짝 떼어놓습니다.

그러나 "이리 와라, 이리 와라"하는 소리에 몇 발짝 더 걸으려던 아이는 그만 쿵하고 쓰러져 버렸습니다. 순간, 어머니가 목을 놓아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것입니다.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워서 말입니다. , 뭐라고 할말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의 간구를 들어보십시오. '나는 정신병자 아이를 가졌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는 화평이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남편과의 사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습니다. 나는 지금 이 어린아이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어머니를,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렇게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병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간절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딸을 사랑하는 간절한 어머니의 마음이 이같이 간절하고 절실한,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서 볼 수 있습니다마는 많은 시험, 많은 굴욕을 개의치 않습니다.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저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느냐." 이것은 어머니라는 존재의 공통적인 마음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 믿음의 여인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귀신들렸나이다.' 그 말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는 꼼짝못하고 꾸뻑하는 것을 봅니다. 자식이 아프다거나 시험을 본다던가 하면 정말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내 딸이 귀신들렸습니다'하는 말에 그 아픈 가슴에 대한 간절한 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어머니의 사랑, 이것이 동기가 되면서 이 같은 위대한 믿음을 창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 사람의 신앙이 처음에 비하여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점점 강해졌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믿음이 시원치 않던 사람도 자주 시련을 겪고 어려운 일을 거듭 겪는 과정에서는 믿음이 상승작용을 해 더 굳어지는 법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처음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의 그 믿음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서 이런 시련 저런 시련을 겪고난 연후의 믿음을 비교한다면 후자의 경우에 믿음이 더 굳습니다. 거기에다 핍박을 받게 되면 더욱 더 굳어집니다. 핍박과 함께 성장하는 신앙, 환난과 함께 점점 내용이 충실해지는 신앙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도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놓아두고, 안일해지고, 만사가 다 편안해지면, 그만 노곤해져서 잠들어버리고 맙니다. 쉬고 쉬다가 끝내는 썩고 맙니다. 그래서 조금 빡빡하게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위대한 사람의 경우엔 모르겠습니다마는 보통 사람은 무사 안일하면 안됩니다. 아무래도 일거리가 있어야 됩니다. 시험거리, 핍박, 환난도 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같은 사람이라도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를 비교하면 실패할 때가 더 간절하고, 건강할 때와 병든 때를 비교하면 병든 때가 더 진실합니다. 똑같이 기도를 한다 해도 절박한 문제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다릅니다. 계속 시험을 당해야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함께 다녔던 곽씨 성을 가진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저를 동생이라고 부르던 그분은 어렸을 적부터 예수님을 믿었던 게 아니라 나이 서른이 돼 가지고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잘 믿었고 나이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신학대학까지 왔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다름 아닌 아내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남편을 믿게 했다고 합니다. 교회 집사인데, 남편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니까 슬슬 느슨해지더랍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제 아내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합디다. 당초에는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던 사람이 새벽에 안나오더니 저녁에도 안나오고 요새는 낮에 간신히 나오는데 그것도 한 달에 한 번이랍니다. 핍박이 없으니 이렇게 시들어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은 확실히 핍박을 받으면서 점점 강해지고 충실해지고 온전해지는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떤 역경을 겪으면서 성장했느냐, 곧 역경을 극복하는 모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과정을 겪으면서 자랐는지, 어떤 시험이 있었는지-먼저 인종적인 차별이 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은 전부 이스라엘사람인데 이 사람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사람들은 가나안사람들을 근본적으로, 종교적으로 무시해왔습니다. 전혀 자기들의 세계와는 관계없는 사람들로 봅니다. 인종차별입니다. 이방사람들로서는 결코 극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하나의 문제는 그가 여자라는 점입니다. 그 당시는 남녀 차별이 많은 때였습니다. 웬 여자가 와서 소리를 지른다 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율법사도 아니고 니고데모도 아니고 로마군인도 아닌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관심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니까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그것입니다. '나를 도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나섰을 때, 예수님께서 바로 돌아서서 '그래, 무슨 문제냐?'하고 수월히 반응을 보여주셨으면 좋겠는데, 대답이 없으십니다. 이 침묵, 인내하기 힘든 것입니다. 누가 질문을 했으면 대답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워낙 극복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침묵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생각해보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네 동기를 생각하라. 네 처지를 생각하라. 네 마음의 중심을 다시 한번 진단해 보라.' 이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까? 응답이 없는 게 아닙니다. 내 기도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두 가닥입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요, 하나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이 긍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응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튼 주님의 그 침묵은 짧은 시간이지만 이 여인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지르는데 예수님께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 무 응답의 고통을 잘 극복하고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기도합니다. 간구합니다.

이 여인으로서 극복하기 힘들었을 또 하나의 요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이 여자가 귀찮게 자꾸 따라오며 보채고 있으니 따돌리시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자로서야 배알이 빠지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성깔이 있거나 성미가 급한 여자였다면 "나는 예수님 만나러 왔는데, 당신들이 왜 나서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요?"하고 대들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수님 만나려 할 때는 이 같은 주변 사람들이 거치적거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나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왔으면 좋겠는데, 옆 사람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이것이 시험이 됩니다. 대체로 처음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열심을 냅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가면 이와같은 시험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처음이지만 이렇게 믿느라고 애쓰는데, 아무개 보니까 20년 믿었다는 게 저모양이구만.' 이것이 시험이 됩니다. , 먼저 믿은 사람들이 시쳇말로 '폼을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또 속이 상합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만 같아서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교회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자부합니다마는 어떤 교회를 보면 전도해서 사람들을 오라 해놓고는 막상 교회에 나와보면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먼저 믿던 사람들은 그들끼리 어울려서 돌아가고, 새로 온 사람들은 물에 기름처럼 겉도는 것입니다. 소외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삼아 "우리가 이 교회에 나올 때에는 권사님, 장로님들끼리 서로 인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가능하면 낮선 사람과 인사하고, 앉을 때에도 낮선 사람 옆에 앉으십시오"라고 당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또 부부끼리 나란히 앉아 있을 때에 보면 자신이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쿡쿡 찌르면서 상대방에게만 '잘 들어둬!'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거 다 좋지 않은 짓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는 앉을 때에도, 오늘은 이 사람하고 나란히, 내일은 저 사람하고 나란히, 그렇게 앉아보십시오. 그런데, 서 있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하면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듭니다. 본인들은 좋겠지만 처음 믿는 사람이 와서 그런 모습을 보면 기분 좋지 않습니다.

다 시험거리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훼방놓는 결과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귀한 하나님의 딸을 가로막습니다. 낙심하게 만듭니다. '한마디해서 보내소서. 귀찮습니다'라고 투덜거립니다. 이 여인, 주님 따라오기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 앞에 인도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따라오는 사람까지 내치려고 합니다. 어쩌다 이러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어쩌다 이런 걸림돌이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극복하기 힘든 다섯 번째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이방사람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가슴아픈 말씀입니다. '너는 이방사람이므로 축복권 밖에 버려진 존재다'-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렇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이 여자로서는 십중팔구 좌절하고 말 수 있는 엄청난 시험인 것입니다. 자기 평가를 다시 한번 하라시는 뜻입니다. '네가 정말 은혜를 사모할만한 위치에 있느냐?' 참으로 괴로운 말씀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마는 다른 사람은 다 은혜 가운데 살아가지만 나는 은혜 밖으로 버려진 존재인가보다-우리는 이런 자의식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참으로 청천벽력 같은 말씀입니다. 듣고 참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받아들입니다.

그실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교만에 빠져 가나안사람들을 으레 개로 취급합니다. 가나안사람들의 별명이 바로 ''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개같이 음란하며, 개같이 싸우고, 개 같이 무질서하다 해서입니다. 토했던 것을 다시 먹을 정도로 더러운 생활들을 한다고 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 여인에게 그 말씀이 시험이 되는 것은 자기를 개라고 불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여느 유대인들처럼 우리를 멸시하는구나'라는 실망입니다. 예수님도 여느 유대사람과 다름없이 편벽된 선민사상에 빠져 있구나 싶으면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듯 예수님도 나를 무시하시는구나. 다른 사람이 나를 버리듯 예수님도 나를 버리시는구나.' 그러나 여인은 이것까지도 극복합니다. 어떻게 극복할까요? 보십시다. 마치 야곱이 복을 받을 수 없는 자로서 끝까지 복을 받아내는 과정과도 비슷합니다. 우선 이 여인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실망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격, 자신의 행위나 과거, 자신의 그 모든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과, 긍휼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면 영락없이 시험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봐도 시험에 빠집니다. 제자들의 눈치를 보면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만 쳐다봅니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끝까지 말입니다. 위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이 여인은 많은 시험을 줄기차게 당하면서도 원망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너는 개다"라고 멸시를 하는데도 "옳소이다"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는 개올시다." 엄청난 말입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는 이 여인처럼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 죄인입니다" "너는 더럽다" "물론 더럽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받아야 되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은 이럴 수 있습니까? 마땅히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이 위대한 믿음의 여인은 자신의 죄된 처지를 속속들이 깨닫고 엎어지는 사람의 철저한 겸손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을 수 있다면 개가 되어도 좋다고 하는 지혜까지 드러내 보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7)." 여기서 예수님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너의 믿음이 메가톤급이다 라고 칭찬하심입니다. '너는 앞으로 어떤 시험을 만나더라도 넘어지지 않겠구나. 그런 믿음이라면 절대로 굴하는 일이 없겠다'라고 판단하십니다. 그렇다면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십니다.

가끔씩 교인들을 보며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왔다가 아이가 울어서 데리고 나가라고 하면 그게 섭섭해서 그 뒤론 아예 안 나와 버리는 분이 있습니다. , 자동차 타고 오셨다가 안내하는 사람이 좀 잘못했다고 섭섭해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런 일을 가지고 화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무슨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까?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동차 좀 찌그러지면 찌그러진 대로 타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또 누가 조금 섭섭하게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구원 문제와 관계가 됩니까? 도대체 어떤 문제를 가지고 나왔기에 그렇게 시시한 일에 넘어지느냐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너는 개다'라고 했다가는 펄펄 뛸 사람들입니다. 저한테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야단치시는 분도 있어요. 얼마 전 이런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나오다가 안나오시는 분이었는데, 그분께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인즉 "소망교회 교인들이 저에게 장로 표를 안 찍어줍니다"하더니 되묻더군요.

"십 년 나가도 안되겠지요?" "당신 할 탓이지요." 자신이 없답니다. 여러분, 이 정도의 믿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은 원격 기적입니다. 이 여인의 딸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믿음을 보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는 순간에 여인의 딸은 나았습니다. 당자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미국에 있든 독일에 있든 상관없습니다. 어머니 노릇만 똑똑히 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정되는 순간에 여러분이 위하여 기도하는 그 자식이 거기서 복을 받습니다. 원격 응답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신 말씀이요. 이적입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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