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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1~9)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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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5:19)

 

마태마가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7가지 이적만 선별해서 기록했습니다. 선택의 기준은 상징적 의미가 많은 사건만을 골라서 기록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한 사람의 병을 고치셨으면, 병고친 것만을 목적으로 하여 "굉장한 능력이다"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뚜렷한 표적적인 의미가 있다는 데 역점을 두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자가 병이 나아서 이제 건강을 되찾았다는 사실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려는 귀중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에서는 사건 하나 하나를 선별해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나, 5천 명을 먹인 이야기등 7가지 이적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위의 본문으로,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는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5:1).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년에 중요한 세 절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로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절기 때마다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절기를 지켰다고 합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에 모이는 숫자는 거의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하니 대단한 행사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 당시는 빈부의 차가 지금보다 심해서, 시골은 원시 생활 그대로였고 도시는 크게 발전을 해서 (옛날 고대 문명들을 보면)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건물들을 지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상하건대, 예루살렘도 굉장히 번성한 도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기 때마다 시골 사람들이 모여들어 들뜬 기분으로 여기저기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잔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 나와 가장 외롭고 불쌍한 한 환자를 만나십니다. 물론 제자들도 동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겠지만 본문에 나타난 환자는 가장 외로운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을 주님은 조용히 찾으셨고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도 크리스마스나 또는 명절에 장식을 하고 잔치에 치중하기보다는 내가 일년 동안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생각하여 찾아간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가령 회갑 잔치를 떠들썩하게 해서, 먹는 데 돈을 다 허비하는 것보다는 불상한 사람을 돕는 일을 위해서 그 비용을 사용한다면 뜻 있는 회갑 잔치가 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건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떠들썩한 유월절 잔치 분위기에서 벗어나 홀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찾으신 멋있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연못의 이름은 히브리어로서 베스는 집(house)이며 에스더는 자비라는 뜻으로서 합치면 자비의 집(house of mercy), "불쌍한 사람을 돕는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못입니다.

그런데, 이 연못은 특별한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5:3 하반절에서 4)고 이 부분만 괄호를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괄호한 것은 이 성경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 옛날 사본에서부터 추가하여 삽입한 것으로 이것은 본래의 성경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괄호 안에 있는 말을 추가하지 않으면 본문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아 옛날 교부 때부터 삽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이 동함을 기다리는데 천사가 내려와서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전해 오는 이야기 중에서도 천사가 내려와 목욕하는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재입니다. 물이 동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과거에 이 연못에서 온천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뜨거운 기온이 올라오면서 물이 울컥하고 올라오면 물은 빙빙 돌면서 소리를 내고 천사가(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려와 목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뛰어드는 환자는 어떤 병이든 나을 수 있다는 전설입니다. 아마도 신경통 같은 병은 나을 수 있었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낫는 사람이 더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동하는 순간 먼저 뛰어드는 한 사람에게만 병이 낫는다는 인색한 조건이 있는 것을 보면 병이 잘 낫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런 전설을 가진 연못이기에 수많은 환자들이 연못가에 천막이나 집을 지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에는 하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찾으신 환자는 38년 동안이나 앓아 누워있는 장기 환자입니다(5:5). 이 사람은 가족까지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사람으로 연못의 물이 동할 때마다 그저 마음 뿐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막연하게 누구인가 도와 줄 것을 기다리며 별로 희망 없이 누워있는 형편입니다. 오랜 병에는 효자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 불쌍히 보일 수는 있으나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체적으로, 어려운 병이라도 처음에는 소망을 가지고 아픈 것도 참고 지내지만 오래 계속되면 어린아이같이 되어 짜증을 내고 마지막에는 정신까지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 육체적으로 장기 환자가 되면 자연히 정신적으로도 환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환자는 38년 동안 앓아 누웠다고 하니 그 상태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먼저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5:6). 어떻게 보면 이 질문은 이상한 물음입니다. 환자가 병이 낫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어이없게도 낫고자 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환자의 대답도 동문서답입니다. 낫고자 하느냐의 질문에는 ", 낫고 싶습니다"라든지 아니면 "한 번만 걸어 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정상일텐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자는 대답하기를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내려가나이다"(5:7)라고 넣어줄 사람이 없음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내가 넣어주겠다"는 말씀 대신에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5:8) 38년 동안이나 누워있는 환자에게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말은, 잘못 이해하면 조롱하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납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5:9) 정말 놀라운 믿음입니다. 38년 동안 앓았다면 아마 평생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나라" 할 때 과연 믿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까? 그저 간단히 지나칠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물음은 대단히 의미 깊은 물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동화성이라는 병입니다. , 닮는다는 것입니다. 별로 좋은 예는 아닙니다만 우리 나라 재래식 화장실에 처음 들어가면 냄새가 고약하고 눈이 따갑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런 대로 참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지 않은 냄새라도 계속 맡으면 견디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도 마찬가지로 한 번 짓기가 어려운 것이지 두세 번 거듭되면 동화성이 있어서 나중에는 죄책감도 없이 쉽게 죄를 짓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자꾸 면역이 되고 불감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배고픈 자가 코가 예민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 말 속에는 대단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가난한 자는 정의감이 살아있어 세상의 부조리에 예민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며 정의를 말하지만 부자가 되면 둔하여져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얼버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불감증이 되면, 역사적으로 죄없는 시절이 있었더냐고 나의 죄를 일반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 나타난 환자도 계속 누워 있었으므로, 누워있는 것이 습관화되고 체질화되었다면 일어나야 하겠다는 생각마저도 희미해지거나 아예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앓았다 할지라도 낫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토록 이루지 못했다 해도 소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38년된 환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물음은 진정 그를 다시 일깨우는 귀한 물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에게 한번 물었으면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다음, 예수님의 이 귀한 질문에 환자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영어로 그대로 직역하면 "나는 한 사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I have not a man)." 즉 나를 도와줄 한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개 고독한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로써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라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나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끝을 의미합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이 없어서 오늘 이 환자는 절망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서 내가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가 좋은 친구를 기다리면 친구가 없지만, 내가 좋은 친구가 되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친구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구하기에 없는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다라는 말은 미신적인 신앙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환자에게 직선적으로 "오해 누워 있더니 정신까지 돌았구나.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쓸데없는 신앙은 이제 버려라"고 그의 잘못된 응답에 책망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잘못된 소원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병들어 있는 그를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겉으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이 없다고 표현했지만 그 언어의 깊숙한 곳에는 낫고자 하는 소원이 숨어 있었음을 주님은 아셨기에 더이상 꼬집지 않으신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굳이 꼬집어서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소 표현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 말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이해했다면 더 이상 시비를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환자의 깊은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말씀은 믿음 없이 듣는다면 모욕적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누워서 지낸 기간이 38년이나 되는 환자는 일어나라는 말씀을 듣고 일어납니다. 여기서 그의 위대한 믿음을 찬양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예수님의 말씀에 불만을 가지고 "나를 불쌍히 여기시거든 다른 소리하지 말고 물이 동하거든 소원대로 물 속에나 넣어주시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응답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기도하며 소원한 대로 이루어진 것만 응답이며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응답이 아닙니까? 나는 가지고 싶은데 오히려 주라고 하시며, 나는 가고 싶은데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해도 그 말씀을 응답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응답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위대한 신앙입니다. 나는 평생 예수를 믿었지만 한 번도 기도의 응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했던 방법이 아니라고 해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연못에 들어가서 병이 나았든지, 일어나서 나았든지 나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낫기를 원하면서도 내가 원했던 방법이 아니라고, 일어나라 하실 때 일어나지 못한다면 영영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갖기를 원했습니다. 25년 동안이나 긴 세월을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께서 "내년에 네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하고 웃었습니다. 아들을 낳고 싶은 소원은 있었지만 그 소원이 현실화되자 의심하는 답답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환자는 일어나라는 말씀에 의심 없이 자리를 들고 일어서는 위대한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석가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38년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 40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애굽을 떠나는 해와 가나안에 도착한 해를 제외하면 광야 생활은 38년이라는 계산이 됩니다.

이렇게 38년 동안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헤매며 지치고 때로는 포기하면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정말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베데스다 연못가의 환자를 생각하며 그와 같은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외로운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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