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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눈을 빼라(마 5:27~32)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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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빼라(5:2732)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지금까지 율법과 예수님의 교훈과의 관계를 공부하는 중에, 앞장에서는 살인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뿐입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미워하고 노하고 저주하는 것까지도 살인과 같다고 보다 근원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겉으로 나타난 행동, 즉 외형적인 것만으로 살인이라 하지 않고 정신적인 차원, 동기적인 차원에서 교훈 하셨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간음 문제입니다. 이것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마태복음 19 : 3-10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모든 율법은 세 가지 원칙에 준합니다. 첫째는 율법 그대로가 하나의 법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율법에 대한 해석입니다.

실제로 율법을 생활로 옮길 때 그 계명들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율법에 대해 해석(interpretation)이 필요한 것입니다. 셋째는 해석에 대해 합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입니다. 분명히 죄는 죄입니다만 정상이 참고되어 봐주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에 의해 안식일에는 교회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한 형편이면 교회에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정상참작(justify)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 중에서 안식일에 대해 정상을 참작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 안식일에 키우던 당나귀가 함정에 빠졌을 때, 안식일이라고 그대로 죽도록 버려두겠는가 라고 물으셨습니다. 비록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죽어 가는 나귀를 살려내는 것이 도리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도주의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합리주의에 의해서 정당화되어 비록 죄일찌라도 죄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인 문제를 놓고, 여기에서는 어떤 해석이 필요한가를 한번 생각하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말 번역이고 원문에서는 그저 "죽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도 역시 "Thou shall not kill"로써 사람만을 죽이는 살인이 아니라 넓은 범위에서 죽이지 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도 영웅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다름 아닌 정상화(justify)에 속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옛날에는 제사 때마다 동물들을 죽여서 바쳤고, 사람들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살생을 해서 먹이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해석이 있어야 하고 정당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통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법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간음에 대한 유대사람들의 해석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먼저 구약에 의해서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4이나, 신명기 5:18에서도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당시 법적으로 간음이라고 규정 짓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남자가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육체적 관계가 있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어떤 해석에서는 "함께 침상에 눕는 것이 간음이다"라고 규정짓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육체적인 관계만을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아내 외에는 다른 여자와는 절대로 관계하지 않았으니 자기들은 성결하다고 교만하기까지 했습니다. 둘째는 이상하게도 간음은 남편 있는 아내에게만 적용시켰습니다.

그들의 전승에 의하면, 그 당시는 일부다처주의이므로 한 남자에게 아내가 있어도 처녀나 과부와 관계를 맺는 것은 간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 있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남자가 독신일지라도 여자에게는 간음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형적이고도 육체적인 측면에서만 간음을 규정지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읽은 마태복음 19장에서는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도 이혼증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당시 유대사람들은 이혼할 때에 간단하게 남자가 이혼증서를 여자에게 주어서 이혼하는 것이 그들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악하므로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이지 그것이 결코 원칙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혼증서는 간단한 이혼증명서입니다. 요즘처럼 서로 합의하여 도장찍는 증명서가 아니라 남자 일방주의의 이혼 통고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오"하고 남자가 싸인만 하면 그것으로 이혼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혼증서를 써 주었느냐 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필자가 유학 시절에 유대사람들의 이혼풍속에 대해 조사할 일이 있어 여러 책들을 읽다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혼의 사유 중에 여자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음식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도 이혼증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을 만드는 뒷모습이 보기 싫다고 해서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한 실례가 있었으니 정말 그 당시 여자들의 위치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혼을 쉽게 했고, 오늘날도 비교적 이혼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한 연고 없이는 이혼할 수 없음을 마태복음 19장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은 생각이 꼬여서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편하겠다고 못된 생각들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당시 완악한 사람들에게 같이 사는 것이 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므로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하도록 편법을 준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해석하고 계십니다. 육체적인 관계만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와 같다고 정신 위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하였느니라"(5:28) 물론 여기에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를 정신적으로 일생동안 사랑했는데, 이것이 간음과 같다고 한다면 육체적으로 정절을 지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완전 간음이 아니라 "마음에 간음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죄와 중죄로 나누자면 경죄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간음과 육체의 간음을 똑같이 보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정신적인 살인과 실제적인 살인을 똑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단지 마음의 간음을 육체의 간음 못지 않게 생각하자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의 간음이 더 무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사무엘상 16 : 7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결코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외모에 치우쳐서 죄에 빠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잠언 4:23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가는 대로 행동이 따라 갑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내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다가 문득 그대로 되어짐을 보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무서운 경험입니다. 마음을 지키라는 것은 마음에 파수꾼을 두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지면 말이 비뚤어지고 말이 비뚤어지면 습관이 비뚤어지고 습관은 마침내 그의 운명을 비뚤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어디로 기울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지 않은 것은 가능한 한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필자가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 하면, 가끔 벽에 지나친 그림과 사진들이 걸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필자의 미적인 안목이 둔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눈에 거슬리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저는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마디 던집니다. 물론 그런 그림들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자극적인 그림은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곧바로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혹자는 보는 것은 보는 것으로 끝나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변명하겠지만 성경은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파수꾼을 두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5 : 29), 즉 죄가 눈으로 들어감을 말씀하십니다. 눈을 조심하면 마음도 조심하게 됩니다. 보는 것은 아무 것이나 다 보면서 마음만 지키겠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야 마음이 아름다워 집니다. 더러운 것을 보는 동안은 마음도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9:7에서 요셉이 당한 시험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사기 16 : 1이하에 보면, 삼손이 데릴라의 외모에 현혹되어 그 요염한 미에 빠지지 않습니까? 보는 것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눈을 뽑는 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끌렸던 그 눈을 빼앗겨 장님이 되었으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네 눈을 빼어 버리라"고 하셨는데 삼손 스스로가 빼지 않으니 하나님이 직접 빼신 것입니다. 눈 때문에 죄를 지었으니 그 눈이 무사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필자가 일본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부흥회 기간 중에 어느 신도가 심방을 원해서 담임 목사님과 함께 방문을 했습니다. 집주인은 큰 공장을 경영하는 분인데, 지금 당뇨가 심하여 거의 실명 직전에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를 위해 기도를 하자, 그 분은 자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원래 부잣집 아들로서 젊은 시절에 향락가에서 사치와 방탕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는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고 깊이 뉘우치며 그 때문에 지금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삼손도 데릴라에게 빠질 때에 그녀의 아름다움, 즉 보이는 것을 즐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남의 유부녀가 목욕하는 것을 본 순간부터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외모에 치우치거나 화려한 것에 대해서 시선을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고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눈이 나를 계속해서 범죄케 하면 나 스스로가 빼라는 것입니다. 무서운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죄를 짓게 하는 요인이 눈과 같이 귀한 것일지라도 없애라는 것입니다. 또한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고 죄를 불러들이는 부분에 대해 애착을 가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손이 있어야 일할 수 있지 않느냐고 머뭇거릴 수도 있습니다만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까지도 계산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백체 중에 하나가 병신이 되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온 몸이 성해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분명한 계산입니다. 비단 손과 눈만이 아니라 몸의 지체 중 어느 부분이라도 그것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면 가차없이 없애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건강이 말썽일 수도 있습니다. 병들어 누워 있을 때는 그렇게도 착한 사람이, 건강을 되찾으면 힘이 넘쳐서 못된 짓을 골라가며 한다면 건강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작정 건강하기만을 기도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가난해야 좋을 사람이 있고, 정말 부자 되어서 좋을 사람이 있습니다. 조지 락스는 "마귀도 병들면 천사가 된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마귀 같은 사람도 병이 들어, 눕게 되면 제법 착해지는 법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비록 가난해서라도 천당가는 것이 부해서 지옥 가는 것보다 낫고, 출세해서 여러 사람 죽이는 것보다는 비실비실 해도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입니다. 건강한 몸으로 죄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병들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이롭다는 종말론적인 내용입니다. 세상에서 오래 살면 어떠하고 잘 살면 어떠합니까? 마지막 결론이 중요하다는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네 눈이 범죄케 하느냐. 빼어 버려라. 네 손이 범죄케 하느냐 찍어 버려라" 이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게는 과연 무엇이 잘못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실수하고 무엇 때문에 실수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지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비록 눈과 손과 같이 귀한 지체일지라도 그것 때문에 범죄케 되거든 사정없이 제거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스스로 버릴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버리도록 인도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이 버리도록 강요하십니다. 그 때에는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에서 이혼과 간음 문제가 나옵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저도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5 : 31-32) 흔히 사람들은 간음한 결과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사실은 간음하도록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편을 간음하게 하는 아내도 간음이요, 아내를 간음하게 하는 남편도 간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간음한 자만이 죄있다 하고 간음하게 한 자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하게 한 자도 간음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기도할 틈을 가지기 위한 것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유학시절에 아내를 두고 혼자 공부하러 갔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분방하지 말라고 했는데 몇 년씩 괜찮겠느냐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결혼한 이상에는 서로가 한 눈을 팔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필자가 방학 동안에 취직을 했는데 퇴근 시간에 보니, 넓은 공장 마당에 아내들이 몰고온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남편들을 기다리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회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들은 꼼짝없이 그 차를 타고 돌아가니 다른 곳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방을 가야 사람을 만나고 술집에 가야 틈이 생기지 않습니까? 미국 아내들은 극성스러울 정도로 남편에게 틈을 주지 않습니다.

간혹 남자들끼리 낚시를 간다든지 어디를 가려면 모여서 공동으로 아내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저와 친분이 있던 한 미국인은 모처럼의 여행을 위해 아내로부터 이틀을 허락 받았다고 좋아서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내의 허락 없이는 회사 출장도 갈 수 없는 형편으로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얽어매어 할 수 없이 몸만 자기 자리를 지킨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번은 어느 부인이 하소연하기를 부부 싸움 후에 남편이 집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 못 가서 남편이 돌아올 터인데, 들어오는 남편을 어떻게 맞이했으면 좋겠는가를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하기를 당신 남편이 얼마나 잘못했는가는 모르지만, 남편이 잘못되기까지는 당신의 잘못도 있으니 진심으로 사과하면 돌 같은 남편일지라도 자기 잘못을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말해 주었습니다.

서로 공동책임을 지되, 내가 먼저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어렵던 문제도 보다 쉽게 풀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대체적으로 우리는 상대방만 심판대에 올려놓고 손가락질합니다. 또한 근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잘못을 고질화시키는 버릇까지 있습니다. 그와 나를 이처럼 분리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연으로 맺어졌던 간에, 부부는 한 몸이요 한 생명으로 같은 운명체입니다. 그러므로, 한 쪽이 간음하면, 간음하게 한 이 쪽도 또한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공동책임을 지는 입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보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법과 그들의 의식구조는 남자 주도적이기에 간음죄도 여자에게만 적용했습니다. 성경에서도 간음한 여자만이 붙들려 와서 심판을 받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간음한 여자와 같이 있었던 남자는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보시고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이다"라고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해석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순결의 뜻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순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그리고 눈입니다. 눈으로부터 순결이 깨어지기 쉬우므로 보는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불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또한 간음하는 행동만이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간음하게 하는 것도 무서운 죄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로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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