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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마태복음 21장 18~22절)

by 【고동엽】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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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마태복음 211822)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중에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이적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신 무서운 저주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이적은 예수님의 많은 이적 가운데 가장 난해한 사건입니다. 해석하기 어렵고, 쉽게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학자들도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나무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다면 과원지기를 책망해야지 나무를 향해 저주하고 책망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시는가가 바로 이 사건의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배가 고파서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습니다. 멀리서 보니까 무화과나무는 아주 크고 나뭇잎이 많습니다.

저만하면 충분히 열매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가가셨는데 나무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시장하던 터라 좀 섭섭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섭섭하다고 해서 나무를 저주하실 분입니까? 예수님께서 드실 열매가 없다고 해서 그렇게 가혹한 심판을 하신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라버린 나무도 소생케 하시는 그분이 멀쩡한 나무를 보고 영원히 열매가 없으리라고 저주하실 수 있습니까?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사건은 많은 의문과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할 때,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헤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과 경건함으로 말씀을 대하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깊은 뜻은 옅은 마음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적인 계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인도적이냐 비인도적이냐 물을 것이 아닙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계시적인 사건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제하고 경건과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 같은 신비롭고 엄청난 진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가복음 511절 이하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을 꾸짖고 돼지 떼에게 들여보냅니다. 이로써 귀신들렸던 사람은 깨끗해졌지만, 귀신에 붙들린 돼지들은 물에 빠져 몰살당합니다.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왜 남의 돼지 떼에 귀신을 들여보내셨을까요? 이 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마가복음 72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지나친 말씀이어서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959절 이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그가 말하기를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지낸 뒤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아직 죽지도 않은 부모를 죽을 때까지 모시고 장례까지 치르면 주님 일은 언제 하겠느냐 하는 박절한 말씀이십니다. 심지어는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는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그대로 보자면 집에 돌아가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깊은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좁은 소견으로 보면 너무 지나치고 비인도적이고 비인간적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에는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속에도 다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사건은 첫째, 유일하게 파괴적인 기적이라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껏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버리게 하셨습니다. 파괴적인 이적입니다. 여러분, 살리는 이적만이 이적이 아닙니다. 심판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이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살고죽는 것보다 영생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죽는 것이 사랑이요, 순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서 베푸신 유일한 기적이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지막 일주일 동안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 생전에 베푸신 마지막 이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에 또 하나의 이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켰을 때 그 귀를 도로 붙여주신 이적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늘의 이 사건이 공적으로 행하신 마지막 이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적은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12절로 14절의 두 곳에 나타납니다.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대체로 일치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하신 다음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쉬십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새벽에 성전을 향해 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나무는 당장 말라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하신 그날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나무가 말라버린 사실도 그 다음날에야 보고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 기록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신 행사와 이 사건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할 때에도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과 무화과나무를 비교하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워진 성전을 보셨습니다. 장사꾼들이 우글거리고, 돈을 바꾸고, 갖은 음모와 권모술수, 죄악이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진노하셔서 모두 둘러엎고, 어찌하여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드느냐고 꾸짖으시면서 장사꾼들을 모두 내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청소하신 뒤 베다니에서 쉬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십니다. 지금 주님의 마음속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잔뜩 기대를 걸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드는 것이 보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유일한 소망이 있을 줄 알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을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지금 예수님 마음은 실망하고 돌아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key word)입니다. 이것은 그 속에 깊은 의미가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요.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136절에도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포도원에 3년이 되어도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과원지기에게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으니 이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이 사건도 이와 같이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셋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전이고. 바리새인이고, 제사장들입니다. 잎이 무성한 것과 같이 큰 성전도 있고, 제사 드리는 의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에 알맹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마지막 소원과 기대를 성전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교회에 대해 비난을 많이 합니다. 비난받을만한 이유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반증입니다. 자기들은 못된 짓을 많이 해도 교회만은 깨끗해주기를 바랍니다. 자기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는 사람만은 진실해주기를 바라는 절대적인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를 저버릴 때에 실망하고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어떠했겠습니까? 한꺼번에 기대가 무너지고 깊은 실망에 빠집니다. 성전은 물질주의에 젖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경건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제물을 검사하는 특권을 이용해서 치부를 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크기에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양이든 소든 비둘기이든 자기 형편대로 가져오되 흠 없고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다리를 전다든가, 점이 있다든지, 흠집이 있으면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깨끗하고 온전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제물은 제사장이 검사했는데, 합격되면 제사를 드리지만 불합격되면 시장에 가서 팔아야 합니다. 팔아서 다른 것을 사와야 합니다. 또 불합격되면 다시 사와야 합니다. 제물을 판돈이 사려는 제물 값보다 적으면 소를 팔아서 양을 사게 되고, 양을 팔아서 비둘기를 사게 됩니다. 소 한 마리가 순식간에 비둘기 한 마리로 돼버립니다. 이런 번거로움을 피한다는 구실 하에 제사장들은 편리한 방법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성전 한구석에 양의 우리를 만들어 미리 합격품인 양을 갖다놓았습니다. 그 양을 사오면 모두 합격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교인이 가지고 온 것은 깨끗해도 불합격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우리에서 양을 사오면 절름발이요 형편없이 더러워도 합격입니다. 이렇게 갖가지 못된 방법을 다 동원해서 제사장들은 돈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목자인 사람이 자기 양 중에서 제일 깨끗한 새끼 양을 골라 먼길을 왔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려고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왔는데 불합격이라고 하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더구나 합격품을 사와 보니 절름발이 양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예배는 드려야 하니 울며 겨자먹기로 그 양을 사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성전에 올 때의 마음과 갈 때의 마음이 같을 수 없지요. 얼마나 비참하고 실망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무화과나무는 9월에 열매가 열리기 전에는 작년에 열린 묵은 무화과가 그대로 달려 있습니다. 이 이적이 일어난 때는 4, 5월이었으니 달려 있는 무화과는 해묵은 것이고 시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라도 먹고 시장기를 채우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으니 배는 더 고프고 실망도 더 컸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갔던 사람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하신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적이고, 예표적인 말씀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로부터 40년 후에 망해버려 아직까지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그 뒤 2,000년 동안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을 심판하시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의 위치를 빼앗아버리는 종말론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심판에는 종말론적 심판과 현재적 심판이 있습니다. 전자는 심판을 받자마자 그대로 죽든지, 벼락을 맞든지,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후자는 심판은 지금 이루어지지만, 심판 받은 사람은 남은 유예 기간을 비참하게 살다가 기한이 되면 형이 집행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이것은 현재적 심판입니다. 심판의 집행은 40년 후에 이루어지지만, 집행의 선언은 현재에 이루어집니다. 집행은 단지 연기되고 유예될 뿐입니다.

현재적 심판을 받으면 화인(火印) 맞은 양심이 되어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완전히 악마에게 내던져진 것입니다. 회개도 없이 멍청하게 정신병자처럼 살다가 죽어갑니다. 형은 벌써 받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에 의하여 그 집행이 늦어질 뿐입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도 심판하셨습니다. '아나데마 에스토'. 이 말은 그대로 저주를 받으라 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을 받은 뒤로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완악해져서 바락바락 악을 쓰며 삽니다. 겸손할 수도 없고,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게 헝클어진 채 비틀거리며 죽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성전과 제사장들을 향하여 내리신 심판은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있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느 날엔가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마십니다. 심판 받은 뒤에는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못하고, 모든 생각과 판단이 비뚤어지기만 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심령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심판 받는다고 하면 오늘 당장 새까맣게 타 죽는 것으로 압니다. 갑자기 차 사고라도 나서 죽어야 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적으로,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그 집행만이 유예되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성전과 제사장을 향하여 저주하지 않으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겠습니까?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표적이고 대표적이며 대신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죽어야 할 죄인은 사람인데 양이 대신 죽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을 때에 양이 제물로 대신 죽습니다. 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사건으로 말씀을 상징하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다른 사람이 다른 사건으로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말씀하시지만 실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악한 사람들은 제사장들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신앙이나 그 행위가 제사장보다는 나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신앙도 나쁘고, 정치와 야합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도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였지만, 그분을 잡아서 온갖 거짓 증언과 중상 모략을 한 사람은 가야바와 안나스였습니다.

이렇게 제사장들이 바리새인보다 훨씬 악한데도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하나님 이름과 상관없이 저희들끼리 만든 단체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들입니다. 왕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요, 선지자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아무리 악하고. 그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에 나아가도 그들을 한번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 받으시는 순간까지도 말 한마디 실수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전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비록 헤롯왕이 지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입니다. 비록 그 속에 그렇게 죄가 많고 서 있을 가치가 없는 성전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성전이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성전과 제사장 대신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신 이 사건은 그래서 예표적이고 대신적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김익두 목사님이 성경을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성경 속의 진리를 쉽게 풀어 말씀해주시곤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김익두 목사님께서는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마을에 가서 전도를 하게 되었답니다. 마침 6월이어서 모내기가 한창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한쪽에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다가가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셨습니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나오더니 "목사님, 이 마을에서는 전도하지 마세요. 며칠 전에 벼락이 쳐서 논바닥과 바위, 성황당나무가 깨지고 타버렸어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바위와 나무, 논바닥을 못쓰게 만들어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든지, 계셔도 장님일 거예요. 그러니 이 마을에서는 전도해도 안 될 거요" 하더랍니다. 이런 비난을 듣고 김목사님은 잠깐 돌아서서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셨답니다. 그리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그 젊은이에게 국민학교를 다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교에 가니 선생님 손에 무엇이 있더냐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막대기가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막대기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졸면 머리도 한번 때리고, 흑판도 딱딱 두드린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김목사님은 "이 사람아, 흑판이 무슨 죄가 있나. 아이들에게 졸지 말라고 흑판을 두들기는 거 아닌가. 그래도 졸면 그때 머리를 때리는 거 아니겠나? 그와 같은 걸세. 먼저는 하나님께서 바위와 나무를 치셨지만 다음에는 자네 머리에 벼락이 떨어질 거야."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그러면 안 된다고 싹싹 빌며 예수를 믿겠노라고 하였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하나 없던 그 마을에 당장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죄는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다음에 성전을, 다음에 제사장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유대나라를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당장 우리를 심판하면 그 자리에서 끝나고 맙니다. 다시 회개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을 먼저 치십니다.

나 대신 자녀가 맞기도 하고, 부모가 맞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멀리서부터 가까이 들어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부득불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신 이 사건은 종말론적 계시이면서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살리는 것만이 이적이 아니고 심판하는 것도 이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은 곧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으로, 불신앙과 교만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 "너는 영원히 열매맺지 못하리라" 하시는 말씀대로 말라버리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믿음의 눈으로 보고 듣고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마태복음 211822)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중에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이적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신 무서운 저주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이적은 예수님의 많은 이적 가운데 가장 난해한 사건입니다. 해석하기 어렵고, 쉽게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고, 학자들도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나무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다면 과원지기를 책망해야지 나무를 향해 저주하고 책망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시는가가 바로 이 사건의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배가 고파서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습니다. 멀리서 보니까 무화과나무는 아주 크고 나뭇잎이 많습니다.

저만하면 충분히 열매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가가셨는데 나무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시장하던 터라 좀 섭섭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섭섭하다고 해서 나무를 저주하실 분입니까? 예수님께서 드실 열매가 없다고 해서 그렇게 가혹한 심판을 하신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말라버린 나무도 소생케 하시는 그분이 멀쩡한 나무를 보고 영원히 열매가 없으리라고 저주하실 수 있습니까?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사건은 많은 의문과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할 때,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헤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과 경건함으로 말씀을 대하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깊은 뜻은 옅은 마음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말씀적인 계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합리적이냐 불합리적이냐, 인도적이냐 비인도적이냐 물을 것이 아닙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계시적인 사건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전제하고 경건과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 같은 신비롭고 엄청난 진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가복음 511절 이하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을 꾸짖고 돼지 떼에게 들여보냅니다. 이로써 귀신들렸던 사람은 깨끗해졌지만, 귀신에 붙들린 돼지들은 물에 빠져 몰살당합니다.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왜 남의 돼지 떼에 귀신을 들여보내셨을까요? 이 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마가복음 72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지나친 말씀이어서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959절 이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그가 말하기를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지낸 뒤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아직 죽지도 않은 부모를 죽을 때까지 모시고 장례까지 치르면 주님 일은 언제 하겠느냐 하는 박절한 말씀이십니다. 심지어는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는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 그대로 보자면 집에 돌아가 인사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모두 깊은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좁은 소견으로 보면 너무 지나치고 비인도적이고 비인간적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세계에는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속에도 다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사건은 첫째, 유일하게 파괴적인 기적이라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껏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멀쩡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버리게 하셨습니다. 파괴적인 이적입니다. 여러분, 살리는 이적만이 이적이 아닙니다. 심판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이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살고죽는 것보다 영생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때로는 죽는 것이 사랑이요, 순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서 베푸신 유일한 기적이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지막 일주일 동안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 생전에 베푸신 마지막 이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에 또 하나의 이적이 있기는 했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내리켰을 때 그 귀를 도로 붙여주신 이적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늘의 이 사건이 공적으로 행하신 마지막 이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적은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12절로 14절의 두 곳에 나타납니다.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대체로 일치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하신 다음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쉬십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새벽에 성전을 향해 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나무는 당장 말라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하신 그날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나무가 말라버린 사실도 그 다음날에야 보고 알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두 기록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신 행사와 이 사건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할 때에도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과 무화과나무를 비교하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워진 성전을 보셨습니다. 장사꾼들이 우글거리고, 돈을 바꾸고, 갖은 음모와 권모술수, 죄악이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진노하셔서 모두 둘러엎고, 어찌하여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드느냐고 꾸짖으시면서 장사꾼들을 모두 내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청소하신 뒤 베다니에서 쉬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가십니다. 지금 주님의 마음속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잔뜩 기대를 걸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드는 것이 보입니다. 거기에 구원이 있고, 유일한 소망이 있을 줄 알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을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지금 예수님 마음은 실망하고 돌아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key word)입니다. 이것은 그 속에 깊은 의미가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요.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136절에도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포도원에 3년이 되어도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과원지기에게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없으니 이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이 사건도 이와 같이 비유적인 사건입니다.

셋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전이고. 바리새인이고, 제사장들입니다. 잎이 무성한 것과 같이 큰 성전도 있고, 제사 드리는 의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에 알맹이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마지막 소원과 기대를 성전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사회에서 교회에 대해 비난을 많이 합니다. 비난받을만한 이유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반증입니다. 자기들은 못된 짓을 많이 해도 교회만은 깨끗해주기를 바랍니다. 자기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는 사람만은 진실해주기를 바라는 절대적인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를 저버릴 때에 실망하고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어떠했겠습니까? 한꺼번에 기대가 무너지고 깊은 실망에 빠집니다. 성전은 물질주의에 젖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경건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제물을 검사하는 특권을 이용해서 치부를 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크기에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양이든 소든 비둘기이든 자기 형편대로 가져오되 흠 없고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다리를 전다든가, 점이 있다든지, 흠집이 있으면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깨끗하고 온전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제물은 제사장이 검사했는데, 합격되면 제사를 드리지만 불합격되면 시장에 가서 팔아야 합니다. 팔아서 다른 것을 사와야 합니다. 또 불합격되면 다시 사와야 합니다. 제물을 판돈이 사려는 제물 값보다 적으면 소를 팔아서 양을 사게 되고, 양을 팔아서 비둘기를 사게 됩니다. 소 한 마리가 순식간에 비둘기 한 마리로 돼버립니다. 이런 번거로움을 피한다는 구실 하에 제사장들은 편리한 방법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성전 한구석에 양의 우리를 만들어 미리 합격품인 양을 갖다놓았습니다. 그 양을 사오면 모두 합격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교인이 가지고 온 것은 깨끗해도 불합격입니다. 성전 안에 있는 우리에서 양을 사오면 절름발이요 형편없이 더러워도 합격입니다. 이렇게 갖가지 못된 방법을 다 동원해서 제사장들은 돈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목자인 사람이 자기 양 중에서 제일 깨끗한 새끼 양을 골라 먼길을 왔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려고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왔는데 불합격이라고 하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더구나 합격품을 사와 보니 절름발이 양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예배는 드려야 하니 울며 겨자먹기로 그 양을 사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성전에 올 때의 마음과 갈 때의 마음이 같을 수 없지요. 얼마나 비참하고 실망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무화과나무는 9월에 열매가 열리기 전에는 작년에 열린 묵은 무화과가 그대로 달려 있습니다. 이 이적이 일어난 때는 4, 5월이었으니 달려 있는 무화과는 해묵은 것이고 시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라도 먹고 시장기를 채우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으니 배는 더 고프고 실망도 더 컸을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갔던 사람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하신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적이고, 예표적인 말씀입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로부터 40년 후에 망해버려 아직까지 복구되지 못했습니다. 그 뒤 2,000년 동안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을 심판하시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의 위치를 빼앗아버리는 종말론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심판에는 종말론적 심판과 현재적 심판이 있습니다. 전자는 심판을 받자마자 그대로 죽든지, 벼락을 맞든지,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후자는 심판은 지금 이루어지지만, 심판 받은 사람은 남은 유예 기간을 비참하게 살다가 기한이 되면 형이 집행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이것은 현재적 심판입니다. 심판의 집행은 40년 후에 이루어지지만, 집행의 선언은 현재에 이루어집니다. 집행은 단지 연기되고 유예될 뿐입니다.

현재적 심판을 받으면 화인(火印) 맞은 양심이 되어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부터 완전히 악마에게 내던져진 것입니다. 회개도 없이 멍청하게 정신병자처럼 살다가 죽어갑니다. 형은 벌써 받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에 의하여 그 집행이 늦어질 뿐입니다. "화 있을진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도 심판하셨습니다. '아나데마 에스토'. 이 말은 그대로 저주를 받으라 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을 받은 뒤로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완악해져서 바락바락 악을 쓰며 삽니다. 겸손할 수도 없고,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게 헝클어진 채 비틀거리며 죽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성전과 제사장들을 향하여 내리신 심판은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있는데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어느 날엔가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마십니다. 심판 받은 뒤에는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못하고, 모든 생각과 판단이 비뚤어지기만 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심령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심판 받는다고 하면 오늘 당장 새까맣게 타 죽는 것으로 압니다. 갑자기 차 사고라도 나서 죽어야 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적으로,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졌고 그 집행만이 유예되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성전과 제사장을 향하여 저주하지 않으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겠습니까?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표적이고 대표적이며 대신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죽어야 할 죄인은 사람인데 양이 대신 죽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을 때에 양이 제물로 대신 죽습니다. 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사건으로 말씀을 상징하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다른 사람이 다른 사건으로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말씀하시지만 실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악한 사람들은 제사장들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신앙이나 그 행위가 제사장보다는 나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신앙도 나쁘고, 정치와 야합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도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였지만, 그분을 잡아서 온갖 거짓 증언과 중상 모략을 한 사람은 가야바와 안나스였습니다.

이렇게 제사장들이 바리새인보다 훨씬 악한데도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제사장들이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하나님 이름과 상관없이 저희들끼리 만든 단체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들입니다. 왕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이요, 선지자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아무리 악하고. 그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리에 나아가도 그들을 한번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판 받으시는 순간까지도 말 한마디 실수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전도 하나님의 집입니다. 비록 헤롯왕이 지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입니다. 비록 그 속에 그렇게 죄가 많고 서 있을 가치가 없는 성전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성전이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성전과 제사장 대신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신 이 사건은 그래서 예표적이고 대신적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전에 김익두 목사님이 성경을 가르치실 때의 일입니다. 목사님은 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성경 속의 진리를 쉽게 풀어 말씀해주시곤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김익두 목사님께서는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마을에 가서 전도를 하게 되었답니다. 마침 6월이어서 모내기가 한창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한쪽에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다가가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셨습니다. 그러자 한 젊은이가 나오더니 "목사님, 이 마을에서는 전도하지 마세요. 며칠 전에 벼락이 쳐서 논바닥과 바위, 성황당나무가 깨지고 타버렸어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바위와 나무, 논바닥을 못쓰게 만들어놓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든지, 계셔도 장님일 거예요. 그러니 이 마을에서는 전도해도 안 될 거요" 하더랍니다. 이런 비난을 듣고 김목사님은 잠깐 돌아서서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셨답니다. 그리고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그 젊은이에게 국민학교를 다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교에 가니 선생님 손에 무엇이 있더냐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막대기가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막대기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졸면 머리도 한번 때리고, 흑판도 딱딱 두드린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김목사님은 "이 사람아, 흑판이 무슨 죄가 있나. 아이들에게 졸지 말라고 흑판을 두들기는 거 아닌가. 그래도 졸면 그때 머리를 때리는 거 아니겠나? 그와 같은 걸세. 먼저는 하나님께서 바위와 나무를 치셨지만 다음에는 자네 머리에 벼락이 떨어질 거야."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그러면 안 된다고 싹싹 빌며 예수를 믿겠노라고 하였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하나 없던 그 마을에 당장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죄는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다음에 성전을, 다음에 제사장을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유대나라를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당장 우리를 심판하면 그 자리에서 끝나고 맙니다. 다시 회개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을 먼저 치십니다.

나 대신 자녀가 맞기도 하고, 부모가 맞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멀리서부터 가까이 들어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부득불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신 이 사건은 종말론적 계시이면서 깊은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살리는 것만이 이적이 아니고 심판하는 것도 이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은 곧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으로, 불신앙과 교만한 자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 "너는 영원히 열매맺지 못하리라" 하시는 말씀대로 말라버리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믿음의 눈으로 보고 듣고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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