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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믿음대로 되라(마태복음 9장 27~31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 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두 소경이 예수님께 나아와 눈을 뜨게 되었다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소경은 장애자이지 환자가 아닙니다. 지금 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닌 것입니다. 눈멀어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몸이 이미 병들었고 병에서 멈췄습니다. 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가고 있는 것도 아니요 몸이 쑤시고 아픈 것도 아닙니다.
다만 소경이라는 상태에 정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경이라는 것으로 운명지어졌다는 이야기올시다. 병자라면, 지금 눈을 앓고 있는 상태라면 고치기를 바랍니다. 고쳐지리라는 기대도 해볼 수 있습니다. 병원도 찾아가 보고 약도 써보고 백방으로 노력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소경으로 굳어진 다음에는 포기를 합니다. 체념하게 되지요.
눈을 뜨리라고는 이제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요새는 안구 이식이다 뭐다 하는 특별한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마는 그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한번 소경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굳어지고 끝난 것입니다. 눈을 어떻게 해본다는 것은 숫제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경이라고 하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체념, 정착한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전혀 어떤 소망이나 기대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애자는 놀랍게도 예수님께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점입니다. 통속적 상식으로야 그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온 천하 어느 누구에게도 내 눈을 뜨게 해주리라고 하는 기대를 갖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 장님 그대로 살다가 장님 그대로 죽을 팔자라는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예수님께만은 기대를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소리 지릅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굉장한 일-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사람의 되어진 일을 결코 평범하게 알고 넘어 갈 일이 아닙니다. 성경 가운데에 많은 이적이 있으니까 이 소경의 경우 같은 것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가기 쉽습니다마는, 일단 주목을 하여 그 소경의 입장으로 돌아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엄청난 사건입니까? 위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실감할 것입니다. '사주팔자'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아예 운명지어진 사람입니다. 나에게 무슨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난 이대로 살다 이대로 끝나는 거지 뭐.'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리,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자 마음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저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번 점검해봅시다. 기대를 가지고 살았는데 여느 결에 포기하고 만 것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틀렸다' '끝났다' '지난 이야기다'-스스로 판단하여 이런 식으로 포기, 체념하고 말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지금 진행 중에 있는 몇 가지 사건만 놓고 '하나님, 여기다 복을 주세요' 합니다. '요것만은 하나님이 어떻게 좀 봐주세요.' 이렇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식이나 통념으로 기적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전혀 차원이 다른 입장에서 예수님께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예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이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여느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고, 그리고 나아오게 되었다는 것-이것이 본문의 핵심이 되는 요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소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이것 때문에 여느 사람들에 비하면 얻는 정보가 부분적입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부분적일 뿐입니다. 남들처럼 알기는 다 압니다. 여기에 걸상이 있는 것도 알고, 여기에 사람이 있는 것도 알고, 여기에 꽃이 있는 것도 알고, 남들처럼 소풍을 갈 줄도 압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린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소경도 소풍간다 하기에 우스갯소리 하는구나 했더니 정말 간다고 해요.
산 위에 올라서서 "야, 경치 좋다!" 한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와 꽃내음, 구수한 흙냄새-다 감지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렇더라도 눈뜬 사람이 보는 것과 같이 이를테면 들판을 훤히 내다보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정보는 부분적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부분에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정보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두말 할 것없이 본다고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천 원짜리라면 눈은 칠백 원짜리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눈을 뜨고 있음으로써 70퍼센트의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눈을 감으면 불과 30%밖에 안되는 정보와 지식밖에 얻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정보를 얻지 못하면 그만큼 무식해지는 것이요, 그만큼 답답해지는 것이지요. 그런 답답한 세계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보지를 못하면 색깔이나 크기나 넓이나 높이나 밝음이나 어두움이나-이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이 바로 장님의 결정적인 약점이자 어려움입니다. 촉감으로 감촉 되는 부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부분 안에서 알고, 냄새로 알고, 육감으로 알고, 예감으로 느끼고, 소리로 압니다.
그러나 보아서 알게 되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그 차원에서는 전혀 암담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험이 따릅니다. 정보가 적으면 적은 만큼 위험이 따릅니다. 코앞에 어려움이 있어도 알 수가 없어요. 함정이 있어도 모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좀 미안한 이야깁니다 마는 옛날에는 장님들, 시각장애자들이 길거리에 잘 나다녔어요. 지팡이 하나 짚고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그때처럼 잘 다니지 못합니다. 우선 길이 매일 바뀌니까요. 예전에는 길이라는 것이 몇십 년을 가도 그 길이 그 길이니까 비교적 마음놓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몇 걸음 가면 뭐가 있고, 또 몇 걸음 더 가면 뭐가 있고----이렇게 익숙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로공사다 뭐다 해서 길을 자꾸 바꿔놓기 때문에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릅니다.
위험을 모르는 채로 살아야 한다는 것, 앞에 놓인 큰 위험을 예감하거나 예지할 수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소경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히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눈뜨게 한 사건을 중심으로 말씀하실 때에 바리새인들을 보고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육체적인 시각은 있는데 영적인 시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마치 장님처럼 정보가 부분적이요, 넓게 깊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알고 있는게 아니라 조금 알고 아집 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교만스럽게 고집을 부린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율법, 저들 나름의 율법 해석, 저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전승적 지식이라는 것이 편협된 것이거든요. 그런 편견을 마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문에 안타까워하십니다. '이런 답답한 사람들 봤나. 이 소경 같은 사람들아, 차라리 눈이 어두웠더라면 겸손하기라도 했을 것을. 차라리 소경이었더라면 좋을 뻔했다. 너희들은 육체적으로는 멀쩡하게 눈뜨고 사는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완전히 캄캄한 소경이다.' 그러한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앞에 놓인 멸망의 구덩이로 천방지축 빠져들고 있다, 무서운 함정으로 빠지고 있다, 사망의 구덩이로 빠지고 있다-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소경에 대해서 공부합니다마는, 우리는 이 소경이야기를 상고하면서 '나는 소경이 아닌데'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영적으로 '오히려 이사람보다 더 불쌍한 소경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나에게 영적인 시각이 있는지, 영적인 통찰력이 있는지, 내가 신령한 지식을, 정보를, 넓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 두 소경의 경우를 봅시다. 우선 '두 소경'이라는 것이 생각을 깊이 하게 만듭니다. 당시에 소경은 소외된 사람입니다.「탈무드」에서도 시각이 없는 자는 죽은 자와 같다고 취급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사람들의 별난 세계관은 이같은 장애자나 병자를 볼 때,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도덕적 차원에서 이해를 하고, 무슨 죄가 많으면 저렇게 천벌을 받았을까 하는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문둥병자나 장님, 더구나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절름발이,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저주받은 사람쯤으로 치부하여 불결하게 여겼습니다. 집안의 한 식구가 그런 장애자이면 온 집안이 사람들로부터 멸시 당했습니다. '저 집안은 그렇고 그런 집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으려고 아예 집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집안 식구로부터도 끊어진 그는 정처 없이 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런 것이 당시의 풍속이었습니다. 장애자는 그렇게나 비참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두고 뉘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느냐고 묻는 대목이 있지 않습니까? 온 집안 식구가 건강하고 화평할 때는 그 집을 가리켜 복 받은 집이라 하고, 이를테면 이런 소경이라도 하나 있으면 그 집은 천벌을 받은 집이라고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죄를 지었나 할머니가 죄를 지었나, 무슨 숨겨진 큰 죄가 있는가 보지?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뒷날 혼사할 때라든가 교제할 일이 있을 때에는 막대한 지장을 받게 마련이었습니다. 한 식구인데도 내쫓아버리는 걸 보면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쫓겨난 장애자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떼를 지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끼리 상부상조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본문의 두 사람도 그래서 '두 사람'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희 교회에서는 지금 성남에 '소망의 집'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장님 가정 스물두 가구가 있습니다. 내외간이 다 장님들입니다.
그런 부부들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기서 생활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생활비를 대주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해 동안 그렇게 도와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분들이 왜 장님끼리 살고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눈뜬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닙니다. 서로가 다 장님이라야 진정으로 서로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님이 눈뜬 사람하고 산다면 오히려 엄청나게 어려움이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두 소경이 함께 다녔다고 합니다. 불쌍한 사람들끼리, 소외당한 사람들끼리, 한마디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끼리 어울린 것입니다. 서로서로 도우며 손목을 잡고 얻어먹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생계 방도가 따로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데에도 상부상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라도 "아유, 그만둡시다" 하지 않고 "우리 가봅시다, 소문을 듣자니 이러이러한 분이데요?" 이렇게 마음이 맞아 서로 도왔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 참 중요한 것입니다. 혼자서는 이런 용기를 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서로 격려하면서 "우리, 예수님께 가봅시다" 하고 손을 맞잡고 서로 위로하면서, 격려하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때 보면 거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주여, 그러하오이다"-주께서는 소경들의 이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 믿음이 절대조건이 되어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고침 받을 수 있는 그릇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 것입니까? 눈으로는 못 보지만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부족한대로 그 듣는 정보기관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뵈온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소문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은 감았어도 귀는 열려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청각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바를 극대화한 것이요, 새로운 은사를 찾으려 한 게 아니라 이미 가진 은사를 있는 한껏 활용한 것입니다. '귀가 보배다'-이런 경우에 실감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명실공히 귀가 보배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도 그렇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자꾸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한껏 살려서 극대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있는 것 가지고 주님 앞에 나서고, 있는 것 가지고 봉사할 것입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 보면 못 배운 것 지금 배우겠다고 들 하는데, 그럴 것 없습니다. 배운 것 가지고 잘 하면 됩니다. 나이 사십 넘어 가지고 영어 배우겠다며 학원을 다닌다 어쩐다 하는데, 그도 그럴 것 없이 한글책이나 열심히 보십시오. 우리말로 된 책도 제대로 안 보면서 영어책 보겠다고 할 것이 뭡니까? 새삼스럽게 그런다고 콘사이스 찾고 해봐야 뜻이 통하나요 어디? 공연히 그렇게 시건방떨 것 없습니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읽을 수 있는 것 가지고 열심히 읽을 것입니다. 어학이란 일찍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늦게 시작한다고 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되어 있는 것만도 지천인데 그런 것은 제쳐놓고 뜻도 안 통하는 원서를 뒤적거려봐야 천금같은 시간의 낭비일 뿐입니다.
귀가 열려 있으면 눈이 멀었더라도 그 열린 귀를 효용 하는 것입니다.
없는 눈을 탓함이 없이 내가 가진, 들을 수 있는 귀를 넓게 열고 열심히 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소문을 열심히 들었던 것입니다. 들을 수 있는 데까지 다 들어서, 그들이 수집할 수 있는 한의 정보를 열심히 수집한 나머지 '이분은 메시야다'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메시야이므로 병자든 주검이든 그가 불쌍히 여기기만 한다면 다 고치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의 눈도 뜨게 해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여기까지 도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중한 일입니까? 여러분, 아무쪼록 없는 것 자꾸 달라고 구하지 마십시오. 있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합니다. 내게 있는 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능력을 극대화하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소리지를 수 있는 것도 내가 가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벙어리였다면 이렇게 못할 뻔했습니다. 귀가 열려 있고 입이 열려 있다, 그래서 소리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의 입이 또한 보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없는 것은 보배가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이 다 보배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끝까지 따라오며 소리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싯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다가오실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다가오시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유명한 설교가 스퍼젼이 말한 바 있습니다. "작은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하늘로 이끌어가지만, 큰 믿음은 하늘을 우리에게로 끌어내린다"-틀림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게 귀기울이도록 만드는 것은 위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오시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두 소경은 방향감각이 제대로가 아닙니다. 청각만을 이용해서, 저쪽으로 가신다 생각하고 그쪽으로 달려가기는 합니다만 모르긴 해도 정확하게 달려갔을 리가 없습니다. 십중팔구 빗나갔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허우적허우적 달려가면서 목청껏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요. 장님의 발걸음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정면으로 다가갔을 리가 없습니다. 그쪽이다 싶은 방향을 향해 달려갈 뿐, 예수님의 옷자락도 만질 수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그들이 어떻게 해야 만납니까? 예수님께서 그들 쪽으로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사람들을 보아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짐작되는 방향으로 열심히 달리고, 그러면서 소리를 질러서 예수님께서 자기네를 보시도록, 오시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길이 정확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모름지기 예수님 쪽으로 목표를 분명히 하십시다. 그쪽으로 열심히 나아가면서 그쪽을 향해서 부르짖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가 내게로 와서 나를 만나주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분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그가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두 소경은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부르짖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훌륭한 외침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흔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덜미를 잡히는 소리입니다. 왕이라는 말이요, 왕의 후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함은 "메시야가 오셨다" "왕이 오셨다"라고 외치는 전도(傳道) 행위가 됩니다. 이 소리, 로마 정부가 가만있겠습니까? 헤롯에게 알려져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겁 없이 그렇게 외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메시야 대망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스라엘사람들의 그 대망 신앙을 고스란히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전형적인, 확실한, 위대한 한 유대사람의 신앙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해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베드로가 이해한 것도 이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이 한마디는 그들의 완전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을 고백한 것이요, 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고백이 됩니다. 그들이 그런 고백을 하면서 주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어느 의사가 있어, 어느 선지자가 있어, 어느 위대한 사람이 있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한단 말입니까? 어느 누구에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수 있겠습니까? 메시야가 아니고는 안될 일이었습니다. 메시야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꼭 메시야이기 때문에 메시야라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저들은 그 엄청난 소원을 그에게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험을 극복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나 자신이 시험이 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욕망이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으로 시험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시험은 시간적 문제, 시차적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요, 우리는 시간적이어서 조급합니다. 하나님은 길게 멀리 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 볼 때에는 못마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예수님께서는 들으셨는지 못 들으셨는지, 들은 척도 하시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시고 맙니다. 여기에는 과정이 좀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는, 우리는 이 대목을 한번 추리해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소리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들은 척하고 저 사람들 왜 떠드냐 하는 태도로 집안으로 들어가셨단 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럴 때에 소경들은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발달된 육감으로 짚어보더라도 예수님이 충분히 들으실 만큼 목청껏 소리질렀는데 반응이 없으시다니! 적어도 메시야 예수님이므로 비록 멀리 백 리 밖에서 지르는 소리라도 들으시고 가까이 와주실 것인데, 이 어찌된 일인지요? 왜 응답이 없으실까, 귀찮아서 나 몰라라 하실 분도 아니거늘-두 소경은 마음이 조급해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들으셨다고 볼 때, 소경들로서는 또 하나의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소경을 무시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무시하시는 것인가? 훌륭한 사람들과 만나시느라고 우리 같은 건 아예 사람 취급도 하시지 않는구나, 역시 메시야도 다를 게 없는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의가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소경들의 입장에서 보면 열등의식이 발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경이고 형편없는 인생이니까, 옷도 남루하고 냄새도 나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멸시하는구나, 좋다! 까짓 거 장님으로 죽으면 죽었지 더는 소리지르지 않겠다.' 이런 원망과 반발심도 생길 수 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까짓, 때리 치아뿌리라!"할 수도 있습니다. 제 주변에도 보면 그런 일이 많습니다. 잠깐을 참지 못해서 토라지는 경우가 참 많아요. 어떤 분들을 보면 제게 전화를 해서 통화하시다가 도중에 손님을 맞이하느라고 "죄송합니다, 잠깐만" 하고 손님을 맞이한 다음에 다시 통화를 계속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을 못 참아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무시하느니 어쩌느니 하고 말입니다. 하긴 그쪽에서야 이쪽의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오해하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퍽 힘이 듭니다. 이런 경우에는 예수님도 힘드셨겠어요.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소경들의 부르짖음도 아랑곳없이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경 말씀에는 언급이 없지마는 아마도 저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저들의 간구함을 더 간절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의 시련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잠깐 지체하는 사이, 즉각적으로 응답해주시지 않고 몇 분인지 혹은 한 시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그렇게 뜸을 들이는 그 시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흔히 우리는 즉각적으로 해결되어야 응답 받는 것으로 압니다. 조금 기다리라고 하면 그만 쓰러지고 말아요. 여러분, 지연된다고 해서 응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당장에 달라고 졸라대는데도 현명한 어머니는 "알았다" 해놓고 며칠 후에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몇 년 후에 주십니다. 이것이 응답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차를 극복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십 년 이십 년, 아니, 남북분단 같은 것을 보면 사십 년 넘어 아직도 더 기다려야 됩니다. 응답을 하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미 응답하셨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단계를 극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안으로 들어가시자, 어떻게 했건 간에 이 소경들이 따라 들어섰습니다. 사실은 이 행위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지꼴의 소경들이 손님을 초대한 이 집에 들어설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문맥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마도 문간에서 싸움 깨나 했을 것 같습니다. 못 들어오게 막았을 것이고, 들어가려고 사생결단으로 덤볐을 것입니다. 호통도 듣고 떠밀리기도 하고, 자빠지기도 하고-갖은 장애가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경들은 담대하게 극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극복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때때로 제 까다로운 방식 때문에, 하긴 제가 까다로운 것은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습니다마는, 그 때문에 욕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어린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나온 사람 보면 데리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항의하는 편지가 날아옵니다. '목사님은 어린애 안 키워봤습니까?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사랑하셨는데 목사님은 왜 그래요?' 하고 욕을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안나오겠다 어쩌겠다 하고 협박(?)까지 합니다. 그런 일 당했다고 교회 나오는 것부터를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 교회 나올 자격 없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나약해 가지고 무슨 예수를 믿겠다는 것입니까? 누가 뭐라든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무릅쓰고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 면박을 당한다 해도 나는 교회에 들어가야 된다,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된다-이러해야 됩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때에 보면 우리 교인 가운데도 참 극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요. 남보다 늦게 와 가지고도 거침없이 달려나와서는 남을 밀치면서까지 기어이 이 앞자리에 앉는 분이 있어요.
내 가만히 보고 속으로 빙그레 웃습니다. '저분은 좌우간 위대한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장애 되는 것, 다 극복할 수 있어야 됩니다. 두 소경은 그래서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 하는 것입니다.
말은 쉬워도 이게 보통 어려운 발걸음이 아닙니다. 집안에 들어섰습니다. 예수님은 내심 그들이 담대하게 집안에까지 들어오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들어올 줄 아시고 '들어오나 보자' 하신 것입니다. 두 소경, 정말로 들어섰습니다. 비로소, 마침내 예수님께서 맞아주십니다. 모든 장애를 무릅쓰고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왔을 때에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러자 소경들은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그러하오이다-아멘입니다.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따라 들어왔지요 뭐-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왜 그렇게 물으셨겠습니까? 구체적인 신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신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믿느냐,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예, 믿습니다." 이 대답을 요구하심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말씀의 행간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 소경이 가진 정보에 예수님께서 문둥병환자를 고치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열병환자를 고치시고 중풍병환자도 고치시고-이런 것들은 있지만 아직까지 장님을 눈뜨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로서는 그들의 문제가 그때까지는 특수 케이스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이 특별한 문제도 해결이 될까? 이런 회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슴없이 믿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한 단 넘어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들 자신을 돌이켜봅시다.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잘 믿습니다. 누구는 어떻게 은혜 받고 누구는 어떻게 은혜 받았다더라-그런 소문은 믿으면서 내 문제에 이르면 그만 스페셜 케이스(special case)가 됩니다. My case is out of case. 특별한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은혜 밖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가 나았으면 소경도 눈을 뜰 것이다,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내 눈도 뜨게 될 것이다-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외를 만들지 마십시오. 두 소경, 그 점에서 탁월합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눈도 뜨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입니다. 마침내 주님, 쾌히 응답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저는 이 장면에서 때로 짓궂은 상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만일에 그 중의 한 사람이 "글쎄요" 했더라면 그 사람은 잘돼야 한 눈밖에 못 떴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믿음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안 믿었으면 못 나았을 게 아닙니까? 참으로 정신차려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그릇대로, 모름지기 믿음의 분량대로, 믿는 내용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죽 상고해보았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믿음의 분량, 믿음의 내용, 다시 한번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이 소경들이 가졌던 믿음과 같이 훌륭한 믿음을 가졌던가? 그 소경들의 믿음, 평범한 것 같지만 위대한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님께서는 오늘도 똑같은 물음을 던지고 계십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믿음대로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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