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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날 수를 계산하십시오 시90:1~12

by 【고동엽】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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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Lcf3Zs2TAg0

        

 

◈당신의 날 수를 계산하십시오          시90:1~12         출처보기

 

◑1. 인생의 짧음을 표현하는 3가지 비유

 

시편 90장은 한편의 비극적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생애를 비극적인 용어를 빌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대양의 파도의 거품(밀려와 부셔지는 파도)과 같습니다.

    ·인생은 넓은 바다에 넘실대다 해변에 부딪치면 깨어지는 파도와 같습니다.

    ·인생은 거품과 같습니다.

    ·인생은 철썩거리는 파도와 같습니다.

    ·인생은 출렁거리는 파도 소리와 같습니다.

 

인생은 순식간입니다.

   ·밀려들어오는 듯하다 깨어지는 순식간입니다.

   ·출생과 죽음사이의 시간처럼 짧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 전에 우리는 죽습니다.

   ·"철(節)이 들자 망령(妄靈)난다"는 속담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비극적 진리를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시키기 위해서,

시인은 몇 가지 표상(表象, images)들을 플래시(flash)를 터뜨리듯이 우리 마음 화면에 투사합니다.

 

▶1. 첫 번째 표상으로, 시인은 말하기를,

   ·우리네 인생은 밤중의 한 경점(更點, 순간)과도 같다고 합니다. 주1)

   ·우리네 인생은 히브리인들이 한밤을 세 단위로 나눈 시간대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경점'이란 단어가, 밤을 구분하는 단위입니다. 처음 밤, 중간 밤, 새벽 밤으로 구분했습니다. 

   ·우리는 한 밤중의 3분의 1 정도만 살아있을 뿐입니다. 밤을 12시간으로 보면, 4시간 가량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우리의 자리들을 차지하기 위해

곧 무대에 등장할 것입니다. 그리면 우리는 잠자리로 돌아갑니다.

 

▶2. 시인이 플래시 터뜨리듯이 우리 마음의 화면에 떠올리는 두 번째 표상은,

5절에서 그가 말하듯이 ― '잠'이라 불리는 표상입니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5

 

우리는 잠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녁에 눈을 붙이고, 아침에 눈을 뜨는 사이.. 그것이 얼마나 길게 느껴집니까?

정말 잠깐입니다. 8시간, 10시간, 아니 수술 후에 20시간을 자더라도,

깨고 나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잠깐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처럼 짧다는 것입니다.

 

▶3. 시인은 세 번째 표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5절에서 말하기를,

우리네 인생은 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이슬을 머금고 파릇하게 돋아나는 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침에는 새롭게 돋아나다가도 저녁이 되면 말라 시들어 버리는 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태어납니다. ·학교에 들어갑니다.

     ·직장을 얻습니다. ·결혼합니다.

     ·가족을 갖습니다. ·자녀를 키웁니다.

     ·은퇴합니다. ·점점 시들어 갑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시편 90장의 시인은 매우 심각한 염세적(厭世的) 언어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언어는 마치 욥의 언어를 상기시켜줍니다.

 

욥은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무는 찍혀 넘어졌다가도 희망이 있는 이유는 다시 싹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은 죽어 누우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욥14:7-10).

 

참으로 서글프고 암울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일 뿐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동시에 매우 성경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에 관해 성경은 너무도 자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시인은 <인생의 짧음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실상 나도 그렇거니와 여러분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죽음에 대해, 짧은 인생에 대해, 인생의 허망함에 대해,

유수(流水)와 같은 시간의 흐름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엄연한 현실을 일부러 외면하거나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하는가요?

 

     ·사람들은 삶의 단명성(短命性),

        피치 못할 죽음의 현실성에 대해 정서적으로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한 밤중의 경점(更點)과 같고, 꿈과 같고,

        풀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비극적 의미에 대해서는 그만 말하고,

      좀 더 편안하고 즐거운 주제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90장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날들의 길이는 70년이요, 혹시 우리에게 약간의 근력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80년입니다.

그러나 수고와 고통, 슬픔과 한으로 가득 차 있는 세월들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우리가 날아갑니다.

 

시편 90장은 인생에 대한 표면적 관찰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자, 90장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인생의 짧음에 대해 신음하는 소리로 시작하지 아니하고,

모든 세대를 거쳐 우리의 거처(居處)가 되어 오신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들을 바라보기 전에,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짧음에 대해 슬퍼하며 탄식하기 전에,

     시인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찬양의 노래를 발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1~2절.

    

    ·먼지와 티끌로 만들어진 우리가 결국 다시 티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전,

     시인은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 소스라쳐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시인은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영원하심 앞에

     소름끼치는 경외감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시인의 말에 심오한 깊이를 더해주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네 인생의 비극적인 간결성(짤막함)이 더욱 절실해지는 보이는 이유는

그 짧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비하여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중후한 작품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라도 현대의 많은 문학 작품들이

그 깊이와 심오함에 있어서 얄팍하고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시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현대 문학들은 시편 90장이 보여주고 있는 심오함을 결핍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출발부터 잘못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그것들은,

    ·인간 정신과 영혼의 깊이로부터 시작합니다.

    ·엉클어지고 뒤틀어진 인간관계로부터 시작합니다.

    ·깨어진 결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부서진 가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파산된 직장 생활로부터 시작합니다.

 

현대 작자들은 아마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 비극의 깊이를

저울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즉 파산된 인간 실존을 먼저 하나님께 들어 보이지 않고도

그것에 관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가요? 여러분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렇다는 것입니까?

    ·인생은 짧다는 이 비극적 사실을 하나님의 영원성에 저울질하기 전까지는, 그럴 것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들에 대비시켜 보기 전까지는 그럴 것입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해 오고 있는 산들이라 할지라도,

태어난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잴 수 있는 가장 큰 지상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산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교해보면 그것들은 겨우 30센티미터 자에 불과합니다. 

 

◑3. 인생은.. 닥칠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본 후에, 시인은 그 다음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을 바라보며 말을 합니다:

        "너희 죽을 인생들아, 흙으로 돌아가거라,

          너희 죽을 인생들아, 죽어라!" 3절,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까? 왜 우리는 죽어야 합니까?

    ·우리는 먼지요 흙이요 티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꽃들처럼, 동물들처럼, 별들처럼 피었다가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과 동물들의 운명과 다른 점이 있는가? 전도서는 질문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동일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물이 죽듯이, 사람도 죽습니다. 모두 흙으로부터 왔으며 또한 모두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죽음은 마치 낙엽과도 같습니다.

푸르던 나무 잎새도 때가 되면 시들어 떨어지듯이, 우리네 인생도 그렇습니다.

태양도 그 뜨거운 열을 발산하고는 서산에 지듯이,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우리도 서산에 지는 태양을, 떨어지는 잎새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우울하고 서글픈 현실입니다. 옛 시인이 노래하듯,

석양에 홀로 서서 갈곳 몰라 하노라 하는 심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그러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항합니다.

    ·우리는 죽음과 사투를 벌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저항합니다.

    ·우리는 사체 앞에서 분노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의 죽음에 대해,

        소년과 소녀의 죽음에 대해,

        젊은이들의 죽음에 대해,

        남자와 여자들의 죽음에 대해 온 몸으로 저항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저항하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잎새처럼 죽음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죽음에 대해 그렇게 저항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죽음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죽음은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닙니다! 죽음은 원수입니다.

         아닙니다! 죽음은 물리쳐야할 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죽음에 대해 저항합니다. 왜냐고요?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분노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처럼 말합니다:

            "주님의 노여움이 우리를 불태우시니 우리가 소멸되었고,

            주께서 분노하시므로 우리가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7~8절.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분노가 일구어낸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뿌리가 되는 비극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 수명의 짧음만을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다른 곳으로 잘못 빠질 수 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울한 심정을 감상적으로 즐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인생의 비극성을 절실하게 갈망하는 일종의 감상주의로 빠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편 90장에는 이러한 종류의 감상주의는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영감 받은 우리의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비극은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는 것,

    ·진정한 비극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압도되고 있다는 것,

    ·진정한 비극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런히 내어놓으시고 있다는 것,

    ·진정한 비극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밀스런 죄들은

     그분의 환한 얼굴 빛 아래 드러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인생은.. 자기 삶을 계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재(測定)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비하여 재(測定)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의 분노에 대비하여 우리의 인생을 재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시인과 함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의 분노가 발산하는 능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의 진노가 가져 올 두려움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11-12절)

 

우리는 우리의 날들을 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인생의 날 수를 세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셀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영원히 살 것인 양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분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우리에게 진지하고 심각하게 요구합니다.

우리의 날들을 카운트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날들을 어떻게 세는지, 세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일정한 날들을 분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할당(割當)된 날들이 우리 각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날들을 카운트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카운트하는 것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얼마간의 날들이 몫(quota)으로 할당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마음이란 이렇게 할당된 몫을 '겸허함'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혹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일이 있습니까?

고대 그리스 신화 이야기인데, 우리의 날들을 세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의 이름입니다. 그는 무정하고 잔인한 떼거리,

다른 그리스 신들과는 달리 인간에 대해 애정이 많았습니다.

그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짧음에 대해 망각하도록 하였습니다.

어떻게 한 줄 아십니까?

    ·인간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의식을 떼어감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한계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실현될 수 없는 희망들을 사람들 마음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 마음속에 인간 이상이 되라는 내적 욕구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의욕과 야망을 가지라는 충동 욕구를 인간 마음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별들의 세계까지 닿을 수 있다는 강한 욕망을 사람 마음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더했습니다. 무엇인줄 아십니까?

    ·신들만 갖고 있는 '불'(火)을 훔쳐서 인간에게 준 것입니다.

 

자, 이러한 선물과 함께 인류에게는 과학기술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불은, 곧 과학기술 세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요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고, 무기를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그 이후의 모든 인류가 걸어가게 될

한 '길' 위에, 한 '과정' 위에, 한 '트랙' 위에 놓은 것입니다.

인류는 피치 못하게 이 트랙 위에서 달리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이 길과 이 과정과 이 트랙은 어떤 곳입니까?

 

    ·사람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던져 버리게 되는 곳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서로 간에 경쟁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트랙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이룩하려는 치열한 성취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곳은 인류의 삶을 마치 찍찍거리는 마우스들의 경주장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을 갖게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을 갖게 되자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 입니까?,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마침내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 자신들이 신(神)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은 인생의 한계성,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신들로부터 약간의 '불'(火)을 더 갖는다면,

        이 세상을 잘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야!"

    이것은 그들의 확신에 찬 선언이며 긍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프로메테우스적(的)입니다.

그러나 시편 90장은 반(反) 프로메테우스적입니다.

 

    ·시편 90장은 우리에게 '인간'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시편 90장은 우리에게 우리는 '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시편 90장은 우리에게 인간의 한계성안에서 살고, 그 경계를 넘지 말라고 말합니다.

    ·시편 90장은 우리에게 우리들의 날 수를 세어 지혜의 마음을 얻으라고 권고합니다.

 

프로메테우스적 지혜는 마치 타이태닉 호의 갑판 위를 거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즉, 침몰하고 있는 그 배의 갑판에 서서, 그 배의 엄청난 터빈에 대해, 배의 위용에 대해,

얼마나 많은 여행객을 태울 수 있는지에 관해 격찬하는 사람의 행동 말입니다.

 

그러나 시편 90장이 추천하고 권고하는 지혜는, '날들(days)의 수'를 세는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날을 셀 수가 있단 말입니까?

덧셈을 할 것인가요, 아니면 뺄셈을 할 것인가요?

어떤 방식으로 날 수를 센다는 말입니까?

 

    ·아마 젊은이들은 대부분 더하기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덧셈을 잘합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해 꿈을 꿉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몇 년을 이런 일을 해보고, 또 다른 몇 년은 저런 일을 하리라."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여러분들은 '더하기' 대신에

'카운트다운'(count down)을 해야 하는 인생의 한 지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 우리는 덧셈 대신에 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면서

숫자를 거꾸로 세어 내려가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런 방식이 좀 더 탁월하고 현명한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정해진 날수들을 할당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하루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할당된 날수들로부터 하나를 뺀 그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인도 이상과 같은 과정을 그 마음속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을 하나님께 요청하였을 때 그는 더욱더 그러했을 것입니다.

    ·나의 날 수 계수(計數)하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지혜의 마음을 얻을 것입니다.

    ·나의 날 수 세는 법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께서 나에게 할당해 주신 날들 하루하루를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 시편 90편을 표준 새번역으로 들어보십시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죽을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주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인생은 한 순간의 꿈일 뿐,

아침에 돋는 한 포기의 풀과 같을 따름입니다.

 

아침에는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도,

저녁에는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 삶이 끝이 나고,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는 스러지고 맙니다.

주께서 우리 죄를 주님 앞에 내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가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납니다.

 

주께서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한평생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주의 분노가 발산하는 능력을 누가 알 수 있겠으며,

주의 진노가 가져 올 두려움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시90:1~12

...................

 

주1)

신약에서는 밤을 네 경점으로 나눈데 반해,

고대 히브리인들에게는, 밤을 세 경점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경점 (beginning watch).. 애2:19

두 번째, 중간 경점 (middle watch). 삿7:19,

세 번째 경점 (morning watch) 출14:24, 삼상11:11 등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본문은 일반적인 ‘경점’을 가리키고 있고,

영어 성경은 그것을 watch(보초시간), 한글성경은 '경점' 등으로 번역하였다.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597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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