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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가 가져야 할 4가지 자세/디모데전서 1장 12-20절

by 【고동엽】 2022. 10. 23.

리더가 가져야 할 4가지 자세// 20011118

2001-12-07 23:55:29 read : 459

 

주일 낮예배// 디모데전서 112-20

 

<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

 

얼마 전 모 방송국의 한 기자가 '목사님의 자살'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최근에 두 분 목사님이 자살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너무 부흥이 안되니까

한 분은 우울증에 빠져서, 또 한 분은 먹고살기가 막막해서 자살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얘기를 듣고 속으로 "정말 못난 목사이군!"이라고 냉소할 것이고,

어떤 분들은 그 사건을 통해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떠올리려 할 것입니다.

돈 문제, 교단 문제, 소명 문제, 교회 이기주의 문제, 신학교 문제 등등....

 

그러나 이런 얘기가 들려도 우리는 교회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어려움에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을 주는 때, 죽고 싶은 때가 전혀 없는 분이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자기를 극복해가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분들에게

누군가 옆에서 "환경이 어떻다, 큰 교회 때문이다, 정책 실패 때문이다"라고 하면

그분의 자기 극복 의지는 약화되고, 그것이 심해지면 한과 상처만 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희망을 크게 말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깨어 있는 시간은 대부분 "어떻게 더 사랑할까?"를 연구합니다.

"어떻게 더 능력 있게 보일까?"를 연구하는 줄 알지만 그런 분은 소수일 것입니다.

일부 목사님들 중에서 사랑하는 일의 스트레스로 일찍 돌아가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자신의 직분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현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 상황이 축복의 재료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상황은 우리의 열심에 따라 꽃으로 피어나게 될 꽃봉오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나중에 "그때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열심히 사랑할 걸..."이라고 후회하지 말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 교회를 사랑하고, 내 현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고통과 눈물과 탄식과 슬픔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은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날실과 슬픔과 고통이라는 올실이 엮여 만들어집니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인생의 가능성을 안고 우리에게 꽃봉오리로 다가올 때

참고 기다림으로 꽃봉오리를 꽃으로 피워내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 아닙니까?

 

이제 2002년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직분자를 세우는 '총회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이 계절에 교회 직분의 의미와 직분자의 자세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가진 사람, 즉 공동체의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 직분자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나의 모든 삶의 해답이라는 말입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요새 서울대 의대 이왕재 교수님은 "비타민 C가 보이면 건강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 분의 연구에 의하면 비타민 C를 먹으면 감기에 걸리지 않고, 피곤하지 않고

면역기능이 활발해지고, 고혈압, 당뇨, 동맥경화 및 만성질환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10년 전까지만 해도 뇌출혈로 쓰러지는 사람들 대부분은

비타민 C가 많은 과일이나 야채 섭취가 어려운 2-3월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타민 C는 유해산소도 막아주기 때문에 많이 먹을수록 좋다고 합니다.

또한 비타민 C를 많이 복용하면 소화가 잘 되니까 방귀도 냄새가 안 난답니다.

그러므로 비타민C가 많이 함유된 식품인 녹차, 고춧잎, 대추, 피망, , 시금치,

딸기, 조선무, 쑥갓, 연근, , , 오이 등을 많이 먹으라고 그분은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 더 좋은 비타민 C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영혼을 살리고 능력을 주는 영적 비타민 C는 바로 그리스도(Christ)입니다.

직분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해답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영혼을 보다 강건하게 하고, 보다 잘 돕지 않겠습니까?

 

고린도전서 4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말합니다.

즉 일꾼은 복음을 아는 자, 예수님이 인생의 해답임을 아는 자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바로 이어서 고린도전서 42절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왜 바울은 이렇게 썼을까요?

충성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이 삶의 해답임을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충성, 복음이 없는 충성, 말씀이 없는 충성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기본적으로 복음을 확신하고 말씀을 더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 직분자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충성스런 직분자에게 있어야 하는 제일 중요한 성품은 바로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도 무엇보다 겸손을 앞세웁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씀에서 자기를 힘써 감추지 않습니까?

교회에 와서 자기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연민이 생기는 모습은 없습니다.

교회는 자기 자랑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계속해서 12절 말씀 하반부를 보십시오.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이 얼마나 충성스런 분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바울의 겸손함이 "나를 충성되어 여겨"라는 말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바울도 자기는 그렇지 못한데 "하나님이 충성되이 여겨주셨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충성해도 어떻게 충성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그저 "부족한 저를 충성되이 여겨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할뿐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충성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서 실직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요새 직장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회사에서 짤린다(잘린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짤리고, 교회에서 짤리는 것입니다.

본인은 "내가 교회를 나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짤린 것이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어떤 분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교회를 옮겨도 두고두고 좋은 기억을 남기는 반면에

다른 어떤 분은 실제로 짤린 것이라면, 교회에서조차 짤렸으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떤 분은 "어떻게 교회에서 짜릅니까?"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때로 교회의 거룩성과 공동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제명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제명이 궁극적으로는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한 행위라고 합니다(고전 5:5).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교회에서마저 짤릴까요?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그러나 아무리 부족해도 이 한 가지만 있으면 하나님과 교회에서 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은 꼭 붙잡아 주십니다.

 

만약 이 겸손한 마음이 없이 마음이 높아지면 인생에 큰 장애를 만나게 됩니다.

높은 마음은 개인, 가정, 기업, 교회, 국가에 생기는 모든 멸망과 실패의 원인이고,

우리의 열심을 식게 만들고, 우리의 깨끗한 마음을 녹슬게 하고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직분이 시시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가볍게 보이기 시작하면 큰 위기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맡은 직분을 묵묵히 감당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처럼 겸손할 때 자연히 무엇이 따라옵니까? 감사와 충성이 따라오게 됩니다.

그런 감사와 충성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기 직분을 끝까지 지키게 되고,

그런 모습이 주변에 있는 신앙 동료들에게 얼마나 많은 힘을 주는지 모릅니다.

 

서울 이촌동에 새 아파트가 들어설 때 한 집사님이 조그만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그후 이분은 반포로, 잠실로, 개포동으로, 수서로 새 아파트로만 이사 다녔습니다.

수서지구로 이사했을 때 목사님이 묻습니다. "집사님! 새 집을 참 좋아하시는군요."

그러자 이 집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이제까지 이사 다닌 솔직한 이유를 말합니다.

"목사님! 집이야 비슷하죠. 새 집이 오히려 불편하고, 아이들 학교 문제도 힘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새 아파트로 이사하면 '새로 종교를 가져볼까'하는 마음을 가져서

전도가 잘되는 편인데,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해 이사했던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 눈에 눈물이 핑 돕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연약한 줄 알고, 충성스러운 성도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분에게 있는 뜨거운 헌신의 불길이 다른 성도들에게도 옮겨 붙기를 원합니다."

결국 이 교회는 많은 영혼을 구하고 동시에 교회 부흥의 은혜도 맛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직분을 감사함으로 감당할 때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 직분자는 많은 사람들의 본이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직분자에게는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충성하면서 여기저기 부딪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분 충성스럽다!"는 말보다 "그분 예수님 닮았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가장 들어야 할 소리는 "저분 충성해! 저분 지도력이 있어!

저분 열심이야! 저분 성경박사야!"라는 말보다 "저분 예수님 닮았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 집사님 닮아야지! 저 장로님 닮아야지!"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교회에서는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보다 이 소리를 듣기를 원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제자들이 있다!"고 하며 장로님들을 자랑합니다.

장로님의 섬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교인들도 그렇게 닮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목사님의 말씀으로도 자라지만 중직들의 섬김의 본을 통해서도 잘 자랍니다.

훌륭한 인물이 앞서서 가면 그 인격이 부러워서 뒤따라가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직분자도 본을 보여줌으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직분자가 보여주어야 하는 본이 무엇일까요? 3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1) 직분자는 희생정신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개인의 비전과 함께 내가 속한 공동체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의 십자가를 질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면서 희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면 문제가 아닙니까?

 

이솝우화를 보면 결혼식을 맞이한 집주인이 동물회의를 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번 결혼식에 음식을 잘 만들어 대접하려는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러자 모든 동물들은 입을 모아 "찬성이요, 대찬성이요"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곧 집주인이 "그럼 요리 재료로 이번에는 거위를 죽이기로 합시다"라고 하자

거위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저는 큰 알을 낳잖아요. 저 수탉을 잡으세요."

수탉도 소리쳤습니다. "저는 아침을 알려줍니다. 저 양을 잡는 것이 어떤가요?"

그런 식으로 양, , , 소도 자기만은 잡으면 안되고 다 남을 잡으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잔치는 원하는데 희생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잔치가 이루어집니까?

그러므로 직분자는 항상 거룩한 일에 먼저 희생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직분자는 유연함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옛말에 "유연함은 생명의 현상이지만 딱딱함은 죽음의 현상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부드럽지만 생명이 없는 것은 딱딱합니다.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 생명력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직분자는 유연해야 합니다.

 

물론 중직자가 강직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선과 악을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아니오!"를 단호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좌우를 선택하는 문제에서는 "!"'아니오!'를 유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는 "아니오!"를 잘 못하면서

교회 피아노를 좌측에 놓을까, 우측에 놓을까 하는 문제에서는 '아니오!"를 잘하면

그분이 속한 공동체는 악과 싸우기도 전에 얼마나 불필요한 에너지가 빠지겠습니까?

악의 유혹은 과감히 떨치고, 좌우 선택의 문제는 넓게 이해하고 수용하십시오.

 

특히 성경을 볼 때 편협하게 보면 안됩니다. 양쪽 측면의 진리를 다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넓고 무궁한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이단이라고 여겨지는 그룹에서 잘못하는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이렇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딱 못 박고 그것만 믿으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에서도 개혁파와 보수파가 창조적 긴장은 유지하되 크게 보고 서로 돕는다면

우리 사회가 적으로 넘치지 않고 이웃으로 넘치는 소중한 사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깎아 내릴 때 내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깎아 내려지고,

남을 올려줄 때 내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올라가는 줄 알아야 합니다.

직분자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유연한 사고가 있어야 그 공동체가 평화롭게 됩니다.

 

3) 직분자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열린 시야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주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체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적이다"고 하는데 본인은 "자기가 진리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주관이 때때로 필요하지만 객관이 없는 주관은 마음과 영혼을 곧 헐벗게 만듭니다.

 

성도들마다 주관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그들에게 객관적 시야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때 객관성을 자꾸 무시하면 이단의 유혹과 신비주의에 빠지고, 결국 실패합니다.

부모들이 딸에게 "저 청년은 위험하다!"고 하면 결혼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설 '마농 레스코'나 얼마 전에 개봉된 '오리지널 신'이란 영화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자기 주관에 의한 감정적 사랑의 끝은 결국 인생을 파멸로 끝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은 그런 대로 "둘이 사랑하다 죽었다"라고 미화될 수 있지만

신앙의 문제에서 그런 식으로 살면 영혼이 파멸되는데 어떻게 미화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면 자기의 주관이 악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목회자 은퇴 제도가 없을 때 어떤 팔십이 넘은 목사님이 은퇴를 안합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은퇴하기를 원하는데 목사님은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주의 종이 죽도록 충성해야지."라고 하며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강단에 올라갑니다.

또 연로하셔서 화장실에 자주 가야되는데 힘이 없으니까 강단에 요강까지 놓습니다.

본인은 충성한다고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 일이 됩니다.

이처럼 객관성을 잃어버린 주관적인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나의 행위의 의미를 살필 줄 아는 객관적 시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분들만이 교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본이 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직분자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산하였느니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외식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눈을 게슴츠레 뜬 상태로 판단을 합니다. "여기는 예수가 없어!"

그런데 말로는 제일 예수님이 있는 것 같은데 진짜 예수님은 없다면 문제 아닐까요?

 

주님은 "주여 주여 하면서 권능을 많이 행한다는 자를 조심하라"고 합니다(7:22).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말로만 '예수, 예수'하는 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 말은 적게 하고 진짜 예수님답게 사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습니까?

 

솔로몬은 스물 한 살에 왕이 되어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놀라운 지혜를 얻었고, 그 지혜로 이스라엘을 40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이가 많아지면서 점차 그는 지혜보다는 진실을 구하게 됩니다.

잠언 307-8절 말씀을 보십시오.(아굴의 잠언이지만 솔로몬의 사상이 투영되었음)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지혜도 귀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더 귀합니다.

다른 어떤 화려한 것보다 진실이 더 귀한 줄 아는 것이 바로 성숙함이 아니겠습니까?

진실하려고 애써본 사람들이 진실이 얼마나 귀하고 큰 힘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진실은 화려하지 않고 조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바로 진실입니다.

진실의 보상을 받아본 사람은 진실이 보화요, 진실이 영광이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직분자가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상하는 기준은 '나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인 줄 알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려고 힘쓰고 애쓰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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