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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9월 04일]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요 14:1~11)

by 【고동엽】 2022. 10. 23.

[2022년 09월 04일]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요 14:1~11) - 곽선희 목사
https://www.youtube.com/watch?v=0NOEXAIVIGk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4장 1절로 11절 말씀 되겠습니다. 신약성경 171면입니다. 171면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봉독하게 됩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봉독할 때에 다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아멘.

너무도 한 25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평양에 과학 기술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끝날 만찬을 열었습니다. 저를 환영하는 그런 큰 만찬을 열었는데 그 만찬 석상에서 모 대학 교수 한 사람이 나에게 이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 동무. 목사님은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서요." "믿습니다." "하나님 봤어요?" "못 보았지요." "못 본 것을 믿으려 하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본 것 외에는 믿지 않습니다. 유물사관에 의해서 확실하게 본 것만 믿습니다." 희망에 차 말해요.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겁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나도 하나 물어 보십시오. 세상에는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볼 수 있는 것을 있다고 합시다. 그럼 볼 수 없는 것은 없는 겁니까? 볼 수 없는 것은 없는 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볼 수 없는 것은 있는 것이고 볼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아주 곤경에 처했습니다. "내 하나 더 물어 봅시다. 동무 할아버지 본 일이 있어요?" "저, 못 봤는데요." "있어요? 없어요?"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에게 이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볼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볼 수 없는 것에 의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볼 수 있는 것에 의해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는 겁니까?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결과입니까? 어느 쪽이 근원이고 어느 쪽이 현상입니까? 하고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이 교수는 벌벌 떱니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볼 수 없는 것이 원인이고, 이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현상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그 고위 간부인 분이 그 교수님을 향해서 "동무! 뭐라고 변명할 말도 마라!" 하고, 그러니까 아주 얼굴이 시커멓게 질려서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우연하게 되어진 일이지만 그날 일은 참 통쾌했고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다는 말이 뭡니까? 헬라어에서 특별히 '블레포'라고 하는 말은 그 헬라 사람들이 철학이 특별해요. 본다는 말하고 안다는 말이 단어가 같습니다. 안다는 말이 본다는 말이고 본다는 말이 안다는 말이에요. '이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상당한 연관 관계가 있거든요.

보세요. 눈으로 봅니다. 그래 눈으로 보아서 알죠. 또 귀로 듣는 것만은 아닙니다. 귀로 봅니다. 옳고 그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귀로 들어 아니까 보는 거죠. 또 손으로 봅니다. 내가 만져 보니까, 만져보고 알게 되니까 그것이 손으로 보는 거지요. 그뿐입니까? 마음으로 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마음이 벌써 봅니다. 마음으로 보고 압니다. 또 그런가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이성을 통해서 이성으로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밝은 이성이 그것을 추리합니다. 본 것과 마찬가지고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지식을 형성합니다.

그런가 하면 영으로 봅니다. 우리가 묵상하는 중에 조용히 우리 영을 통해서 봅니다. 여러분, 개는 냄새로 봅니다. 눈으로 보지 않아요. 코로 봅니다. 코로.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집결합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으로 보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에 대해서, 아니 미래에 대한 것, 솔직히 말해서 죽음 다음에 대한 것, 더 멀리 있는 미래에 대해서는 이제 눈으로 보아서 알 것은 아닙니다. 이건 믿음으로 압니다. 영원한 세계까지 우리가 알 수 있다 하는 것을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눈이 감겨지면 물론 눈으로 보아야 할 세계를 못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눈이 나쁘다는 것은 그만큼 지식의 세계가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아직 돋보기도 안경을 끼지도 않고 가까운 곳, 먼 곳을 다 볼 수 있으니 그만큼 지식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눈 뜨자마자 확 틔어집니다. 그러나 눈이 나쁘면 가까운 데 밖에 못 봅니다. 내 코앞까지만 보고 나머지는 못 봅니다. 게다가 난시가 되면 흔들려 가지고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눈이 밝아야 영혼이 밝아질 수 있고 지식의 세계, 초월한 세계의 그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소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 당시의 종교 지도자의 대표적인 사람 니고데모가 밤늦이 예수님을 저녁에 방문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중생해야 되겠다.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볼 수도 없느니라." 중생해야겠다. 아주 중요한 헬라어 개념이 해안으로 들어옵니다. 중생해야겠다. 다시 태어납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공부하고 깨닫고 느끼고 경험한 그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새로운 영역의 세계, 중생, '아노덴' 나는 '울루토'라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나는 역사가 있어야 내가 하나님을 볼 것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니고데모가 아마 예수님 앞에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아니 나이 많은 내가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 예수님께서 아마 속으로 웃었을 거예요. 이 사람이 철이 없구나.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내가 중생해야겠다는 이 말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느냐?" 지도자가 돼 가지고 아주 니고데모가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일로 인해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을까? 적대적으로 했을까? 아닙니다. 그는 비밀히 예수님의 제자로, 부지런히 예수님의 제자로 됐다가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신 다음에 밀사, 장례식 하는 사람들 그 속에 니고데모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숨은 제자요. 아리마대 요셉은 숨겨진 확실한 제자라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아아,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중요한 주제는 이것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보고 싶습니다. 보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께 답하십니다. "벌써 보았느니라. 벌써 보았는데 지금 무슨 또 보여 달라고 하느냐?" 아주 중요한 얘기 아닙니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왜 또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 볼 수 있는 것이냐?"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계시자로 오셨습니다. 곧 육신 되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려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들이 쉽게 알게 하기 위해서 육신을 입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그 전체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계시 사건입니다. 계시 사건. 그것도 적극적 창조적 계시 사건입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들어야 하고,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아야 됩니다. 이것이 통로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보듯이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모든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주의 계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얼굴을 보고 그 행하심을 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풍랑을 만났을 때 그 거친 풍랑을 향해서 "고요하라. 잠잠하라!" 외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보아야 하지요.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 5천 명을 앞에 놓고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깜짝 놀랄 만한 일 아닙니까? 위! 하나님이세요. 저분이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죠. 그런가 하면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벌써 썩어서 냄새까지 나는 나사로 찾아가서 돌무덤을 옮겨 놓으라 한 다음에 "나사로야 나오라!" 소리를 지릅니다. 죽은 나사로가 걸어 나옵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봐야죠. 하나님을 알아야죠. 이것이 중요한 말씀이에요.

보는 것과 아는 것, 믿는 것과 아는 것, 오버랩합니다. 믿음 없이 알지 못합니다. 본다고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중생한 자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러분, 주안에 계십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유명한 라커펠러라고 있죠. 이 세기적인 갑부죠. 그의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는 여러 가지를 말하고 싶지 않다. 네가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된 것은 알지만 첫째, 주일을 지켜라. 교회에 나가거든 맨 앞에 앉으라. 어머니의 명령이다. 맨 앞에 앉아라. 둘째, 네가 돈을 벌거든 반드시 십일조를 해라." 그래서 그는 평생에 400 교회를 세웠고 5개 대학을 세우고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큰일을 많이 했습니다.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마지막 부탁이 중요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누가 설교를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라. 비판하지 마라. 의심하지도 마라.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라." 라고 어머니가 부탁합니다. 이 세 가지 말씀을 그 교훈을 잘 지켜서 라커펠러가 된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됩니다. 함부로 비판할 생각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여러분, 장한 씨앗이 이건 니고데모가 그랬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라는 사람 잘 알지 않습니까?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앞에 섭니다. 이 사람은 로마 백부장입니다. 아주 훌륭하고 당당한 백부장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입니다. 초라한 어부입니다. 이제 왔습니다.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절했던지 베드로가 송구해서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요. 이러지 마세요." 라고 부탁할 만큼 그는 경건한 자세로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베드로를 하나님의 보내신 분이요,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믿음으로. 그런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우리가 듣겠나이다." 이 얼마나 경건한 마음입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것이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셨으니 듣겠나이다." 이 경건이 있을 때 그는 분명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듣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형님과 멀리 한 20년 동안 체제다 원수처럼 지내다가 형님을 만납니다. 얍복강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형님을 만나게 될 때, 20년 만에 조우로 만나면서 원수로 대하지 않고 형과 동생으로 대하게 될 때 너무 감격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20년 동안 맺혔던 원한이 사라지고 형과 동생으로 만나게 되는 화해, 화해 속에서 용서 속에서 사랑 안에서 그는 하나님을 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의 그 순교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크리소스톰에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 그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포기하라고 끝까지 강요합니다." "아니다"라고 대답할 때 "그러면 너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겠다. 고독하게 하겠다. 너를 헐뜯어라." 그 옆에 있던 신하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독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하기 때문에 더 좋아합니다." "아, 그러면 감옥에 처해야겠다." "감옥에 가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됐다고 더 좋아합니다." "아주 목을 베어야겠다." 그때 하는 말입니다. 신하가 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순교를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목을 베라고 하면 춤을 추고 좋아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로마 황제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으냐?"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당할 때에, 고난을 당할 때에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고, 더 밝게 더 밝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순교하는 시간에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인자가 하나님 앞에 서신 것을 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보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예비하고 다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그리고 나 있는 곳에 너희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듣는 순간 하늘이 열립니다. 하늘, 하늘의 세계가 보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토마스 에디슨이라고 있습니다. 발명왕이라고 부르죠. 1931년 85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천 가지의 발명품을 만든 유명한 발명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말했습니다. "현세의 끝에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죽음은 현세의 출구요, 천국은 내세의 영원한 입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만 보는 것, 과거만 보는 것이 아니에요. 미래를 봅니다. 영원한 세계를 봅니다. 내가 가게 될 하늘나라를 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 말씀을 들음으로 영원, 영원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께서 저희를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허물 된 생을 살고 있지만, 마다하지 아니하시고 또 불러 주시고, 우리에게 와 주시고, 또 하늘 문을 열어 주시고, 비록 세상에 살지만은 하늘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신 것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주여, 원하옵나니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통해서 주의 음성을 듣게 하셔서 항상 우리 영혼이 소생함을 받아서 영원한 세계까지 확실하게 바라보며 오늘을 살고 승리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핵심 요약: 요한복음 14장 강해와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경험

제시해주신 내용은 요한복음 14장 1절로 11절 말씀을 바탕으로 한 설교이며,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본다는 것'**의 참된 의미,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듣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 📖 요한복음 14장 1-11절 말씀의 요지

  •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자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 처소 예비: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며,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시고 다시 와서 그들을 영접하여 함께 있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 길, 진리, 생명: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오래 있었음에도 알지 못하느냐며 자신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2. 👀 '본다는 것'에 대한 심층적 해석 (평양 과기대 교수와의 일화 중심)

  • 평양 과학기술대학 교수와의 논쟁:
    • 교수는 "본 것 외에는 믿지 않는다"는 유물사관에 입각해 목사에게 "하나님을 봤느냐"고 질문했습니다.
    • 목사는 "볼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냐"고 반문하며, **볼 수 없는 것(원인)**이 **볼 수 있는 것(결과/현상)**보다 먼저이고 근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예: 할아버지를 보지 못해도 존재했다는 사실)
    • 결론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원인이며, 볼 수 있는 것은 그 결과와 현상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 헬라어 '블레포'와 '이도': 헬라어에서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이 같은 단어('이도')를 사용하며,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의 깊은 연관성을 설명합니다.
  • 다양한 '봄': 눈으로 보는 것 외에도 귀로 보고(들어 알아서), 손으로 보고(만져서 알아서), 마음으로 보고, 이성으로 추리하여 보고, 영으로 보며, 궁극적으로는 믿음으로 보는 것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미래와 영원한 세계는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 영적인 눈: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요한복음 3장의 **중생('위로부터' 나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볼 수 있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3. 🕊️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계시와 예배자의 자세

  • 예수님의 계시: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계시자로서, 그분의 일생 전체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한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계시 사건입니다.
    • 예수님의 기적(풍랑을 잔잔케 하심, 오병이어, 나사로를 살리심)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듣고, 보아야 합니다.
  • 록펠러 어머니의 교훈: 주일을 지키고, 교회 맨 앞에 앉으며, 설교를 들을 때 비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라는 교훈을 통해 경건한 예배자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 고넬료의 자세: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우리가 듣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만날 수 있습니다.
  • 화해와 환난 속의 만남: 야곱이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처럼, 화해와 용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크리소스톰 교부의 일화처럼,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고난을 통해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밝게 보게 됩니다.

4. 🌟 결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 예수님은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 토마스 에디슨이 "죽음은 현세의 출구요, 천국은 내세의 영원한 입구"라고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세계, 하늘나라를 바라봅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듣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설교는 요한복음 14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믿는 것의 중요성을 논증하고, 성도가 가져야 할 경건한 예배자의 태도영원한 소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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