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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에 대한 단상 빌1:21~23
◑1. 오늘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런데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여기에서 장막을 거둔다고 하지 않고 장막이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장막을 거두는(접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없고 무너집니다.
기대하지 않던 날에,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급작스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장막을 거두는 식으로, 여유 있게 세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건 무너지는 식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입니다.
학교도 방학하는 날이 오고, 백화점 세일도 끝나는 날이 오고
또 TV 드라마도 종영하는 날이 오는 것처럼. 학교가 방학하면
그전까지 와글와글하던 학교가 적막강산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도 마찬가지에요. 적막해집니다.
졸업식 때 보면,
부모가 늦었거나, 아니면 올 수 없는 입장이라서,
그러면 자기 혼자 걸어서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처량하겠습니까!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아무도 우리를 맞아주지 않고 기다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처량한 인생이고 고독한 영혼이 됩니다.
내 인생이 무너지는 날, 주님이 나를 영접해 주시려면,
평소에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평소에,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 무너지는 순간에, ‘주님이 나를 영접해 주시겠지..’ 하는 것은,
기만(속는 것,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내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오늘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주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오늘 내 인생을 더욱 복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25:21)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어야
그 날에도,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들으려면,
거기엔 수고, 희생, 고난, 십자가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남들이 그저 립 서비스로 칭찬해 주는 성공’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보기에도 성공한 인생이요,
-무엇보다 주님이 보시기에,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안쓰러운 성도도 있습니다.
그건 할 수 없습니다. 천국 갈때까지 기다려야지요!
◑2. 신앙심 깊은 성도가 임종 때 우는 이유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신앙심이 깊은 성도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종이 가까운 시각에
눈에 눈물이 고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한 많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한이 맺혀 우는 것일까요?
아니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앙심이 부족해서 우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모습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보다
그것은 남편으로서, 또 아내로서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깊고도 특별한 사랑의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의 순간에
자신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안에
진실한 사랑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3. 죽음의 공포를 피하는 법
심리학에서 forbia(공포증)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처럼 snake forbia(뱀 공포증)이 있으면
뱀을 피하지 말고 바라보아야
차츰 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싫은 것,
그래서 꼴보기 싫은 것,
볼까 두려울 정도로 싫은 것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이요
피하지 말고 보는 것입니다. ★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직면하기 싫은 죽음을 극복하는 법은
죽음을 매일 바라보는 것입니다...
◑4. 죽음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일 때부터... 자유로워진다.
초등학교 4학년 성탄 전날 저녁, 가족 노래자랑을 했다.
평소 노래를 좋아하는 부모님이 심사를 하시고,
우리 7남매는 한 사람씩 독창을 했는데 내가 꼴등을 했다.
나는 심사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 골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그 후부터 난 독창을 하지 않았고, 독창시키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좋아해 이것저것 악기를 만졌다.
20여년이 지나서, 어머니 회갑을 맞아 형제들이 돌아가며 축가를 불러드렸는데,
그때서야 내가 노래를 가장 못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게 되었다.
가족 노래자랑에서 꼴등을 한 지 20여 년이 지나서야
내 노래 실력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러자 뭔가 묶인 것에서 풀려나는 자유로움을 체험했다.
그 후 노래를 시키면 거절하지 않는다. (자유로워졌으니까!)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정은 상처에서 풀려나는 자유를 준다.★
죽음 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사람이 있다.
객관적 사실로 자기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코앞에 닥친 죽음을 객관적 사실로 인정하는 사람은,
오히려 차분해지고, 자기 삶을 정리하며 죽음을 담담이 맞이하게 된다.
신앙심이 깊어지면, 삶도 좋고, 또한 죽음도 좋아하는 단계에 이른다고 한다.
바울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원했듯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소망해야 한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5:8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다면,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 곁에 있고 싶은 까닭은, 그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1:21~23
마더 테레사도 늘 죽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87세로 장수 했다.)
사도 바울처럼,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약 오늘 ‘가더라도’ 기꺼이 갈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오늘 떠나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담담히 받아들인다.
◑5. 바그다드의 상인에 관한 옛 전설
어느 날 그 상인은, 자기 종을 시장으로 심부름 보냈다.
시장에 나갔던 종은, 금방 창백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돌아왔다.
그리고는 매우 흥분하여 주인에게 말했다.
“시장에 내려가자 무리 중에 섞여 있던 어떤 여인이 나를 떠밀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았을 때 나를 떠민 것이 바로 죽음의 여신임을 알았습니다.
죽음의 여신은 나를 보더니 위협적인 몸짓을 해 보였습니다.
주인님, 제게 말 한필을 빌려주십시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저는 사마리아로 도망가서 거기 숨으렵니다.
그러면 죽음이 저를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상인은 종에게 말을 빌려주었고, 종은 급히 서둘러 사마리아로 피신을 갔다.
얼마 후에 상인은 시장에 나갔다가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죽음의 여신을 보았다.
그래서 상인은 죽음의 여신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오늘 아침 나의 종을 놀라게 했습니까?
왜 위협적인 몸짓을 해 보였습니까?”
죽음의 여신은 대답했다.
“그것은 위협적인 몸짓이 아니었습니다. 놀람의 표시였을 뿐입니다.
나는 바그다드에서 당신의 종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던 것 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밤에 그를 사마리아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결코 피할 길도, 피할 장소도 없다는 주제의 전래 이야기인듯,
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오히려 자기 죽음을 재촉한다는 뜻도 되는 듯.
“이 세계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죽음만은 확실하다.”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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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당하고도 평안하다
1981년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총을 맞아 암살당할 뻔했을 때,
그의 담임목사는 대통령의 손을 잡으며 물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레이건 대통령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깊은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저에게는 구세주가 계시잖아요."
지금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숨이 헐떡거리면서도
자기 마음에는 구세주가 있으니, 예수님이 돌보아 주신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평안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삶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 때 죽음도 담대하게 대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 https://rfcdrfcd.tistory.com/14247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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