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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 사이, 중간 상태 P2 눅23:43, 벧전3:19 영어 녹취록 출처,
Between death and Resurrection / David Pawson
◑질문과 응답
▲1. 중간상태에서 낙원 paradise 이나 옥 prison 에 가게 되는 결정적 요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판>시간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심판 Judgment : 앞으로 살필 예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양심, 자기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반응 response’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파슨 박사는 단순히 믿음faith 이라 하지 않고, 반응 response이라고 표현했네요.
그런데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그들이 중간상태에 가서 심판을 받기 보다는,
심판은 이미 이 세상에서 받는다고 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심판이며,
또한 옥, 지옥에 갈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벌써 지옥 같은 삶을 삽니다.
반대로 낙원, 천국에 갈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벌써 천국 같은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1국면
‘저 천국’의 우리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3국면
‘중간상태’의 우리의 운명도 결정합니다. *2국면
▲2. 중간상태에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질까요? 2nd chance
많은 사람들이 제게 이 질문을 합니다.
아마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겠지요.
중간상태에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고 성경에서 말한 구절은
벧전3:19절에 그 어렴풋한 흔적이 나와 있습니다.
‘영으로서의 예수님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나와 있죠.
선포하셨다.. 영어로 ‘preached 설교하셨다’ 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중간상태인 옥에 가셔서, 거기에 감금된 영혼들에게
설교하신 이유 또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설교를 한다는 것은, 뭔가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가운데서 하는 게 아닐까요?
어차피 옥/지옥에서 영원히 보낼 영혼들에게, 설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정통신학에서는 2nd Chance를 반대합니다.
위 구절에, 그 설교의 대상이 이어지는 2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노아시대 때 물에 빠져죽은 사람들’입니다.
일반적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대상에 국한되므로
일반적 대상에게 2nd Chance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게 개신교 전통적 주장이죠)
그 외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2nd Chance의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죽기 전에,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고 나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은, 그 2nd Chance가 주어지기를 바라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후에 2nd Chance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며
오늘날 우리 현세의 삶을, 도박적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박’이란 뜻은, 사후에 혹시 2nd Chance가 주어질지 모르므로
거기에 기대를 한 번 걸어보는 심리, 도박적 심리인데요, 그건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도박적인 확신을 심어줄 수는 없겠지요.
▲3. 그럼 ‘연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purgatory
‘연옥’이란 쇠를 정련할 鍊, 감옥 獄인데요. 영어도 그런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영혼들은, 연옥에서 불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쉽게 말하면 징역을 산 후에 깨끗하게 되어져서, 천국에 보내진다는 뜻이죠.
-그들은 연옥에서, 세상에서 속죄 받지 못한 죄를 속죄 받게 되고요, 즉 거기서 벌을 받고요,
-온전히 성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거기서 성화의 과정을 거치는데요.
예수님을 믿기는 했지만, 온전히 성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거치는 일종의 수련학교 같은 곳이죠.
또한 세례 받지 못한 어린아이가 죽으면 가는 ‘림보’라는 곳도 있습니다.
거기서 정결함을 받는 기간을 거쳐서, 천국으로 보내진다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천주교의 연옥 교리가 발전해서
‘죽은 자를 위한 미사와 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죽은 자를 위한 헌금(면죄부)’ 이런 게 자연히 생기게 되었죠.
그런데 개신교는, 그런 게 ‘도박’이라고 보고, *성경적 근거가 너무 약하니까요.
아예 없다고 보고,
이 세상에서 믿을 때, 제대로 믿으라는 겁니다.
*더욱이 연옥 교리가, 면죄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면죄부(죽은 자를 위해 헌금을 내면, 죽은 자가 연옥에서 천국으로 간다는 교리)
를 없애다 보니, 연옥 교리를 없애야 했었습니다.
저 파슨은 연옥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모든 형벌을 다 받으셨는데,
우리가 그 속죄의 능력을 정녕 믿는다면, 연옥에 가서 또 더 연단 받을 이유가 없지요.
이것이 제가 연옥을 반대하는 결정적 이유입니다.
*진실한 신자는, 정화 학교가 필요 없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런 교리를 만든 이들은, 진실한 신자가 많지 않다고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을 때, 그것은 우리를 이 육신의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케 됩니다.
사탄의 시험과 공격과 유혹에서도 완전히 자유케 됩니다.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가졌을 동안에 국한됩니다.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은, 육체를 가졌을 동안에 있는 유혹들입니다.
그런데 죽고 나면, 육체가 없으므로, 그런 죄와 유혹들이 없습니다.
그 영혼의 상태에서, 무슨 정화/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시험 자체가 아예 없는데요.
3)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그 분과 같이 되어
우리는 그 분의 모습 그대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그 분과 같이 된다고 했는데,
*요일3:2,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그 중간에 정화의 학교 과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적 근거가 아주 희박한 ‘연옥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지요.
물론 성경에 ‘연옥’이란 단어도 아예 나오지 않고요.
▲4.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요?
가톨릭교회는, 1년에 1번 주일을 택해서, 죽은 자(가족들)를 위한 미사도 드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전례가 아직까지도 있습니다.
*면죄부는 공식적으로 없지만요.
영국 성공회도, 최근부터 미사 때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추세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요.
‘2차대전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이런 것도 날을 정해서 드리기도 합니다.
*천국에서 돌아가신 성도, 가족이, 지상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은 믿으니까
이 지상에서도, 천국이나 특히 연옥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거지요.
우리는 이런 기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평소에 자기 부모님을 위해서 늘 기도하는 사람은,
그게 습관이 되어서, 부모님 소천 후에도, 기도가 계속 되기 마련이지요.
부모님이 소천했다고, 갑자기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장례식에 가거나, 추도식이 되면, 죽은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게 되지요.
제가 그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란, 제 파슨은 ‘쓸데없는 기도’를 뜻합니다.
지상에서 신자의 기도가, 죽은 자의 영원한 운명을 뒤바꿀 수는 없으므로,
그런 쓸데없는 기도는, 드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도를 전례(전통의식)으로 만들거나 하면,
사람들이 자꾸 2nd chance가 있구나.. 하고 착각하게 되고
그러면 현실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게 되는 거죠.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보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16:25
‘옥’에서 ‘낙원’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못 건너간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죽으신 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 분을 위해 기도해서, 예수님께 그 분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다면, 그건 불신이지요.
*불신자는.. 구렁텅이가 있어서, 건너갈 수 없고
신자는..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없지요. 낙원에 잘 있는데요, 세상에 사는 우리가 차라리 걱정이죠.
그런데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죽으신 분을 위해서 기도할 수도 있는데,
‘구렁텅이가 있어서’ 그 운명을 못 바꾼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차라리 그 분이 살아있을 때, 전도와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에도, ‘죽은 자를 위한 기도’가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죠.
그러니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할 열심으로
지금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마카비서에 한 구절 나오는데,
개신교회는, 마카비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외경
가톨릭교회 성경에는, 마카비서가 포함되어 있죠.
▲5. 그러면 죽은 자들은, 우리를 지켜보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가요?
이게 가능한가를 묻는 질문이죠.
히12:1절에는,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히12:1
저 파슨은, 이 구절을 놓고 그렇게 보기에는 ‘모호하다, 흐릿하다’고 봅니다.
그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긴 하겠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겠지요.
더욱 모호한 것은, ‘그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있다’는 내용이
성경에 명확히 적혀 있지 않습니다. *기도해 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그게 성경에는 명확하게 ‘그게 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저 파슨 자신도, 심정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러나 성경에 확실히 나와 있지 않는 내용으로, 교리화 시킬 수는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기에, 기분상 ‘죽으신 분들이 지상의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고 느끼겠지만,
그래서 좀 용기나 격려를 스스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느낌상으로요,
그러나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중보기도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자세히 안 나오는 내용이라서, 교리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믿으니까, 생각하니까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를 바치게 되고요,
성자에게 기도하게 되는데요. 그 성상 앞에서 기도가 그 성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이죠.
우리는 죽은 자, 성자보다, 예수님께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라고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영어로 we are to believe in the communion of saints
그러니 ‘성자들과 교통하는’ 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자들에게 기도하며 그들과 교통/교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데요,
우리는 예수님 중심적이 되어야 합니다.
성자들과 교통하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는 것이지,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직접 성자들과 교통하고자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기 쉽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식 communion service’ 를 드릴 적에는
거기 communion이 교제/교통 koinonia 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때 먼저는 예수님과 성찬을 통해 교제하고,
또한 천국에 계신 성도/성자들과도 ‘하나 되는/교제하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통 성찬의 의미에 ‘성도의 교제’를 포함시킵니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파슨 박사는, 거기 ‘성도’의 범주에, 천국 성도들도 포함시키네요.
▲6. 우리는 죽은 자들과 의사소통 communicate 할 수 있나요?
그건 영매들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다 귀신의 장난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일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특히 모세오경에 영매, 술사들을 다 죽이라고 했죠.
이런 spiritualism 에 대해서, 다음 목요일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오늘날에 유행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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