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6:1-7
구속 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들 중에 하나는 최악의 시대를 최선의 시대로 성화 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많은 시대를 은혜의 풍성으로 대신 채워 주시고, 극에 달한 어둠의 때에도 별빛이 반짝이게 하므로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한 실례들 중의 하나가 엘리사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때는 북조 왕국 아합의 왕가가 우상 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웃 강국 아람을 들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려 하실 때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위하여 캄캄한 밤하늘에 별 같이 빛나는 시대의 파숫군들을 숨겨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로 이어지는 선지학교 운동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엘리사 시대에 일고 있던 선지 생도들의 운동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선지학교가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 등지에 있었음을 봅니다(왕하 2:1,3,5). 본문의 내용은 요단강에서 가까운 여리고에 있는 선지학교에서 있었던 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1. 최악의 시대에 나타난 은총의 표징이었습니다.
그 중심 내용도 요단강 강둑 어느 곳에 선지생도들이 공부할 집을 하나 더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사회적인 형편이나 국가적인 형편이나 국제적인 형편이 선지학교를 하나 더 세워 공부를 할 때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사람들은 선지 학교를 하나 더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떤 문제의 해결을 우리가 바라고 생각하는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배가 몹시 아파 진통제를 먹고 소화제를 먹었는데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고생을 했습니다. 견딜 수 없게 되어 병원을 갔는데 배가 아픈 것은 소화가 안 되여 그런 것이 아니라 급성 맹장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급히 마취를 하고 맹장을 수술하여 제거하고 나니 배 아픈 것이 씻은 듯이 나아 버렸습니다.
전쟁의 위기 속에 엘리사가 생각한 구국의 길을 우상 숭배하는 사회적인 풍조를 막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온 나라에 전할 수 있는 길은 많은 선지 생도들을 양성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 하여 매일 모이고 찬송을 부르고 거룩한 떡을 떼며 구제를 일삼고 성도의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모이고 즐겁게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성전을 맡는 자들과 대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시기 질투가 가득하여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교회는 그들의 핍박을 받자 핍박한 자들을 위한 기도와 핍박을 당하는 사도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본연의 임무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본연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여 죄인을 구원하는 일인데, 핍박이 없을 때는 즐겁게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핍박이 있을 때는 그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교회의 본질적 모습의 일부가 상실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그들의 인위적인 신앙 생활을 벗어나게 하시고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역사를 하셨습니다. 즉 말씀에 힘을 얻고, 기도하고 능력 받아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여 죄인을 구원하는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핍박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악한 자들에게 핍박을 당해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순교자까지 생겼는데 이 일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인 줄 어느 누가 알았겠습니까? 먼 훗날에 가서야 역사를 살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오묘하고 깊으신 뜻을 깨달아 안 것입니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들입니다. 모세의 백성들이 과야 길을 걷게 되 것도 그러하고,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간 것도 그러하고,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는 너무 신학교가 많아서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일들이고 다른 종교에도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교회는 많이 부흥 안 되는데 신학생들은 많이 양산된다. 결국 그 신학생들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할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교에서 찾게 됩니다. 목사들이 선교지에 가서 선교를 하게 되면 국내에서 안되던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를 할 수 있게 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한국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1) 그 이유가 무엇인가?
본문 6장 1절에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 좁으니...>라고 한 이유입니다. 저들의 거처가 좁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여기 좁다는 말은 장소가 너무 협소하여 답답한 지경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의 소명을 받고, 진리의 사람 엘리사에게로 모여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지 생도들을 다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지구촌 시대라고 말합니다. 촌이라는 말은 결코 넓은 고을에 쓰는 말이 아니라 작은 고을에 쓰는 말입니다. 지구가 작은 촌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나나 여러분은 이 지구에 인가 본데가 너무 많아 이 지구가 얼마나 작은 곳인가를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지구가 아주 작은 촌이 되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는 더욱 더 좁은 촌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살고 있으니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얼마나 좁은 곳인가를 한 번 밖에 나갔다 오면 실감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 무슨 신학교가 그리 많아 신학생들이 한 해에 수만 명씩 배출이 되는지----- 그래서 쏟아지는 신학생들, 목사들에 대해 이렇쿵 저렇쿵 말들이 많습니다. 또 교회는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이 땅을 살 때가 1989년도 이었는데 1993년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 눈에 들어오는 교회가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도도 안 되는 이 지역에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 좁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거처를 이웃으로 넓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더 크고 많은 축복을 믿음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그릇을 더 크게 하자는 요구였습니다. 학생들의 수효가 너무 많아져서 새로운 수용을 더하기 위한 발전적이요, 진취적이요, 미래 지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저들의 요구는 참으로 소박하고 단순하였습니다. 저들은 백향목 들보와 대리석과 공교한 공예품들로 이 세상의 궁궐을 짓자고 요구한 자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요단강 지방에 있는 나무를 베어서 오두막을 하나 더 크게 짓고 하나님을 섬기고, 진리를 배우자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들의 꿈에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이적은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처소를 세우는데 수반되는 몇 가지 요건들을 봅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허락이 필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선지 생도들은 엘리야 승천 이후에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좋은 계획과 목적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분별하는 척도는 엘리사의 허락 여부에 달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들은 저들 시대에 주어진 생존 의미의 최선이 엘리사와 함께 함에 있다고 생각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왕하6:2)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 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하였을 때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라고 허락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선지 생도들이 그들의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과 자기들의 모든 일에 대한 위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과의 관계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엘리 제사장 사이에서 이 관계의 철저한 모범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삼상2:19)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삼상2:20)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 (삼상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하나님의 종과 마음을 같이하여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민16: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민16:27) 무리가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 사면을 떠나고 다단과 아비람은 그 처자와 유아들과 함께 나와서 자기 장막 문에 선지라
(민16:32)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민16:40)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또 고라와 그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에게 명하신 대로하였더라
(민16:49)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일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고후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빌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동행이 필수였다는 사실입니다.
“(왕하6:3)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 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엘리사는 저들의 요구를 모두 허락하였습니다.
저들은 저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에 있어서 결코 개인의 주장이나, 독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삶과 함께 함으로 그 일이 성취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자들입니다. 저들은 훌륭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훌륭한 규율 밑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를 원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가서는 그 일을 하기 어렵게 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사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스승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과 함께 하는 생활은 곳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과 엘리사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올바른 것이었음이 그들의 도끼 사건에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의 종과 마음에 합하고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지체할 줄 모르는 행동의 수반이었습니다.
(왕하6:4)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허락을 받고, 엘리사의 동행을 요구한 후, 지체하지 않고 요단강가에 이르러 일에 착수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새로운 축복을 수용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허락과, 동행을 요구했고, 지체하지 않는 행동으로 저들 처소를 세우는데 여건을 갖추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신중히 생각하여 결단하고 하나님의 뜻이 확증되면 신속히 결단한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머뭇거리면 실패를 합니다. 이런 사람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소돔 고모라성의 롯과 그의 식구들이 그런 사람들이고, 노아의 방주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고 신앙적 결단을 촉구한 모세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신약의 삽비라 부부가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저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22: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3) 축복의 기적을 체험함으로 성취하였습니다.
저들이 요단에서 나무를 베는 중에 도끼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여기 4절에 복수로 쓰인 나무는 가는 가지들이고, 5절에 나무는 들보 재목감인 큰 나무를 뜻합니다. 저들이 처음에 나뭇가지들을 벨 때는 괜찮았는데 큰 나무를 찍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 도끼는 문자적으로 말하면 <그 쇠가>라고 하므로 도끼자루는 손에 잡았고, 도끼 날이 물에 빠져 버린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도 선지 생도들은 엘리사에게 와서 외쳐 말하기를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 온 것입니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왕하 6:5)”. 그 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도끼가 빠진 장소를 물었습니다. 선지 생도들은 그 곳을 보였습니다. 엘리사가 나무 가지를 베어 물에 던졌습니다. 그 때 물 속에 빠져 버려, 그 정체마저 보이지 않던 도끼가 물에 떠올랐습니다(왕하 6:6).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그 도끼를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했다>(왕하 6:7)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문에 <떠오르게 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물에 빠져 버린 도끼가 스스로 떠올랐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이적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이적입니다. 선지 생도들을 위한 이적입니다. 아니, 거기 요단에 새로운 선지 학교를 짓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이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로 하여금 행하시게 한 열 가지 이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결과 저들은 요단강 둑에 또 하나의 선지학교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죄많은 죄악의 시대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타낸 은총의 표징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성전을 위해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하나님의 일에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같이하여 열심히 기도를 하십시다. 이 일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이기 때문에 주저하고 미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낼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 일에 열심을 내 주실 것입니다.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를 기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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