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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29)

by 【고동엽】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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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로새서 1:24~29)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간 사시는 동안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백성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마 4:23).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이 세상에서 하시던 일들을 교회의 몫으로 남겨놓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들이 계속되어지도록 그의 몸된 교회를 이 세상에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힘쓰셨던 그 사역에 성도들도 힘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려면 반드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죄의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만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복음전파와 구원사역을 교회에 남기셨으므로 교회는 많은 수고와 고난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큰사랑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받은 그 희생적인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왜 죽기까지 하셔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꼭 이렇게 하셔야만 하셨을까요?
또 성령충만한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수많은 교회를 세워나간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항상 눈동자같이 지켜주셔서, 아무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 그 일을 힘있게 사역을 해나갔으면 좋았겠는데, 왜 하필 가는 곳곳마다 심한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지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권능을 받아,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으며, 점치는 귀신이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아주었습니다(행 14:8~10, 16:16~18).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만 성령을 알지도 못하던 에베소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안수하는 순간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주의 말씀을 강론하며 전할 때에, 하나님은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떠나가고 악귀가 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행 19:1~12).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권능을 받아 천국복음을 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가는 곳곳마다 심한 핍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끌어내다 버리기도 했습니다(행 14:19).
빌립보에서는 여러 날 동안 바울을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굴던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이 일로 붙잡혀 옷이 찢기고 심하게 매를 맞은 후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행 16:22~23).
또 고린도후서 1:8~9에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이 끊어져서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1:23~27을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한없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도 바울에게 이처럼 많은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그가 복음을 전할 때에 나타난 성령의 큰 능력도 전혀 이 핍박을 피하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끝까지 계속해서 고난을 당하다가 마침내 순교로 일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고난 당하다가 그 고난 속에서 생을 마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문둥병을 고쳐주시며,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전지전능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이 땅에서 33년을 계시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셨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고난 당하시고 이 땅에서의 짧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예수님을 철저히 고난당하게 하셨는지 궁금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피하지 않고 그 고난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2.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위해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장차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고난이 없듯이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로마서 8:16~18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을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누구든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는 일을 하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9~30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자에게 금세에 100배의 복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핍박도 겸하여 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 때 그 충성의 대가로 금세에 백 배의 복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가 수고한 모든 것의 상은 이 세상에서 다 받고 모든 영광도 이 세상에서 다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가서 받을 상도 영광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자에게 금세에 백 배의 복만 주겠다고 약속하지 아니하시고 핍박도 겸하여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일찌기 이 비밀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살면서 백 배의 복을 받는 일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저 하루하루 복음을 전하며 살아갈 때에 당하게 되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현재의 고난이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롬 8:18).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다른 사도들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살다가 심하게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을 당했지만 오히려 기뻐했습니다(행 16:40~42).
그런데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한 성도들은 금세에 백 배의 복을 받을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기복신앙인이 되기 쉽습니다. 자연히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전도를 많이 하는 것도, 헌금을 많이 하는 것도 복을 받고 영광을 받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여 기적을 체험하고 큰복을 받은 사람의 간증을 듣기 좋아합니다. 복 받는 것에 관심이 많은 기복적인 신자와 달리 장성한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정해진 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많이 한 죄로 고발당하여 사자굴에 들어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마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당장, 이럴 수 있느냐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줄 알면서도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어 감옥에 있을 때에, 평소에 그를 시기질투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봐라, 너만 전도 많이 하냐? 우리도 잘한다.”, “네가 있어야만 교회가 부흥되는 줄 아느냐? 우리가 전도해도 얼마든지 부흥된다.”라고 하면서 바울을 괴롭히기 위해 더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 바울은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빌 1:18).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억울함을 당한다든지 마음이 아프든지 다른 사람의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어 미움을 받든지 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얻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과연 장성한 신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도 성전건축을 위해 보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금세에 받을 백 배의 복을 생각하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역대상 29:12~14을 보면,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자원하여 물질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평생 모은 재물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면서도 제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을 드리는 것 일뿐이라고 겸손해 하면서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그것을 몹시 기뻐했습니다.

믿음이 성숙한 성도들은 주님의 일로 인해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을 더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면 우리도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찬송 작사가 중에 프란시스 헤버걸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수도원 원장의 딸로 자라난 그녀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독일로 유학을 오면서 처음으로 고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들어 치료를 받던 그녀는 어느 날 뒤셀도르프라는 도시의 작은 화랑에 들어갔다가 그림 한 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의 <에게 호모­“이 사람을 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십자가에 달려 고난받는 그리스도를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아래 부분에 “내가 너를 위해서 내 생명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 글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녀는 이제껏 한 번도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림 아래에 쓰여 있던 글귀가 십자가상의 예수님과 겹쳐지면서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찬송시를 한편 적었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찬송가 185장)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 고난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혹은 교회의 일을 하다가, 봉사하다가 고난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줄 믿습니다.
오늘날 금세에 백 배의 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많아도 주님을 위해 고난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왜 교회가 부흥되지 않습니까? 왜 부산복음화가 더딥니까? 주님을 위해 고난받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장성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정필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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