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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한 그릇 (디모데후서 2:20~22)

by 【고동엽】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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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한 그릇  (디모데후서 2:20~22)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과 나무그릇과 질그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큰 집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교회에 있는 그릇입니다. 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값과 용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격과 용도는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값비싼 그릇이기 때문에 자주 쓰이거나 매일 쓰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릇의 그 가치는 용도에 있습니다. 그릇의 용도는 그 나름대로 절대적인 최고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휴지통은 고급으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휴지통에 금을 입힌다든지, 휴지통 뚜껑에 보석을 박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휴지통은 값비싸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용도에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휴지를 담는데 부족함이 없으면 휴지통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금그릇은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그릇을 사용하면 사용하는 사람이 매우 조심스럽고, 또 금그릇은 사용하면 오히려 가치가 감소됩니다. 그래서 금그릇은 그냥 진열해 놓고 보면 그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금그릇에는 보석을 박아서 장식을 하고, 관상용으로 진열해서 보면 그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릇은 용도가 중요합니다. 이 용도의 효력은 많이 쓰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그릇이 자주 쓰이는 그릇일수록 내 생활에 유용하고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번도 쓰지 않는 그릇은 내 생활에 유용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릇의 용도

그러므로 그릇은 용도에 맞도록 만들어져야 됩니다. 그릇의 기능중에 가장 일반적인 기능은 담는 것입니다. 그릇은 그 그릇 그대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을 담음으로써 그릇의 용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담을 수 없는 그릇은 용도의 기능을 잃어버립니다. 물건을 담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담는다는 것이 그릇의 그 가치를 밑바탕에 보장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집에서 쓰고 있는 밥그릇이나 항상 상용하는 질그릇이 그렇게 보여도 전부 다 500도 혹은 900도 더 고급은 1500도, 더 고급은 2000도 이상의 불에서 구워낸 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냥 가볍게 만들어진 그릇이 아닙니다. 아주 뜨거운 고열에서 견디고, 구워지고, 다듬어진 그릇입니다. 펄펄 끓는 국은 100도 이상입니다. 물이 섭씨 100도에서 끓기 때문에 펄펄 끓는 국은 100도 이상입니다. 국을 담는 그릇은 다 그 이상의 고열에서 만들어진 그릇이기 때문에 100도 이상의 국이 담겨도 녹지 않고, 금이 가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그릇이 90도에 구워진 그릇이라면, 100도가 넘는 국을 담으면 녹아내리고 깨어져 버립니다. 용도를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릇은 지어지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그릇이 되려면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고열에 구워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저 좋은 것을 담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담는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의 그릇이 지어지고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언제 보아도 마음이 아픈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울은 역사적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국을 건설하는 그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이라는 그릇이 축복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울이 왕이 된 후에 그의 그릇은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의 그릇은 흠집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사울이라는 그릇은 깨어져 파멸되고 맙니다. 애석한 그릇입니다.
여러분, 축복도 그릇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축복은 그릇입니다. 축복을 잘 간수하지 않으면 깨어집니다. 복이 깨어지면 더 큰 화를 불러옵니다. 우리 주변에 성공한 사람, 돈 번 사람, 인기 얻은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이 깨어지고, 그 인기가 깨어지고, 그들이 받은 복이 깨어져서 그들의 인생의 그릇이 몰락하는 사례들이 역사 속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복은 받았지만, 복을 감당하지 못하여 복 그릇이 깨어져서 저주의 그릇이 되고, 인생이 깨어지고, 가정이 깨어져서, 이웃이 깨어지고, 사회가 깨어지는 비극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축복을 받았으면 그릇으로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시련도 그릇입니다. 시련을 잘 감당하면, 우리를 좋은 그릇으로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담아도, 담아도 깨어지지 않는 연단된 그릇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쓰이는 그릇

본문 29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했습니다. 그릇이 깨어집니다. 있는 것이 다 깨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릇이 쓰여지는 요건을 잘 배우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그릇을 씁니까? 첫째, 깨끗한 그릇을 씁니다. 사람이 그릇을 사용할 때 비싸냐, 헐하냐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쓸 그릇의 속이 깨끗하냐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라야 쓰여질 수 있습니다.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쫓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릇은 물로 씻고 세제로 씻지만, 우리 인격의 그릇, 신앙의 그릇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의 세제로 씻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사들로 항상 우리 그릇이 깨끗하게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인격은 깨끗한 그릇으로 늘 단장되어야 주인이 쓰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해야 합니다. 내 스스로 그릇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할 때 쓰여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릇을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그 그릇이 필요한 일거리가 생길 때 그릇을 씁니다. ‘아! 이 일에는 이 그릇이 필요하다’라고 할 때 주인이 그 그릇을 씁니다. 또 그릇은 쓰는 때가 있습니다. 주인이 ‘아! 이때에 그릇을 쓰겠다’라고 주인의 정한 때가 와야 그 그릇이 쓰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릇은 주인이 쓰도록 합당하게 예비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1절 하반절에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릇은 계속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갑자기 쓰여 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어지는 그릇이라야 주인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가 그릇을 쓰려고 하는데,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그릇을 가끔 봅니다. 밥을 퍼야 되는데 주걱을 보니까 씻기지 않은 주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밥을 퍼야 할 때는 깨끗한 주걱이 손에 잡혀야 기분 좋게 밥을 푸는데, 이 주걱이 지저분해서 주걱을 씻게 되면 밥맛까지 다 씻어 나가는 것입니다. 왜 이 주걱을 안 씻어 놓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준비되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릇이 늘 관리가 되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풍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물체육학교에 오리하고, 독수리하고, 토끼하고, 거북이가 입학을 했습니다. 체육 코치가 오리를 보고는 너는 장대높이뛰기를 한 번 해 보라고 했습니다. 독수리 보고는 다리가 기니까 경보를, 토끼 보고는 몸이 날씬하니까 수영을, 거북이 보고는 단거리 선수를 한 번 해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르치고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틀렸습니다. 코치가 잘못되었습니다. 오리는 수영을 시켜야 됩니다. 토끼는 단거리 선수를 하라고 해야 합니다. 거북는 경보를 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기대 못해도 할 수는 있을 거다.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합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은혜를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 내가 재물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덜 가졌느냐? 그게 아닙니다. 합당하게 주님이 쓰시려고 하는 그 자리에 그릇이 있고,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그 시기에 쓰여지는 그릇으로 예비되기를 바랍니다. 있으면 무엇합니까? 지저분한 게 담겨 있어서 우리 주님이 쓸 수가 없는 그릇인데 어떻게 씁니까? ‘주여! 쓰시옵소서!’ 하고 예비되어 있는 그릇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일을 예비하십니다.

항상 쓰이는 그릇

하나님의 교회는 주님의 일거리가 매일 매일 생깁니다. 지난 날의 아직 못한 일도 계속 밀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합당한 그릇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여러 가지 그릇을 이야기 했습니다. 큰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다, 그리고 깨끗한 그릇이라야 한다, 주인이 쓰기에 합당해야 한다, 예비된 그릇이라야 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그릇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그릇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서 충성된 청지기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무슨 말입니까? 내가 너를 큰 그릇으로 쓰겠노라는 것입니다. 그릇은 커야 많이 담습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이 무한한 은혜를 감당하려면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릇이 커야 합니다. 그릇을 키우려면 큰 주인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 왕대가 되려면 왕대 밭에서 나야 됩니다. 주인을 큰 주인을 만나야 그 종도 큰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 누가 제일 큰 사람입니까? 이 우주에 누가 제일 큰 주인입니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큰 주인입니다. 그는 전지하십니다. 그는 전능하십니다. 그는 선하십니다. 그는 의로우십니다. 무한대의 큰 주인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큰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큰 주인을 섬기고 있는 큰 그릇입니다. 긍지를 가지십시오, 왜 우리 스스로가 그릇을 작게 만듭니까? 왜 우리 스스로가 우리 그릇을 깹니까? 왜 내가 자꾸 내 그릇에 흠집을 냅니까? 주인이 그렇게 큰 그릇으로 우리를 쓰고자 하는데 왜 우리는 자꾸 우리 그릇을 해치고 금이 가게 하고 더럽히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도토리가 열 번 굴러도 호박이 한 번 구르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큰 그릇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꿈을 가지기 바랍니다.
저는 인간적으로 하나도 자랑할 게 없습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벽촌중의 벽촌입니다. 문화시설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촌입니다. 읍내까지 나가려면 8km 거리인데 그 당시에 8km는 대단히 먼 길입니다. 그런 벽촌에서 자랐는데 면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시대는 아이들을 많이 낳던 시대이기 때문에 초등학교는 그때도 부흥을 했습니다. 매년 150명이 졸업을 했습니다. 6개면 단위에 중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6개면에서 졸업한 초등학생들이 그 중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졸업한 그 초등학교는 150명 가운데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가 10명 안팎 밖에 안 됩니다. 그만큼 가난한 벽촌이고, 교육이라는 것은 그 당시 부모님의 머릿속에는 전혀 의욕이 없는, 교육에 관한 인식도 없는 때입니다. 그 열 사람이 중학교에 가는 것은 우리 학생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저도 그 열 사람 속에 들어갔더라면 좋을 뻔 했는데 못 들어갔습니다. 거기 못 들어간 아이들은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가는 것을 배워야 되고,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의 실습을 해야 되는 때입니다. 그 때는 학원도 하나도 없습니다. 놀이할 것도 없습니다. 오락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농부가 하는 농사일을 안 하면 그저 산에 가서 나무하고, 그러니까 일찍이 막걸리 마시고 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코스를 안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작 동네에 서당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천자문 배우고, 한문 배우는 것 외에는 배울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환경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는데 상당히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한자를 1년을 배웠는데 그 당시에는 신문에 한자가 빽빽하게 나오던 시대입니다. 1년을 배웠는데, 그 한자를 읽어내는 실력을 제가 가졌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읽어 주는 일도 가끔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기본적으로 지능을 주신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청소년 시절 4년을 공부하지 못하고 흘러 보냈습니다. 부산에 계시는 제 외삼촌이 저의 소식을 듣고는 부산으로 불러 내려서 학원에 보냈습니다. 중학 영어, 중학 수학을 학원에 가서 공부했는데, 1년 만에 독파를 다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길을 뚫고 그렇게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16세 때에 교회를 처음 나갔는데, 술을 끊고 예수를 믿은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믿음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때부터 저를 인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훗날에야 깨달았습니다. 이 희망 없는 시골소년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니까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소나무가 화분에 심기면 아무리 좋은 거름을 주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분재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땅에 심기면 무한대의 에너지를 받고 큰 나무로 자라서 재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대의 에너지를 가지신 큰 주인입니다. 인간의 욕심들이 그 작은 화분처럼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양이 제한되어 있고, 화분에 심겨진 나무는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커도 분재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땅에 심겨진 나무는 위대한 재목으로 자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뿌리를 박고 몸부림을 칩니까? 여러분의 욕심이라는 화분을 깨트리세요. 무한대의 하나님의 그릇에다 여러분의 인생의 뿌리를 뻗어 내리기 바랍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만왕의 왕 되신 그 분 앞에 나아가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 믿음의 뿌리를 뻗어 내리고,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뻗어 내리고 그 큰 주인 앞에 우리가 붙잡혀서 크게 쓰여지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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