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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합하여. (롬6:1~11)
바울은 5: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이 말해 줍니다. 왜냐하면 큰 죄는 기억하기가 쉽고 구체적으로 회개하기가 쉽지만 작은 죄는 기억하기도 어렵고, 회개하기도 기억이 안 나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은혜 반대론자들이 이렇게 반박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는 죄를 더 지어야 한다고. 1절을 봅시다. 그 반박이 1절에 나옵니다.[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이것은 바울의 은혜의 원리를 반박하는 자들의 질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간단하게 말합니다.[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렇습니다. 죽으면 아무런 영향을 못 줍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죽은 김일성이가 지배하는 세계에 유래 없는 나라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면서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의로울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까? 그것은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이 세상에는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롬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전가 받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그리고 그런 성도는 의롭게 사는 것이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먼저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여 줍니다. 3절 이하는 세례를 예로 들어서 왜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음을 설명합니다.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지만 일단 죄에 대하여 죽은 뒤에는 죄는 우리를 지배할 권리도 없고 또 우리가 죄를 섬길 의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그것은 세례를 받을 때입니다. 세례란 주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내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는 순간에 과거의 나는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세례 받을 때에 우리가 문답을 하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외에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그러면서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다 세례를 한 번 밖에 안 받습니다. 육신도 한 번밖엔 안 죽듯이 영적으로도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예 화
논산훈련소에서 한 번에 4200명의 세례를 주었다. 이 때 세례를 다섯 번째 받는 군 세례자(야 이놈아 많이 받을수록 좋지 않냐하고).
우리가 잘 알듯이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일회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절에 [예수와 합하여], 오늘의 설교제목인 이 단어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예수님과 합하고 연결되고,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옛 사람,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장례식이 바로 세례식입니다. 우리가 장례식을 지내고 나서도 그 사람이 호적이 있다면, 살아있는 것처럼 의식을 행한다면 이것은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미친 짓을 지금 계속하고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전은 죄가 아닙니다. 주님이십니다.물론 세례식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실제적인 죄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지고 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를 받기 전에는 죄가 독재를 했습니다. 하는 일마다 죄였습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뒤부터는 나에게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선도 행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이것은 차이점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직도 죄를 짓고 있다면 이것은 내 의지입니다. 죄의 지배 때문이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단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기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지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밖에는.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례는 에수님과 십자가에서 죽는 장례식만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의 시작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습니까? 이제 중요한 것은 5절의 말씀입니다. 다 같이 한 음성으로 읽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우리는 옛사람은 죽고 지금 사는 것은 주님과 함께 부활한 새 사람입니다.그러므로 옛 사람의 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옛 사람의 습관도 청산해야 합니다.
예 화
목욕하고 나서 땀내 나는 헌옷을 입지 않는 것과 같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것은 마치 임금을 받지 않고 옛날의 직장에 다시 가서 계속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 직장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는 새 직장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아직도 옛날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정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입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7절은 지금의 우리의 신분을 말씀해줍니다. 크게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믿습니까? 그러면 다 같이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우리들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8절과 9절은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는 주님의 부활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부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나의 죄 됨을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고백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한 자입니다. 다 의인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첫째로 사망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9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2)둘째로 10-1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일, 즉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은 자의 삶의 자세입니다.
출처/신성종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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