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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멍에에서 해방되자 (갈라디아 5:1)

by 【고동엽】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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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멍에에서 해방되자   (갈라디아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序言>
1919년 3월 1일 정오에 있었던 3.1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역사학자들 200명에게 민족사에서 가장 위한 사건을 순서대로 몇가지 기록해 보라고 하니 98퍼센트가 1번에 삼일운동을 썼다고 합니다. 심지어 일본 학자들 가운데도 삼일운동 연구하는 사람이 수백명에 이릅니다. 삼일운동의 주역이었던 관순 누나가 욘사마 보다 났다는 것입니다.

삼일운동은 실패였습니다. 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궐기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물러난 것도 아니고 우리 나라가 독립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어떤 민족 저항운동보다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전 민족 참여도가 높았습니다. 인도의 간디 운동도 유명하지만 그 운동에는 브라만 계급이 참여하지 않았지만 삼일운동은 참여하지 않은 계급이 없는 운동이었습니다. 둘째, 비폭력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간디 운동을 능가한 비폭력 공명정대한 방법이었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보면, '우리는 일본의 잘못을 탓하려 하지 않노라'는 말이 있습니다. 셋째, 전국이 동시에 일어난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전화와 전보는 일본의 통제를 받았고  파발과 봉화도 접수되었고 철도와 우편도 장악되었고 보부상도 와해되었습니다.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함경북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일찍 일어난 동네와 늦게 일어난 동네가 1달 차이 밖에 나지 않습니다. 넷째, 나라와 민족에 대한 개념 전체가 바뀌었습니다. 삼일운동 전에는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일운동 전에는 임금들은 '짐의 나라'라고 했고 백성들은 '그의 나라' '그 분의 나라'라고 했고 나라를 위해 싸운 자들은 임군을 위해 싸웠습니다. 임금을 부모와 같이 여겨 임금에게 충성한 것이다. 그러나 삼일 운동 후에는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는 개념이 생겼고(주권제민), 백성들은 '우리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개념을 만든 운동이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렇게 획기적 전환점을 가진 운동이 없었습니다. 영국 권리청원이나 프랑스의 대혁명이나 미국의 독립전쟁 후에도 그와 같은 개념들이 만들어졌지만 이렇게 피지배국에서 명확한 근대성을 만들어 낸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本論>
    1. 기독교인은 독립운동의 주체였습니다.  

삼일운동에 기독교가 미친 영향을 지대합니다.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20%가 넘는다고 하지만 당시 기독교인이 전 국민 1.5%밖에 안되었습니다. 100명에 2명 꼴도 안 되는 때였습니다. 당시 만세 운동이 314곳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 68%가 기독교가 주도했습니다. 처음 집결 장소가 교회나 기독학교였고 주도하는 사람들이 장로와 목사와 기독교사와 기독학생이었습니다. 민족대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 목사와 장로였습니다. 독립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는데 종교인들 가운데 80%가 기독교인이었고 무종교인까지 합쳐서 47%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이 임포메이션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TV나 라디오를 가지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목사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듣고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윌슨 미국대통령, 윌슨이 말하는 민족자결주의 등을 듣고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자결주의는 한국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윌슨이 말하는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 전패국인 독일 중심한 나라의 식민지는 다 독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 영국, 일본은 전승국이었는데 전승국의 식민지는 독립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이 전승국 일본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듣고 우리 나라에 적용한 것입니다. 그 사상이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앞장서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기독교는 전국적으로 운동이 동시에 일어나게 하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보부상, 파발마, 봉화, 우편, 전보, 전화를 일제의 통제로 쓸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전보를 사용했는데 일제의 도청을 피하기 위해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라틴어를 해석할 줄 아는 천주교 신부들은 친일파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1.5% 기독교였습니다. 교회는 유일하게 전국적으로 공문을 보낼 수 있는 라인이 살아 있었습니다. 총회, 노회, 시찰, 당회의 조직이 살아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 공문은 일제와 선교사들간의 협의에 의해 검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남선이 만든 독립선언문이 교회 공문을 통해 각 면 단위까지 가게 되고 그 공문이 교회와 학교에서 등사하여 장 바닥에까지 뿌려진 것입니다. 교회가 독립운동의 혈맥 신경조직 역할을 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없었다면 삼일운동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삼일운동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운동은 그만큼 희생을 치루어야 합니다. 일본은 삼일운동을 조선 소요 사건으로 보고 재발방지를 위한 일벌백계 차원의 책임자 처단이 있었습니다. 한국국민은 불가불 보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다 그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삼일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가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제암리, 화수리의 집단 학살 사건은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기독교인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교회에 가두고 교회 불지르고 교회서 나오는 어린아이들을 정조준으로 사격했습니다. 헌병대는 예수 믿는다고만 하면 다 잡아들여 가두었습니다. 당시 안수집사 이상 교회 직분자 50%는 옥고를 치르거나 죽었습니다. 일반 신도도 30%가 감옥 들어가거나 죽었습니다. 기독교인만 28,000명 옥고를 치르거나 죽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민족의 희생 고통을 대신 진 것입니다.  

    2. 우리는 영적인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다고 죽이는 일제와 같은 대상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압제하여 고통받게 하는 주체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단입니다. 악령인 사단과 마귀와 귀신들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잡아 삼키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령의 역사로 인하여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삶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5:8-9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여 악령을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둘째는 죄성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 죄성이 우리를 우리 안에서 세력으로 존재하여 끊임없이 원치 않은 길로 가게 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합니다. 이 죄성을 죄악성 부패성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육체의 정욕' 육체의 소욕'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육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립니다. 갈라디아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영혼을 거스려 싸웁니다. 베드로전서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이 하나님의 법을 행하려는 자기를 이기고 죄 가운데로 끌고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로마서7:19-20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롬7:24).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죄성과 더불어 싸워 이겨야 합니다.

셋째는 성처입니다. 자주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는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여 끊임없이 일어나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실패하게 합니다. 우리의 세계관에 셀로판지 역할을 하여 모든 것을 잘못 보게 하고 잘못 판단하게 합니다. 관계성에서 담 역할을 하여 스스로 고립되게 합니다. 마침내 자존감을 송두리채 빼앗아 갑니다. 분노와 자책과 열등감과 우울과 중독과 자포자기에 이르게 합니다. 그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 내면에 행동을 주관하는 세력으로 자리를 틀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옳지 않은 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세력과 이 세력에 의해 굳어진 싸이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結言>
우리의 삶을 압제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실패하게 하는 대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악령으로부터 죄성으로부터 상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자유해야 합니다. 본문 말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갈5:1). 하나님이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고 그가 보내 주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5:16에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출처/차용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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