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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사무엘하 3장 6-21절)
무혈혁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법적인 정권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몰아내고 새 정부를 세우게 되었을 때 쓰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영국의 청교도 혁명 이후에 또 다시 영국을 가톨릭 신앙 중심의 전제정치로 되돌리려 했던 왕을 폐위시키고 소위 '권리장전'을 통하여 입헌군주정을 수립시켰던 '명예혁명'이 있습니다.
근대에 와서 쿠데타를 통하여 군사정권을 수립한 후에 스스로 '무혈혁명'이라고 자찬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만약 사람 죽은 일이 없다면 '무혈'은 맞겠지만 '혁명'은 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군대를 동원해서 정권을 장악했으니 분명히 쿠데타였고, 그러니만큼 정 '무혈'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그저 '무혈 쿠데타'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인 것입니다.
진짜 무혈혁명이라 할 만한 사건이 바로 본문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모신 남쪽의 유다 지파와 사울의 잔당들이 모인 나머지 북조의 지파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처럼 한 나라 안에 두 정권이 공존하던 상태가 드디어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즉 북조의 나머지 지파들이 다윗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흡수통일되어 들어오게 됩니다.
다윗으로서는 그야말로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남북통일에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본문 1절에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말씀하는 대로, 다윗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걸지 않고 그저 가만히 인내하며 기다리던 동안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북조 지파들은 어떻게 스스로 와해되어 다윗의 통치하에 복속되게 되었습니까?
분명히 북쪽 지파들이 수적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게 훨씬 더 많았고 사울 왕가라는 정통성도 내세울 수 있는 쪽이었는데 왜 그처럼 제풀에 넘어지게 되었던 것이며, 단일 지파에 불과했던 유다 지파의 다윗 정권이 전 이스라엘 땅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 대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주신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지도자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권위로써 치리(治理)하는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됩니다.
본문 6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6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7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을 통간하였느냐 8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9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11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대답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북쪽의 사울 왕가의 잔존세력은 합법적인 리더십의 부재로 인하여 이미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고 했습니다.
남북 정권 사이에 냉전이 계속되고 있던 참에 다윗의 집은 절로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더 약하여졌다고 아까 1절에서 밝혀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울의 세력이 점점 더 약해진' 것은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은' 것과 비례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넬이 강하여지면 북조의 사울 왕권이 강하여져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정반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2장에서 보았듯이 북조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군대장관 아브넬이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5년 반 동안이나 군사독재 정치를 하다가 대외적으로 정통성이 인정이 되지 않으니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여전히 섭정 같은 위치에서 또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은 문자 그대로 허수아비 왕으로 옹위되어 겨우 2년 정도 왕 노릇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서로의 이해타산만 가지고 형성된 군신관계마저 깨어지는 사건이 갑자기 터지게 됩니다.
바로 아브넬이 사울 왕의 첩이었던 "리스바"란 여인을 차지해 버린 일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첩은 왕의 재산이나 마찬가지였고, 다음 왕이 이어서 차지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 자기 아버지 다윗의 첩들을 백주에 왕궁 옥상에서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취한 것도 이제 왕권이 자기 손에 들어왔음을 과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와 동침한 것은 스스로 왕처럼 행동한 것과 다름없으며, 윤리적 죄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사실상 반역 행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난 이년 동안 별소리 하지 않고 그저 아브넬 하자는 대로만 따라왔던 이스보셋도 이것만큼은 도무지 참을 수 없어서 "네가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했느냐"하고 처음으로 아브넬에게 한 마디 싫은 소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의 그 말 한 마디에 아브넬은 당장 심보가 틀어지게 됩니다.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요"라는 말에서 '대강이'라는 말은 '대가리'라는 속어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이것은 '내가 다윗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개대가리 같은 사람이냐?'라는 말로서, '나는 다윗의 유다 쪽에 붙지 않고 끝까지 당신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 아니냐?'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 딴에는 사울 왕가를 충성스럽게 섬겨 주고 있는데 그 공은 몰라주고, 그까짓 여자 하나 취했다고 그렇게 섭섭한 소리 하느냐 하면서 자기가 지금 주군이라고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대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이 지금까지 이스보셋을 모신 실제 동기는 결코 사울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해타산 때문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겨우 그 이스보셋의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형식적인 충성'까지도 다 팽개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제 당장 다윗에게 모든 정권을 넘겨주겠다고 맹세까지 했던 것입니다.
아브넬이 이처럼 뻔뻔스럽고 불순하게 나오는 데도 이스보셋은 자기 왕권을 빼앗아 남에게 주겠다는 소리를 바로 자기 면전에 대고 하는 자기 부하 장군에게도 단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얼굴이 벌개졌을 이스보셋을 버려두고 아브넬은 당장 정권 이양 교섭을 다윗을 상대로 벌이기 시작합니다.
12절 이하 16절까지의 말씀에 "12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 13다윗이 가로되 좋다 내가 너와 언약하려니와 내가 네게 한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 올 때에 위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고 14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되 내 처 미갈을 내게로 돌리라 저는 내가 전에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정혼한 자니라 15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16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브넬은 오늘날로 치자면 일종의 합당 공작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라는 아브넬의 말은 '이 나라의 왕권이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 역시 어차피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대세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겠다."라고, 마치 자기가 다윗에게 큰 공로나 베풀어 주는 것처럼 생색을 내었던 것입니다.
"나로 언약하사이다"라는 말도 자기와 정치적 협상을 맺자는 뜻으로서 '내 공로를 생각해서 합당 이후에 내게 그 어떤 정치적 보복을 하지 말고 잘 대접해 주십시오.'라는 뜻이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상황에서 호박이 넝쿨 째 굴러 들어오게 된 다윗은, 한 가지 조건만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옛날 자기가 왕궁에서 도망친 후에 사울 왕이 다른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보내어 버렸던 아내 미갈을 자기에게로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요청한 이유는, 사울이 자기 생명을 노릴 때 자기를 살려 주었던 그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던 까닭이었으며, 또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울의 사위 집안까지 완전히 깨어지고 그 대신 자신은 사울 왕의 사위였음을 재확인시킴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합당 내지는 왕국 통일 작업에 정작 이스보셋은 무슨 발언 한 마디는커녕 얼굴도 내밀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국사에 대한 발언은 고사하고 자기 아버지 명예 지키는 말 한 마디도 전혀 통하지 않는 자리를 왕위라고 앉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허수아비 왕이 앉아 있고 아브넬 같은 자기 불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가 약해지고 망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요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그와 같은 '영적 쿠데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목사는 허수아비가 되고 장로들이 실권을 잡는 교회입니다.
참 죄송한 표현이지만 별난 장로들이 정말 많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목사 청빙을 자기네들이 하니까 마치 자기네들이 '고용주'나 되는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목사 사례를 자기네들이 책정한다고 해서 자기네들이 마치 '사장'이나 '회장' 쯤 되는 줄로 착각하는 장로들이 이 서울 장안에만 해도 수두룩합니다.
저는 당회 석상에서 목사에게 말을 놓는 장로까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정말인지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장로들이 젊은 목사를 선호하는 이유를 두고 교회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고 시대에 맞는 신선한 분위기로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라고 말은 좋게들 하지만, 실상은 나이든 목사보다 훨씬 쉽게 자기네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는 장로들이 꽤 많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 청빙을 할 때 상회와 상관없이 지교회 자체의 청빙위원회에서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보통 월권이 아닙니다.
적어도 장로교회라면 어디까지나 노회를 통하여 목사 청빙을 추천받고 진행시켜야 합니다.
요즘 이름만은 장로교, 그래서 장로라는 직분은 차지하고 당회라는 조직은 만들어 놓았지만, 교회정치는 침례교식으로 아무나 제멋대로 하는 식의 짬뽕 장로교들이 장로교를 다 망치고 있습니다.
그냥 전국에다 청빙 광고를 내고 자기네 마음에 맞는다 싶은 사람을 일단 교회에서 청빙해 놓고 나중에 그 목사를 교단에 가입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교단은 절로 더욱 '짬뽕'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교회는 목사가 아무리 옳은 소리 하고 좋은 설교한다 해도 그 말에 도무지 권위가 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기를 당회장 자리에 앉혀 준' 장로들 앞에서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옳은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하고, 그저 예배나 인도하고 당회석상에서는 조용히 자기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허수아비 목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도 그 모양이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데 교회라고 그런 꼴로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교회는 어찌하든지 목사의 영적 권위가 존중되어지고 그 말씀 선포에 지도자로서의 힘이 실려야만 제대로 세워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부여해 주신 영권과 지도권을 중심으로 교회의 기반을 더욱 든든히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교회가 결국 크게 부흥하게 됩니다.
17절부터 21절에 "17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러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 18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9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히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고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20아브넬이 종자 이십인으로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21아브넬이 다윗에게 고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하게 하고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저가 평안히 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윗 왕과 더불어 남북 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사전교섭을 끝낸 아브넬은 이제 북쪽 지파들을 설득하는 장면에서 "너희가 여러 번 다윗으로 너희 임금 삼기를 구하였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넬에게 있어서 그들을 설득이라고 할 일은 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넬의 결심이 있기 훨씬 전부터 벌써 민심의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넬도 그런 백성들의 마음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저 무력으로 억누르고 있다가, 이제 와서는 마치 자기가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한술 더 떠서 말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의 왕권을 예정하시고 선포해 놓으셨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모든 대세의 조류를 조성해 놓고 계셨던 것인데, 아브넬은 그 하나님 말씀과 뜻을 인용하는 것까지도 자기 입장 세우는 데에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그런 식으로 이제 "베냐민 사람의 집"들까지 설득을 시켰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혈통적으로 가장 사울 왕가에 가까웠고 따라서 가장 사울 왕가에 충성스러울 수밖에 없는 지파였지만 이제 다윗은 이들까지 손댈 필요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북쪽의 다른 모든 지파들이 오래 전부터 다윗을 지지해 왔고 이제 아브넬까지 돌아선 마당에 이 베냐민 지파 역시 자연히 대세의 조류에 딸려 올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북쪽의 사울 왕가의 잔존 세력은 지금까지 절대다수의 민심을 거스르면서 그저 무력으로써 불법적인 권력을 유지해 왔던 까닭에 한 군데만 금이 가도 자연히 당장 터지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7년 반 동안 다윗이 북쪽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에게 그 어떤 압력을 주거나 위협을 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그렇게 모으시고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민심은 아브넬 같은 권모술수의 대가요 군부 통수권과 경찰 지휘권과 외교권 등 모든 권력을 한 손에 다 쥐고 있던 독재자조차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끌어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남쪽 유다 지파의 장로들과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하여 누구를 기름 부어 세우셨는지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뜻대로 순종하여 다윗을 자기 지파의 왕으로 제일 먼저 세웠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무력시위를 동원해서 왕이 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유다 지파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새 이스라엘을 세우려 했으며, 그래서 그 한 지파에 불과했던 유다가 결국에 가서는 북쪽의 절대다수의 나머지 지파들을 다 흡수통일하게 되었으며, 그 유다 지파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세운 다윗 왕이 '이스라엘 땅 전체'를 다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목사의 영권과 리더십을 따라 운영된다고 하는 것이 결코 목사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처럼 자신의 직분에 따른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것인 줄을 자각하고 있는 목사일수록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겸손한 자세를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인들의 신앙양심을 극히 존중하게 됩니다.
목사의 권위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소중한 양떼들을 잘 돌보라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목자적 영권임을 깨닫고 있다면 어떻게 그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압제하거나 마음대로 잡아먹는 삯군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원로목사님께서 제게 자주 하시는 말씀 중에 하나가 "교인들 정말 무섭다."라는 말씀입니다.
목사는 정말이지 교인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인들은 얌전히 있는 것 같아도 목사의 진실성 여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장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속속들이 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분자 피택 투표를 해 보면 교인들이 얼마나 평소에 잘 보고 잘 알고 있는지가 무서울 정도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후보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그 사람의 평소 신앙과 생활이 너무나 정확하게 그 득표 숫자에 반영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고백을 진심으로 한 교인의 양심적 판단이라는 것은 정말 함부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목사와 장로야말로 교인들의 신앙 양심을 그 누구보다도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청지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냥 '다수를 존종한다.'는 말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말입니다.
중우정치(衆愚政治)란 말은 민주주의의 최대의 약점을 잘 지적하는 것이며, 교회 역시 '성경중심'이라는 표어 대신에 '민주주의'를 더 내세울 때에는 영락없이 중우정치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교인의 양심이라는 것은 여전히 타락한 본성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없는 교인들의 다수결이라는 것인 여지없이 '사공이 많은 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혁주의 기독신자들이 '민주적인 교회 운영'이란 말을 쓸 때에는, 어디까지나 일단 성경의 가르치는 말씀대로 판단할 줄 아는 성도들의 신앙양심이 전제가 되어야 하며 그 후에 그처럼 진짜 중생 받은 교인들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온 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마음을 모으려 하는 교회와,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소위 '민주적 권리'만을 너도나도 주장하는 교회, 이 둘 중에 어떤 교회가 잘 되고 부흥하게 될지는 대답할 필요조차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인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그 자신의 양심이 정말 '예수 십자가 구속을 믿는' 마음, 진짜로 중생 받은 마음인지부터 먼저 스스로 돌이켜 보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보다는 우리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처럼 중생 받은 성도들 전체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떤 방향으로 함께 이끌어 가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그 영적 주류에 편승할 줄 아는 성도들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장로교의 '세례서약' 제4문에 보면 "나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도록 힘쓸 것"을 서약합니다.
모든 장로교회의 세례교인들은 하나님 앞과 거룩한 공회 앞에서 바로 이 서약을 맺은 후에 교회의 정식 일원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게 됨'을 고백하고 '보이신 본대로 거룩하게 살 것'을 서약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이제부터 교회중심으로 살겠습니다.'라는 약속 역시 참된 신자에게 꼭 같이 요긴하고 뜻 깊은 서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질서'가 잡히지 않으면 '교회의 화평' 역시 이루어질 길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영적 권위와 리더십이 바로 세워져 있지 않는 교회에는 사람의 욕심이나 허영이 날뛸 수밖에 없으며, 성도들의 신앙양심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모아지지 않는 교회는 자연히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의 땅이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교회는 누구의 교회인가?' - 당연히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켜 나가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상왕국'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권위로 다스려져야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되어야 마땅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정당한 권위가 없는 사울의 왕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백성들이 무시당하는 쪽은, 아무리 수가 많고 우세해 보여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점점 더 약하게 만드시고 종내 무너뜨리고 마신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시 만약 사람의 논리와 사람의 욕심이 앞서는 교회가 되면 자연히 그 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목사의 훈도권과 당회의 치리권을 중심으로 인도를 받으며 또한 자신의 신앙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고 함께 순종하는 교인이 됨으로써, 결코 흔들리지 않고 점점 더 강하여지며 결국 '이 땅을 전부 차지하는' 교회의 미래의 큰 축복을 같이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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