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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사귐을 믿습니다 (본문 행2:42-47)
지난 주에 교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성도의 사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사귐은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보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선포, 교제, 봉사입니다. 성도의 사귐은 두 번째 교제에 속합니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독립적이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공동체와 다른 점은 이 세 가지가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인간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거룩함에, 그리스도의 은총에, 성령의 은사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공동체들은 인간이 고안해낸 어떤 사회적 이념,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념, 학연, 지연으로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더 분열, 갈등, 계층간의 적대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인간적 관계를 넘어섭니다. 성도의 사귐은 '수직적'인 것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해 요인도 극복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러한 교제를 보게됩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몇 가지 특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전에 모여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 했습니다.
이상에 열거한 내용들이 모두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약 교제가 없었다면 이러한 일들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표적, 물건의 통용, 소유의 분배, 떡을 뗌, 하나님 찬양은 외적으로 드러난 교제의 표현들입니다.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은 성도들의 교제에 있습니다.
수잔 데 디트리히 여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의 교제로써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여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을 이 세상이 믿게 할 만한 공동체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이 압제 당하는 세상 구조를 구할 만한 산 위에 세운 성이 되어 있는가? 우리도 예수처럼 '이 세상 속에서' 고통을 분담하며 짐을 져주는 일을 하고 있는가?
다른 한편,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이 세상에서 성별되어 '이 세상 것이 아닌' 그런 사람들인가? 직장생활, 정치생활, 성공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며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구속받은 공동체인가? 우리의 삶의 표준은 그리스도적인가?, 아니면 이 세상적인가?"
그러면 성도의 교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함'이란 뜻인데 이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르다는 것은 관련을 맺고 사는데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관련을 맺는 것이 곧 성도의 교제입니다. 그 교제는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는 다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시간과 죽음을 넘어서는 교제'요, 현실의 역사에서 '연대적인 형제관계'입니다.
폴 투르니어 박사는 그의 책 "고독으로부터 도피"에서 오늘 현대인의 삶을 대표하는 고독한 한 여성의 삶을 소개 합니다. 스위스 제네바 국제 복지기관에 비서로 일하는 한 외국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라디오에서 그 날 하루 방송을 마감하는 아나운서의 마지막 인사말, "오늘 밤이 당신에게 행복한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듣고 잠이 들곤 합니다.
그는 이 복지기관에 와서 근무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그의 상사를 비롯해서, 그 사무실에 찾아오는 어느 누구하나, 그에게 따뜻한 인간적인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많은 사람을 대하지만 하루 생활 중 인간적인 대화는 그 날 라디오 방송 종료 시간에 듣곤 하는 아나운서의 인사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사무실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많은 말을 듣고 살지만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의 고독은 더욱더 깊어만 갔습니다.
투르니어 박사는 현대인의 이러한 정신적 고통의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 잘못된 정신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의회주의 정신, 독립의 정신, 소유의 정신, 요구의 정신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이러한 병든 정신을 극복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혁명입니다.
먼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는 성도의 교제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성도들과 교제입니다. 이 교제는 그들의 혼과 영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히12:1)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 가운데서 이미 영원의 시간 가운데 들어가 있는 많은 증인들을 회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이 살아간 삶의 모범을 받아드리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의 영성생활에서 그들이 닦아놓은 영성의 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데 좋은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예언자들, 사도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성서의 인물들이지만 언제나 현재 살아있는 사람 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가운데 현존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 킴퍼스, 성 프랜치스코, 마틴 루터, 존 칼빈, 요한 웨슬레 같은 성인, 개혁자들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다음으로 현재 살아있는 성도들과 종족, 문화,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해서 갖는 교제입니다. 유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머리 둘을 가진 어린아이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는 둘인데 몸은 하나입니다. 그 아이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아이를 한 아이로 보아야 하는가? 둘로 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때 한 지혜로운 랍비가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뜨거운 물을 주전자에 넣어 한쪽 아이 머리위에 부었을 때 동시에 다른 아이도 울면 하나고, 그렇지 않고 한쪽 아이가 울지않고 웃으면 그때는 둘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 어느 곳에 있는 유대인이 고통을 당하면 다른 곳에 있는 유대인들 역시 고통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개 교회의 범주를 넘어서서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 자매들로서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때문에 서로 흩어져 있지만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의 기도로 영적 교통을 갖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의 연대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때와 관련해서 말씀하신 비유 가운데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서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때 의인들에게 예수께서 자신이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했고, 헐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의인들이 언제 자신들이 그렇게 하였느냐? 고 물었을 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마 25:31∼46)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교제에 포함됩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라우렌티우스의 전설을 소개하겠습니다.
"라우렌티우스(Laurentius)는 초대교회 집사로서 로마에서 빈민을 구호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종사했습니다. 258년 기독교 박해 때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하늘의 보화를 관리한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황제는 그 보화들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돌아가서 그가 돌보아준 사람들 중에 병인들, 불구자들, 마비된 자들, 절룩거리는 사람들, 간질병 환자들, 나병인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그들과 황제 앞에 나아갔습니다. 황제께서 탐내는 황금은 수많은 범행의 원인입니다. 그 빛은 사람들을 속입니다.
진짜의 보화는 세계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황제의 눈에는 이들이 비참함 무리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빛의 자녀들이고, 교회의 보화이고, 교회의 금, 진주, 보석입니다. 황제는 라루렌티우스를 쇠격자에 묶어 숯불로 천천히 구워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서 고통을 거두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도의 교제의 방향을 지시합니다. 성도들의 공동생활이 어떤 현실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시사합니다. 기독교인의 연대적인 형제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이야기에 분명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로흐만 교수는,
"초대교회는 서로를 위해, 모두를 위해 살고 존재한다. 거기에는 모두를 위한, 즉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자리가 있다. 이 형제적인 공동체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한 공동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가 있는 가난한 자들, 실패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차별 대우를 받은 자들에게 구속력을 지닌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서 이들은 교회의 보화들이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되어 가는 교제에는 하나님과 교제가 포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와 교제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이 교제는 이 현실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교제입니다.
시인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한가지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서 영원으로 인도하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9)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미 영원 가운데 있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성도의 사귐의 약속의 현실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장소가 성만찬입니다. 이 성만찬에는 성도의 사귐의 신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1) 이 성만찬은 거룩함에 참여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운명, 성령의 사건에 참여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2) 이 성만찬에서 우리는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도 함께 참여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3) 이 성만찬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사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서 사랑의 책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현실 교회에서 믿음의 신비인 온전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이 성도의 교제에서 새로운 희망의 삶을 내다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의 해답에 대한 제시를 받게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온전한 교제의 삶을 희망 가운데서 기다리게 됩니다.
수잔 데 디트리히 여사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가 단절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엄연한 사실이다. 권력을 갖기 위한 몸부림과 자기 주장의 요구는 가정과 직장, 정치, 경제 사회에서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현대사회는 고통과 싸움, 그리고 패망과 죽음의 신호 아래 서 있다. 이 모든 것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의 처음 몇 장에서 그 해답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해답의 일부'라고 말하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승리를 전할 해답은 신약성서에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신약성서에 주어진 해답의 일부가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그러한 고백에는 바로 그러한 교제에 우리의 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오늘의 인간 소외 현상은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컴퓨터의 발달은 또 하나의 획기적인 생활혁명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 반면에 우리를 더욱더 소외의 늪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시대의 날로 증가하는 가정붕괴, 가정의 역기능 현상은 인간생활에 가장 필요한 사귐의 능력을 상실해 가게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출처/임영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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