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심감을 가지라 (요한일서 4:18)
<本文>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序言>
지금 청년들이 하는 드라마를 보았듯이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자신감을 잃고 살아갑니다. 때론 우울과 탈진과 자포자기 상태에 들어가며 원망과 분노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 아닙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本論>
1. 열등의식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언약적으로 보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성적으로보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형 에서와 경쟁 관계에서 자랐습니다. 항상 형보다 못하다는 열등의식으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형 에서에게 재산을 물려주려 하자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샀습니다. 아버지가 나이 많아 눈이 안보일 때 형 에서에게 축복해주려 하자 형 에서로 변장하고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으려 했습니다. 에서가 털이 많으므로 짐승 가죽을 손에 씌우고 아버지에게 가서 에서라고 속였습니다. 그리고 형이 무서워 하란에서 밧단아람에 있는 외가집 도망했습니다. 외가집에서 20여년 동안 살다가 거기서 얻은 아내 둘을 데리고 도망하여 고향 하란으로 향했습니다. 얍복강에 이르렀을 때 형 에서가 4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는 말을 듣고 식솔들을 세 떼로 나누어 먼저 보내고 자기는 밤새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가운데 살려 달라고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시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고야 응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형 에서로 속이고 축복을 받으려 할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도망하면서 외삼촌이 받아들일지 얼마나 염려했겠습니까? 외삼촌 라반을 배반하고 도망해 나올 때, 라반의 추격이 있을 때, 라반에게 붙잡혔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얍복강에서 형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고 할 때 얼마나 두려웠으면 식솔들을 세 떼로 먼저 보내면서 명하기를 에서를 만나면 모든 짐승을 주면서 야곱이 선물로 먼저 보낸 것이라고 하라고 했겠습니까? 그런 세월을 보냈기에 애굽에 갔을 때 바로왕이 나이를 묻자"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창47:9). 열등감을 가지게 되면 피곤하고 우울하고 초조하고 고급하고 두렵게 됩니다.
자살하는 학생들을 보면 학생들 반에서 꼴찌에 가까운 아이보다 1~2등 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어른들도 말단 직원보다 이사나 사장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많습니다. 그것은 심리적인 요인 때문입니다. 열심히 해서 성취욕을 어느 정도 맛보지만 그 순간은 잠깐이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보이고 많이 보인 만큼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감이 드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원망과 분노만 가득하게 됩니다. 열등감으로 살면 평생 피곤하고 불행합니다. 좀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있는 대로 사십시오. 그것이 행복입니다.
2. 대립과 고립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에서 편애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집착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형 것을 빼앗아서라도 형보다 나아지려고 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에게 갈 재산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으로 안 되자 아버지를 속이고 재산 상속을 받게 됩니다. 그로 인해 형과 원수지간이 됩니다. 형 에서와 대립관계에 있었습니다. 외삼촌댁에 가서도 라반과 대립되었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과 벽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비틀즈의 '렛잇비'(Let it b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후렴 부분에 '렛잇비, 렛잇비'는 우리말로 '내비둬, 내비둬' 같습니다. 노래 가사는 대충 이렇습니다.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마더 메리가 말했지 '그냥 놔둬라' 어둠 속에 헤매고 있을 때도 말했지 '그냥 놔둬라' 상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냥 놔둬라' 헤어진다고 헤어지는 게 아냐 또 만나게 된다 '그냥 놔둬라' "
신앙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롬3:10). 그렇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그대로 두든지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죄는 하나님이 원하는 반응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바입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정죄하면 자기 마음이 좁아지고 관계가 단절됩니다. 사람과 관계가 단절되어 고립되면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행복한 사람일수록 사람들과 관계가 좋고 다른 사람과 관계가 좋은 사람은 잘못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될 수있는 대로 지적하지 말고 그대로 두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 잘못에 대해 집착력을 보이지 마십시오.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3. 가식과 위선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동생으로 내신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형 에서의 것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야곱 자신으로 살려 하지 않고 에서로 살려고 한 것입니다. 로마서9:13절에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언약적 해석으로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학적 해석 가운데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야곱으로 살아갈 때 사랑하시지 야곱이 에서로 살아갈 때 미워하신다" 그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야곱이 남으로 살아가지 않고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떤 동물원이든지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동물은 원숭이나 고릴라 같은 유인원류입니다. 그래서 동물원은 유인원류가 없으면 수익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동물원에서 고릴라가 죽었습니다. 고심하던 동물원장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고릴라 가죽을 벗겨 사람에게 입혀서 고릴라 흉내를 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할 사람을 뽑아 고릴라 가죽을 입혀서 고릴라 우리 안으로 들여 보냈습니다. 고릴라 가죽을 입은 사람은 그 안에서 으르렁대기만 해도 될 것을 어찌나 직업 의식이 투철했든지 바나나를 먹기도 하고 그네를 타기도 하면서 진짜 고릴라 흉내를 냈습니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환호를 하자 뜨거운 반응에 고무되어 공중 그네타기, 연속 덤블링 등의 묘기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옆에 있는 사자 우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기겁을 한 그가 고릴라 가죽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사람 살려!" 소리쳤습니다. 그 순간 사자가 다가와 그의 입을 가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입 다물어 임마 요즘처럼 취직하기 힘든 때에 두 사람 다 일자리 잃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결국 그 사자도 가짜였던 것입니다.
가면을 쓴 사람이 가면을 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쓰는 가면, 학교에서 쓰는 가면, 직장에서 쓰는 가면, 교회에서 쓰는 가면이 다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면 의식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오래될 수록 가면을 쓰는데 더 능숙해지고 연기를 하는데 더 능숙해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들키지 않고 연기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신앙의 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나면 피곤하다고 합니다. 가식으로 자기를 감추는데 열중했으니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평생 피곤합니다.
가식으로 살지 마십시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살지 마십시오. 남에 의해 살지 마십시오. 남으로 살아가지 마십시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시옵소서" 찬송가도 있지 않습니까 (349장).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나아가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평안과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結言>
자신감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에 생깁니다. 본문 요한일서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물러가게 하고 고립감을 희석시키고 가식됨을 벗어 버리고 자유와 평안과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야외로 소풍을 나간 아빠와 엄마와 아이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빠 엄마 손을 잡고 빙그르 돌면서 비행기 놀이를 하는 아이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칩니다. 아빠와 엄마의 손을 놓은 다음에도 꽃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날아오르는 나비를 따라 뜁니다. 아빠와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는 아이는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러나 아빠와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하는 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어도 안심하지 못해 아름다운 꽃에게 시선을 주지 않습니다. 나비가 날아도 안중에 없습니다. 가서 좀 놀아라고 해도 엄마의 치맛단을 붙잡고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력만 보입니다.
이사야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고, 49:16에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고 했습니다. 로마서8:30-31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고 했고 32에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고, 26-27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고, 28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출처/차용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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