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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흥을 사모하라 (행2:37-42)

by 【고동엽】 2022. 9. 28.

다시 부흥을 사모하라  (행2:37-42)

오늘 우리교회는 성전건축을 앞두고 비로소 상암동 임시예배처소에서 주일 낮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신앙의 태도를 새롭게 하고 새 시대의 주인공답게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임시예배처소이지만 이곳에서도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일하십니다. 소원이 있는 사람에게 일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부흥을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2007년 한국교회와 사회의 키워드는 ‘부흥’입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지난 10년간 쇠퇴를 경험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7,80년대 질풍노도와 같았던 성장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 한국교회가 유럽과 같은 ‘박물관 교회’로 변할 것인지 아니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흥의 물결을 맞이 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한 세미나가 홍수처럼 넘치지만 세미나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교인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프로그램은 많아지는데 자기를 드릴 줄 아는 십자가의 군병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불신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새 정치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이 말입니다.
이런 가운데 2007년은 각 교단은 물론 교회마다 부흥을 외치고 있습니다.
1. 부흥이 일어날 때 공통된 상황
신학자들은 부흥이 올 때 일반적으로 공통된 상황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교회가 부패하여 어둡고 죽어 있을 때, 사람들이 상심하고 소망을 잃었을 때, 교회가 분열되고 혼란할 때에 부흥이 온다고 말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에는 위기 상황 곧 전쟁, 가뭄, 질병, 정신적 공황과 종교적 타락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근거로 볼 때 이 시대는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라는 희망을 가져야 할 때인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뜨거운 기도, 복음에 대한 단순한 갈망, 가난한 마음, 죄의 고백과 같은 전조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진정한 부흥의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까?
황무한 이 땅에 부흥의 단비를 내리게 하려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강하게 임하도록 목마르게 사모해야 합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철저히 마음을 찢고 회개할 때 부흥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2. 부흥은 구체적인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본문 3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들에게 “찔림”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증거는 찔림이 있습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이런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못한 찔림, 헌신하지 못한 찔림. . .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가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찔림이 없다는 것은 회개가 없다는 것이고 불평, 불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내가 받을 것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이 마음에는 은혜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고마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1907년 대부흥운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하디 선교사의 회개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8월 선교사와 일부 한국인이 참여한 연합 기도회에서,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1903년 원산에서 열린 연합 기도회 모임에서 자신이 강원도 일대에서 3년간 사역했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자신의 무능을 털어놓으며, 선교사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인종적 우월감, 한국인을 미개하고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한 교만, 성령의 도우심보다 자기 실력에 대한 과신을 참회한 것입니다. 한 선교사의 진심어린 회개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전염병처럼 다른 이들의 회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시의 회개는 바보스러울 만큼 철저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하디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던 윤승근은 전도하다가 빼돌린 돈이 7달러(7,000원)에 달한다고 고백하고 이 돈을 돌려주었다. 그는 예수를 믿기 전 횡령한 돈 20원을 돌려주려고 근무하던 회사에 갔으나 회사가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고 재정을 관리하는 정부 기구에 사정을 말하고 돈을 건넸습니다.
그 때 부흥운동 기간에는 과거에 횡령하거나 훔친 돈을 돌려주는 초대교회와 같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잇달았습니다. 돌려줄 대상이 없어진 경우에는 교회에 바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양심전이 교회에 수북이 쌓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시작입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오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이 모인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있은 다음날 사람들이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도둑맞은 물건들이 되돌아오고, 잃어버린 돈도 돌아오고,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되었으며, 부정한 방법들이 바로 잡혀졌던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사회가 달라지는 놀라운 일이 1907년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거대한 회개와 사랑 운동이 세상으로 퍼져나가 사회를 변화시켰던 운동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회개하고 삶이 새로워 졌던 놀라운 부흥이었습니다. 그들의 새롭게 변화됨이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3.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비롯됩니다.
부흥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을 “하나님의 성령의 흘러넘침이며, 오순절의 한 반복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흥은 웅장한 건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는 것이 부흥입니다.
사도행전 2:에 보면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저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다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씀했습니다.
말세에 성령을 물붓듯이 부어주고 계십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사람의 양심도, 육성도, 혈기도, 미움도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미운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주하는 입술이 축복하는 입술로, 남을 헤치는 사람이 도와주는 마음으로,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돌이켜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으로 능으로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성령은 되게 하십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에 취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회개하는 곳에 역사하십니다.
4.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42절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며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왜 ‘모이기를 힘쓰는 삶’이 중요합니까? 모여서 훈련 받고 ‘나 중심적 세계관’이 깨지라는 것입니다. 고독의 영성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영성도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영성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성숙하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라고 하였습니다. 말세가 되면 될수록, 죄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자주 모일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모일까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이 뜨거운 사람들은 모이기를 힘쓰지만 신앙이 식어진 사람들은 모이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타는 장작불이라도 하나하나 헤쳐 놓으면 불이 꺼지고 맙니다. 그러나 다시 모아 놓으면 불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해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힘이 생깁니다. 교회에 나오면 나올수록, 모이면 모일수록,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평양 대 부흥운동은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디가 자신의 죄를 고백한 모임도 기도회를 겸한 사경회였습니다. 사경회는 농한기인 1월과 7월에 주로 진행됐다. 한 번 열릴 때 보통 두 주간 정도 이어졌는데, 새벽기도로 시작해 오전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갔으며, 저녁에는 집회가 이어졌습니다.
오늘도 모이기를 열심히 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직장, 이런 저런 핑계로 모이지 않는 교회는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그런 교회가 부흥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순둥이가 됩시다.
초대교회는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보이지 않는 부흥의 원천이었습니다. 기도는 어떤 프로그램보다 중요합니다. 프로그램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힘쓰지 않고 부흥하는 교회를 보셨습니까? 역사상 기도의 밑거름이 없이 교회부흥이 이루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있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다급할 때 힘들 때, 불안할 때 걱정될 때, 갈등이 생길 때에도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다 다른 사람 문제로 보이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너 때문’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깨닫게 됩니다. 회개할 마음이 생깁니다. 평안이 옵니다. 기도는 부흥의 씨앗입니다. 복의 씨입니다.
5. 부흥을 원하면 먼저 말씀을 갈망하라
부흥을 원하면 먼저 말씀에 대한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예배에 철저히 참석하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특징은 말씀을 그대로 믿고 삶에 적용 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말씀을 갈망할 줄 알았습니다. 말씀 가르침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날에 삼천 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엄청난 사람들이 다 진짜 제자였다면 몇 년 되지 않아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여기 ‘제자’는 원어로 제자가 훈련된 제자가 아니라 ‘사람’을 뜻합니다. 단순한 무리였다는 말입니다. 이런 단순한 무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영적인 힘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보다 오히려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더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 이후에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늙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늙음,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기독교 120년 만에 신앙이 늙어 버렸습니다. 노쇠현상이 일어나버렸습니다. 신앙이 늙어버리면 말씀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듣되 지키려고 듣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려고 듣습니다.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듣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교인 수는 늘어났는데 사기치는 사람, 돈 떼먹는 사람, 복음을 팔아 장사하는 사람, 선거철에 나타나는 사람, 바람피는 사람, 편하게 믿으려는 사람 등 거짓된 그리스도인들이 득실거립니다. 주님은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보다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제자를 더 원하십니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42절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을 줄 아는 성도였습니다. 뜨거운 가슴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냉철한 머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많이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공부도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성경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패션이 아닙니다. 이벤트가 아닙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지배할 때 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지 않아서 육신이 기갈된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된 것은 더 비참하고 더 괴롭습니다. 말씀이 없는 기갈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말세는 그런 때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요, 악한 대적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엡6:17). 그래서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6. 부흥은 복음의 열정을 가진 자에게 역사합니다.
40절을 보면 베드로의 선포가 나옵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사람이 하루 동안 말을 하는데 남자는 평균 25,000마디를 하고, 여자는 35,000마디를 한다고 합니다. 25,000마디, 열흘이면 25만 마디를 하면서 예수를 한 마디도 전하지 않고 산다면 정말 하나님 앞에 해도 너무 한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전도를 안하면 안됩니다. 세상일이 좀 손해가 되어도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말할 때 지혜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달변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수사학, 웅변술을 못 배워도 괜찮습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십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히는 순간 입술에서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며 그리스도가 능력있게 전파될 줄 믿습니다.
초대교회는 행위로, 삶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고 또 모든 사람 앞에 칭송을 받았습니다. 불신자들은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다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예수를 은혜롭게 잘 믿었으면 온 백성이 저들을 칭송하며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을까요? 부러운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적과 기사와 표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5:12)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행8:6)
예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게 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막16:17,18).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때를 가리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과 기사와 표적으로 복음을 전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오늘의 교회가 파워를 잃어버린 것입니까?
100년 전 기독교와 오늘의 기독교가 현저하게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100년전 기독교는 1 % 밖에 안 되는 신자들이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모든 분야에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심각합니다.
7. 부흥은 서로 떡을 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42절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떡을 뗐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실질적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지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서로 어려운 자들을 도왔습니다.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눴다는 것입니다. 짐을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얻으려면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넉넉한 품이 있어야합니다. 웨슬리도 관용정신을 가질 것을 설교했습니다. 편협한 신앙에 대해서 경고하는 설교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것이 부족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회개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기에 앞서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디모데 아버지는 헬라인 어머니 유대인입니다. 그 사이에서 루스드라에서 태어났습니다(행16:1, 20: 4)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지만 . . .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전9:19-20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 (갈2:3)디도는 헬라인(이방인)인데, 유대인들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주어 유대인을 만들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은 거절했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게 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서로에게 짐을 지우지 맙시다.
어떤 사람은 왜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느냐?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 때문입니다. 사람을 잃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 것입니다. 모든 자식이 다 귀한 것 . .

서로의 짐을 나누기를 힘써야 합니다. 은혜받은 자들은 지을 나눕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 짐을 나눴습니다. 떡을 뗀 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부흥이 임하기를 사모합시다. 지금은 부흥이 일어날 때입니다.
부흥은 구체적인 회개에서 시작됩니다.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비롯것입니다. 다른 것이 부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갈망하십시오.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전해야 할 것입니다. 부흥은 서로 떡을 뗄 때, 짐을 나눌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출처/임경택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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