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하나님 나라의 일꾼 (누가복음 23:50-56)

by 【고동엽】 2022. 9. 25.

하나님 나라의 일꾼  (누가복음 23:50-56)

오늘은 누가복음 23장 50절에서 35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이 말을 짧게 줄이면 천국의 일꾼이라는 말이 됩니다.
본문 51절 하반절을 보면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주인공인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 지방에서 아주 이름난 부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할 때 아리마대는 동네 이름이요, 요셉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 당시 유다나라에서 요셉이라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아리마대에 사는 사람 요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이 기다리는 천국과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천국은 조금 다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고 그리스도가 오시면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의 학정 밑에 있는 이스라엘을 독립을 시키고 그 메시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땅에 건설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아리마대 요셉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자기들이 잘 못 된 것을 알고 자기네들의 믿음을 수정하여 바로 잡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초림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는 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자요, 하나님의 나라를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 우리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그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꾼이 마땅히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일꾼이 안 된다고 하면 문제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목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고 정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본문을 가르침을 따라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 편에서 일해야 합니다. (50-56)
본문으로 돌아가서 50절에서 51절을 보면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72명으로 구성이 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복지에 들이기까지 모세를 도왔던 72명의 장로가 있었습니다. 한 지파에서 6명씩 장로를 세웠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간 다음에 유대가 로마의 식민지로 있을 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로마정부의 허락 하에 공회라는 것을 조직합니다. 그 때 모세를 도왔던 72명의 장로를 감안하여 공회도 72명으로 하였습니다. 유대교 교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크게 나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장로교 안에 통합파가 있고 합동파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유대교 안에 두 파가 있었습니다. 그 두 파에서 절반씩 공회 의원을 뽑아서 72명이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이 그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사형 집행하는 것과 외교권과 군사권만 없었기에 공회에서 그 외의 모든 것을 결정하면 그대로 시행이 되었습니다. 식민지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회의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출세라면 출세입니다.
한번은 공회 의원인 요셉에게 밤에 모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밤에 그 모임에 갔더니 예수님를 잡아다 놓고 죽이기로 결정하자고 하였습니다. 72명의 의원들이 전부 예수님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모든 의원들이 찬성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정할 때 오직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반대합니다. 예수님을 왜 죽여야 하며, 죽일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겁니다. 즉 그네들이 그런 결정할 때 가타 즉 옳다 하지 않고 반대하였다는 말입니다. 72명중에서 다른 사람들은 전부 예수님 반대편이었지만 이 요셉만은 유독히 예수 편에서 끝까지 일한 사람입니다.
"목사님, 우리도 이 시간에 여기에 예수님을 붙잡아 놓고 예수 반대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아라, 또는 예수 편은 손들어 보라라고 한다면 저도 죽으나 사나 예수 편을 들겠습니다"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후 2000년 12월에 서울 한복판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얘기가 전혀 달라집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먼저 누구든지 예수 편을 드는 사람은 출교 처분하기로 결정을 합니다. 바리새파에서 출교 처분을 하게 되면 사두개파에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 곳이 없습니다. 공회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거기에 주어졌던 온갖 특권들은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는 누구도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아주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이미 다 결정해 놓고서 예수 편에 설 사람은 손들어 보라고 할 때 누가 예수 편을 들겠습니까? 거기에 모였던 71명 모든 사람은 하나같이 예수를 죽여야 된다고 반대편에 섰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반대하고 또 예수 없이는 부자가 되어 의미가 없고 예수 없는 출세, 예수 없는 성공을 나는 원치 않는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다 빼앗겨도 나는 예수님 편입니다"라고 하면서 아리마대 요셉은 끝까지 버티어 서서 예수 편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 사람을 가르쳐 성경에서는 '선하고 의롭다'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 사람은 분명히 예수 편에 서서 끝까지 어떤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모두 감수하고 예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천국 일꾼의 자세입니다. 천국의 일꾼은 이래야만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바로 그리했습니다.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순반란 사건에 여수가 뒤집히고 순천이 뒤집힐 때 순천 중앙교회를 시무하던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때는 도망가야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천에서 조금 떨어진 별량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붙잡혀 유치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을 하나 하나 불러다가 재판도 하지 않고 전부 처형해 버릴 때입니다. 그럴 적에 장교하나가 들어오더니 "이 가운데 예수 믿는 예수쟁이는 나오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안 두겠다는 뜻입니다. 당장 끌어다가 즉결 처분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때 붙잡혀 갔던 순천 중앙교회 목사님이 나덕환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이 처음에 나갈 것을 생각했으나 가서 죽을 것을 생각하고는 '죽었오'하고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장교가 나가버립니다. 그 때 속에서 자꾸 이야기하기를 "야 이놈아, 네가 목사이면서 손을 안들어? 예수 믿는 사람은 나오라고 하는데 안나가? 너 지금 누굴 믿고 있어? 넌 양심도 없는 놈이야?" 자꾸 속에서 그럽니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밖으로 나갔던 장교가 다시 들어와서 "예수 믿는 놈은 나와 목사놈이 여기 붙잡혀 왔다는데 누구야?"라고 외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덕환 목사님이 그 동안 고민도 했겠다 "바로 내가 예수를 믿소, 내가 목사요"라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장교가 발길질을 하면서 나덕환 목사님을 끌고 나갔습니다. 유치장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 놈은 악질 중에 최고 악질이니까 내가 직접 즉결 처분하겠으니 너희들은 따라 오지 말아라"하고는 산비탈로 끌고 갔습니다. 그곳으로 끌고 가더니 하는 말이 "목사님, 나도 반란에 가담은 했지만 내 아버지 어머니가 독실한 신자입니다. 나도 어렸을 때 교회에 열심히 나갔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반란에 참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붙잡혀 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얼굴은 모르는지라 아무리 찾아도 나와야 어떻게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님 빨리 도망가십시오. 여기에 있다가는 죽습니다. 내가 총을 쏘아서 총소리가 나거들랑 그저 무조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십시오"라고 하고는 총을 허공에다 대고 쏘았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을 가서 몇 일 동안 숨어 있다 보니 여순반란 사건이 끝이 났습니다. 여수 중앙교회로 다시 돌아와서 그가 은퇴할 때까지 오래도록 목사로 시무 하다가 1961년에 우리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46회 총회장까지 지냈습니다.
여러분 그런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오. 예수 왕초요"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 그렇게 예수 편에서 끝까지 버티고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숨은 제자였으나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앞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아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우물쭈물 하지 마시고 "난 예수 믿는 사람이오. 내 정체는 광성교회 교인이요"하면서 예수 편에 서서 끝까지 하늘나라 위해서 충성 다하는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원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52-54)
본문으로 돌아가서 52절에서 53절을 보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자원 봉사했다는 뜻입니다. 자원해서 봉사하지 못하겠으면 억지로라도 봉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5장 21절을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당시 로마가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네 법대로 흉악한 죄인이라고 할 때에 사형언도를 내리고 사형을 집행할 때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을 하면서 사람을 죽입니다. 그 사람을 죽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을 때까지 매달아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을 사람이 죽을 장소까지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거리로 십자가 통나무를 지고 끌려가는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은 지금 사형을 당하러 가는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하는구나'생각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창피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가다가 또 쓰러집니다. 그 때 마침 구레네 사람 루포의 아버지가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다가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혔습니다. 붙잡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워서 못 박힐 장소까지 끌고 갔습니다. 성경에는 억지로 지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누가 기쁨으로 져다 주겠습니까? 진짜 억지로 져다 준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6장 13절을 보게 되면 바울사도가 로마교인들에게 편지할 때 '너희가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이니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루포와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오는 루포가 똑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에 똑 같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면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져다 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저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내려가서 자기 아내에게 전도하고 아들들에게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사람들이 이사하여 로마에 가서 그곳 교회에 출석하면서 로마 교회 일꾼으로 있었기에 바울사도가 그네들에게 문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십자가 져다 주고 봉사를 해도 안 하는 것보다는 축복입니다. 그러기까닭에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봉사하십시오. 억지로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자원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2절을 보게 되면 먼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였습니다. 둘째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못 박혀 죽으실 때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전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전부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가서 숨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해가 넘어가면 안식일이 됩니다. 안식일 전에 반드시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그 때 생각 밖의 사람이 나타나는데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입니다. 마태복음에 보게 되면 '부자 요셉'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보게 되면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나갔다' 그리고는 숨은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숨어서 예수를 믿고 제자 노릇을 하다가 나설 때가 되니까 당당하게 나서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는 예수 믿는 광성교회 집사요, 집사"라고 나팔을 불고 다니지는 않지만 때가 되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내가 바로 광성교회 집사요"하고 그 어려운 일을 도맡아 나서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첫째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시체를 가져다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장사지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장례를 치러 봐서 알겠지만 사람을 장사 치르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입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모르는 척 하고 눈을 감아 버리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리마대 요셉은 "내가 장사를 지내겠으니 예수의 시체를 주십시오"하고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일을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 돈을 받고 했습니까? 자원해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쌌습니다. 세마포는 가는 베를 말합니다. 요즘에 세마포는 옷감으로도 잘 쓰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에 세마포라고 하면 얼마나 귀한 옷감인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가서 주일날 기도하는 중에 하늘이 열려 천국의 환상을 봅니다. 그랬더니 성도들이 전부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간 성도들이 입을 옷이 없어서 세마포 옷을 입으러 천국에 갔습니까?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천국은 진짜 천국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밖에 표현이 안된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물질로 표현하려면 표현할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바닥은 황금길이다, 바다는 유리바다다라고 했습니다. 황금길이 아스팔트길보다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곳에 가서 살겠다고 천국에 가겠습니까? 유리로 된 바다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너무 좋은 천국인데 그렇게 좋다는 것을 표현하다 보니까 그 당시 귀했던 유리를 갔다대고 바다가 그렇게 맑더라 하는 것을 나타내려고 유리바다라 한 것입니다. 열두 대문을 지나가는데 무슨 보석, 무슨 보석이라고 나열 했습니다. 하늘이 보석으로 치장한 곳입니까? 좋은 것을 표현하다 보니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보석을 다 가져다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성도들이 입는 세마포는 그 때 당시 최고의 옷감입니다. 굉장히 값비싼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광 자체를 입고 있는데 그 상황이 설명이 되지 않으니 세마포 옷을 입고 있다고 비유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세마포가 그렇게 값지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를 위해서 준비했던 세마포를 예수님의 시체를 싸는데 깨끗이 바쳤습니다. 이 일은 누가 시켜서 한 것입니까? 돈을 받고 한 것입니까? 분명히 자원해서 봉사한 것입니다.
세번째로 아무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 판 무덤에 넣어두었습니다. 우리나라 장례법과 그네들의 장례법은 다릅니다. 우리는 땅을 파고 그 곳에 관을 내리고 봉분을 해 버리면 하루에 무덤을 열두개라도 만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위를 팝니다. 바위를 파서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거기에 모시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거기에 모시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거기에 모시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도 거기에 모십니다. 내가 죽으면 거기에 들어 가고 내 아내가 죽으면 거기에 장사됩니다. 그러다 뼈가 꽉 차면 봉해 버립니다. 이것을 묘실이라고 합니다. 바위에 판 무덤입니다. 지금 요셉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대까지 묘실이 꽉 차서 새롭게 무덤을 판 것입니다. 무덤을 만드는데는 우리나라 돈으로 백만원, 이백만원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몇 천만원 혹은 억대의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와 후손을 위해서 준비 해 놓은 바위에 판 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신을 모셨으니 어디에 장례를 지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엄청난 거금을 들여 자기 가문을 위해 준비해 놓은 무덤에 예수님을 모시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바쳐 버렸습니다. 이것을 누가 시켜서 했습니까? 누가 돈 받고 했습니까? 자원해서 봉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원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어떤 댓가가 없이도 필요로 하다고 하게 되면 모든 것을 바쳐 자원해서 봉사하는 일꾼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법을 지키면서 봉사합니다. (55-56)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킨 공로와 댓가로 구원을 얻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공로와 댓가로 구원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법을 지킨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저 분의 아들이다'라고 할 때는 효도를 하는 것과 아들이 되기 위해서 효도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저 분에게 아들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효도했다 하여 효도한 댓가로 내가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러분은 효도하고 아들이 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아들이 되었으니까 효도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고 구원 얻었으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3절에서 56절을 보면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그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고 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렇게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 지낼 때 갈릴리에서 쫓아온 여자들이 그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급하다 보니 향품을 시신에 넣지를 못했습니다. 그 여자들은 빨리 돌아가 해가 넘어가기 전 즉 안식일이 되기 전에 향품과 향유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여자들이 계명을 좇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되자 아리마대 요셉도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봉사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법을 꼭 지키며 봉사해야 합니다.
운동선수라면 꼭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건강해야 합니다. 둘째 기술이 뛰어나야 합니다. 셋째 그 운동의 법칙을 꼭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경기력이 좋고 기술이 좋아도 그 경기의 규칙을 어기면 실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경기하는 자는 법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반드시 하나님의 법과 교회 법을 지키면서 봉사해야 합니다.
디모데 후서 2장 5절을 보면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예수 편에서 서서 일해야 합니다. 예수 편에서 끝까지 그리고 목숨을 거는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둘째 자원해서 봉사해야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댓가를 바라고 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셋째 꼭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교회 법이 있습니다. 교회 법을 무시하면 실격이 됩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창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