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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는가? (본문 왕하6:14-17)

by 【고동엽】 2022. 9. 25.

무엇을 보는가?   (본문 왕하6:14-17)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왕기하 6장 14-17절)
<목회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지러운 세상에 살지만 흔들림없이
복된 예배의 자리에 앚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진학과 취업이라는 큰 문 앞에서 염려하고 갈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길되신 주께서 영생의 길을 내심처럼 저들의 세상 길도 인도해 주옵소서.
기둥교회를 세우신 하나님!
우리가 최선을 다하려 하나 모든 약한 사람의 손을 다 잡을 수 없고
우리가 최선을 다하려 하나 모든 아픔을 가진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아름다움과 함께 아픔을 만드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아름다움에 취해 아픔을 모르고
아픔에 시달림으로 인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약하고 무능한 저희들의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그러나 이 시간에도 병상에서 눈물 흘리는 이들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고,
기막힌 사연으로 가슴을 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에 군대에 나가 있는 이들,
외국에 나가 있는 믿음의 식구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저들에게도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귀한 시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줄로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지난 주간에 제가 읽었던 책 가운데 가브리엘레 체르빈카(Gabriele Cerwinka)와 가브리엘레 슈란츠(Gabriele Schranz) 두 사람이 펴낸 책에 의하면 사람의 첫인상이 3초 만에 결정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 좋은 사람이구나. 이 사람 별로 안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느끼는 데 3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4초였었는데 스피드 시대라고 요즘엔 3초로 단축되었나 봅니다. 옆의 분들과 미소띈 얼굴로 3초 동안 서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겁에 질려 있는 사람, 불안에 떠는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보다 더 좋은 말씀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듣는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정치인, 경제 관료들이 하는 말은 믿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말이나 일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근심'이라는 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한 방법으로 필요하기도 합니다. 폭발물을 두려워해야 하고, 살얼음판은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오는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는 신앙생활에 장애가 됩니다. 두려움과 근심이 심하면 절망하게 되고 절망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두려움이라는 것, 근심이라는 것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근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죽음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신앙안에서 죽음을 초월한 사람은 영원한 세계와 바르게 이어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근심한다, 염려한다, 두렵다'는 말은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확신을 가지고 나가도 일이 될까 말까인데, 두려운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그 일이 잘 될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확실한 믿음 안에 서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 8절에 보면 아람나라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람'이라는 나라는 오늘날의 '시리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아람과 이스라엘이 싸울 때마다 아람이 졌습니다. 그래서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 이스라엘을 공격해도 어떻게 알았는지 이스라엘의 방어로 매번 전쟁에서 졌습니다.
아람왕은 화를 내고 참모들을 모아 우리 중에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소리 소리 질렀습니다. 그중 한 참모가 왕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이스라엘 중에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왕께서 침실에서 속삭인 말까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장로님들 부부에게 "부부끼리라도 서로 신앙 떨어지는 얘기, 불평, 원망 등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부탁드린 적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남편이 믿음이 있는 아내에게 신앙 떨어지는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신앙이 떨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저에 관해 할 말이 있으시면 "저를 직접 찾아오시고, 절대 부부끼리라도 들어서 안 좋을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침실에서 나누는 대화도 듣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람왕은 엘리사를 잡을 생각으로 엘리사가 있는 곳을 알아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군사, 말, 병거를 동원해서 엘리사가 있는 도단성을 전부 포위했습니다. 새벽에 엘리사의 사환(시종)은 바깥에 진을 치고 있는 아람나라 군사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달려가서 "아아! 이걸 어찌하면 좋습니까?"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사환을 보고 16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했는데 정작 사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 엘리사는 사환을 위해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17절)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환이 눈을 뜨고 보니("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싸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환은 자기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엘리사의 기도로 신령한 눈이 뜨여질 때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군사를 보는 눈이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편을 위해, 부모를 위해,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기도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엘리사가 사환을 위해 했던 "두려워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첫째 이유는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근심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경험, 모습, 능력 등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사람, 염려하는 사람, 걱정하는 사람, 두려워하는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 한숨 짓는 사람'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여러분 중에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뉴스에서 들을 수 있는 소식들,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상황들이 아마 여러분의 가족 중에, 일가 친척 중에 다 있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근심치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여러분은 근심이, 염려가, 두려움이 없습니까? 제게도 근심, 염려, 두려움이 있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사람은 불안한 세대에 살고 있기에 모두 염려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인사에도 "밤새 안녕 하셨습니까?, 그동안 별일 없으시죠? 조심하세요. 살펴 가세요…"라고 하는 것도 모두 염려와 근심의 표현입니다. 저도 제 아이들에게 항상 "언제나 조심하라(Always be careful)."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언제나 조심하라'고 한다 해서 문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피고 염려한 모든 것을 살피고 조정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갈 길은 어디인가? '내가' 찾을 진리는 무엇인가? '내가' 구할 영생은 어디 있는가? 모두가 "내가·내가·내가"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길을 찾지 못하고 진리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시고, 계속해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생각의 기준을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을 하게 되는 것이지, 예수님께로부터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염려와 근심을 그분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근심하는 두 번 째 이유는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보는 것 말고도 세상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하게 됩니다.
'세상'이라 함은 내 눈으로 둘러 볼 수 있는 주변, 내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등을 말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엘리사의 사환은 자기의 눈에 비친 아람나라의 군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일 났다"고 소리 소리 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엘리사는 엘리사를 지키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영적인 눈이 뜨여 강단에서 고신일목사가 설교하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세계를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도 우리의 주변은 어떻습니까? 근심하지 않을 만한 조건입니까? 아닙니다. 온통 걱정거리뿐입니다. 이웃은 모두 좋은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 우리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 우리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사람, 심지어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까지 우리 주변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담을 쌓고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더불어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선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선하게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선한 싸움'을 하라고 했습니다. '선한 싸움'은 '손해'로부터 시작하는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기 때문에 선하게 살려면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손해를 보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세상 그대로만 판단해 버리면 "아아 내 주여 큰일났습니다"라고 소리질렀던 엘리사의 사환과 우리는 다를 바 없는 보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험합니다.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들이 온통 우리를 엄습해 오는 위험한 일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근심의 문제, 염려의 문제, 골치 아프고 고통스런 우리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쳐다 보아야 할 곳"을 볼 수 있을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나라의 군사들을 보았을 때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을 때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간혹 어떤 분들이 "내게는 온통 그림자뿐입니다. 내게는 오직 어둠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기쁨에, 웃음 속에 살고 있는데 나는 어둠 속에 눈물 흘리며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짓눌려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둠이 물러가면 밝음이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잘 압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군사들을 본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고, 아람나라의 군사들을 본 사환은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기둥교회의 2001년 달력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멋있게 나왔는지 대한민국 뿐 아니라 세계에서 기둥교회 2001년 달력이 제일 멋있을 것입니다. 그림도 수백 장 가운데 고르고 골라서 만든 것입니다.

5월달의 달력에 있는 이미지는 아버지와 아이가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자세 아닙니까? 아버지의 손에 붙들린 어린아이가 가장 안전하지 않습니까? 예배 드리는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손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가장 안전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다른 것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 손이 어디에 붙들려 있는가' 한번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이미지는 저작권법에 따라 <미국 코비스사>에서
기둥교회가 매입한 것으로 down 받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4:18).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버림받았다고 해도, 망했다고 해도, 우리에게 실패했다고, 한심하다고 말해도 우리의 손이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다면 우리는 희망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근심하는 성도, 두려워하는 성도, 외롭게 느끼는 성도, 쓸쓸함을 느낄 때, 눈물로 한숨 짓고 몸부림치고 괴로울 때,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시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Christianity Today」편집자인 필립 얀시(Pilip Yancey)는 '한센씨병(나병, 문둥병)' 환자들이 있는 병원에서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우리 기둥교회에서도 매달 문둥병환자를 위해 선교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탄 때 여러분들이 드리는 성탄헌금에서도 조금씩 지원하고 있고 환자들의 치료에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센병'(문둥병)이라고 부르는 이 나병 환자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문둥병 환자들의 고통은 바로 이 고통 없음이 그들의 특이한 비극입니다.
병이 번져 가면서 고통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마디(nerve endings)가 죽습니다.
사실 나병의 희생자들은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신체적 기형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는 세포들이 죽어서 아픔을 느끼지 못하니 좁은 신에 발을 억지로 넣어 발가락을 잃고… 눈을 깜빡거려야 할 때를 알 수 없어서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실패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다가 때로 어려울 때 "하나님은 왜 고통이라는 것을 만드셔서 우리가 힘들고 어렵게 눈물 흘리며 살고 있는 것일까?"탄식할 때도 있지만 고통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만약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대부분의 스포츠는 상당히 위험할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도 고통이 없다면 팔을 비틀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테고 그렇게 되면 운동하다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맹장 수술도 받는 것이고, 치과에 가서 이를 치료 받기도 하고 그래서 병을 치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고통은 이 땅에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슬픔을, 안타까움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때로 그 고통이 우리가 견디기 힘들 만큼 눈물 겨울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흘려 처참하게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의 값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그 죄의 값을 예수님이 치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 3:1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고난당하시는 그 고통을 직접 느끼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사십니까? 여러분의 눈의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자신만 보지 말고, 세상만 보지 말고 위에 계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하는 찬양이 쉽게 아무렇게나 부를 수 있는 찬양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여러분들의 손을 주님께 내밀고 여러분의 눈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할 때 여러분의 범사의 삶이 주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주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을 믿고 의지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있고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한숨 짓고 탄식하며
포기할 때가 많았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겪는 아픔과 슬픔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 교회에 찾아 나와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믿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난 추수감사절 은혜로운 찬양제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 이제 다시 한번 이 제단에서 찬양하는
선교회원들을 붙드시고 저들이 일평생 찬양한 대로 전도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기에 부족함 없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고 건강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고신일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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