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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삶 (고후 2:15-17)

by 【고동엽】 2022. 9. 25.

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삶   (고후 2:15-17)

저는 그리스도인 됨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현재 주안에서 은혜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 됨 이후에 얼마나 변하고 달라지고 성숙했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 됨 이후에 달라진 은혜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숙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가장 먼저 변한 것은 의식의 변화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생각하는 것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깨어있습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깨어있는가를 알려면 불신앙 자들과 대화를 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불신앙 자들과 대화해 보면 생각하는 것, 생의 목적 그리고 추구하는 지향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보면 우리의 생각이 아주 월등하게 성숙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불신앙 자들의 관심은 지극히 이생적인 것뿐입니다. 현재적입니다. 경제와 잘사는 것과 즐기는 것 그 이상은 없습니다. 돈은 있는데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속에 철학이 없습니다. 뜻이 없습니다. 모두 즐기는 이야기뿐입니다. 마시고 취하고 즐기는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참 유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적어도 영적 안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계관이 다릅니다. 인생관도 다릅니다.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종말관이 있습니다.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고 천국이 있고 장래가 있고 하늘의 뜻을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성숙한 인생입니까. 이것이 모두 우리가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주어진 은혜들입니다. 예수를 앎으로 우리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안목이 생겼습니다. 그만큼 인생이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고 나서 이렇게 달라지는 이 같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것이 보통의 은혜입니까. 참으로 소중한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눈이 뜨였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1885년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 처음 들어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그 당시 우리나라는 참으로 어둑한 시대였습니다. 모두 무속에 속박되어 꼼짝을 못하고 정신이 모두 묶여 살았던 때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이사도, 혼인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의지나 뜻은 전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술과 노름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 시대는 할일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우매하고 여자들은 속박당한 채 살아가고 상놈과 양반 계급이 엄연해서 인간이 차별당하고 미래를 향한 눈은 감겨있는 채 살았습니다. 문맹으로 사람들은 눈은 떠 있으나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우리민족은 지금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때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옵니다. 이 기독교가 어둑한 이 땅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변화를 준 것이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 준 일입니다. 세상을 향해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로소 세상을 알았습니다. 우리나라 말고 더 넓은 땅과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눈도 뜨게 해 주었고 영적세계를 보게 해 주었습니다.  

이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넓은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입니다. 이 눈은 마침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는 안목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 눈이 뜨이고 보니 넓은 세계도 보이고 저 높은 영적세계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닫혀있던 것이 열린다는 것과 감겨있던 것이 뜨여진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뜨여지고 열리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와 있던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과 민비가 참 가까이 지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둘은 자주 만나 대화를 했습니다. 하루는 대화도중 민비가 언더우드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때 언더우드는 “미국은 땅이 넓어서 4계절이 언제나 공존하는 나라”라고 소개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민비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때 언더우드는 민비에게 미국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소개한 것입니다.

“미국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추운 겨울도 더운 여름도 없고 죽거나 아프거나 병들거나 침략을 받는 일이 없고 눈물과 탄식이 없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말을 듣고 민비는 “그런 나라가 다 있느냐, 그렇다면 나도 그 나라에 가보고 싶다“고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민비가 일주일 후에 시해당해서 죽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20년만 더 일찍 들어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으면 일본침략도 없었을 것이고 억눌려 살아가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는 더 발전된 문명국가가 되었을 것이고 더 세련된 민족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예수를 알고 난 후에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어 더 잘 살고 복을 받은 것들은 아주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아주 근본적인 은혜를 받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개척의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아주 소극적이고 운명적이 심성을 지닌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팔자타령을 많이 하고 포기하고 체념하는데 아주 빠릅니다. 모든 일을 운명 탓으로 돌려버립니다. 어차피, 전생에, 우연히, 재수 좋아서 라는 말들을 입만 열면 아주 쉽게 쏟아내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민족은 개척이다 창조다 하는 생각이나 발상이 아주 서툰 민족입니다. 그냥 주어진 환경에서 개선할 의지도 없이 순응하면서 살아온 아주 무기력하고 순박한 민족입니다.

그런 민족에게 마침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민족의 사고와 생활태도에 상당한 변화를 안겨 주었습니다. 마침내 운명신앙을 타파하고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며 만들어나가는 의지를 발휘하고 앞날을 돌파해 나가는 정신을 가진 민족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곳이 막히면 뚫고 나가는 지혜를 발휘하는 개척정신을 심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민족에게 준 영향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미 서구세계를 보면 이 영향을 일찍 받아 그 삶과 역사가 창조의 역사이고 개척의 역사입니다. 사람이 이 개척의지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의지는 살아가다가 이곳이 막히면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게 만들어 주는 힘이고 지혜입니다. 그리고 개척하고 뚫고 나가고 새 길을 발견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영국은 천주교와 기독교를 합쳐서 1532년 영국 국교를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 강압적으로 신봉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이에 항거하여 반대했지만 힘에 밀려 순탄치 못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순응한 것이 아니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라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래도 핍박의 손길이 가해오자 모험으로 배를 타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새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래서 찾은 땅이 오늘의 북미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 땅을 발견한 것이 1620년입니다. 채 400년도 안됩니다. 하와이가 발견된 것이 1779년입니다. 호주 땅이 발견된 것이 1770년입니다.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220년 밖에 안 됩니다. 이 발견은 모두 개척정신에 의한 탐험의 소산입니다. 이 서구인들은 벌써 몸에 익은 이 개척정신에 의해서 우리들이 울안에서 머물러 살아갈 때 세상을 누비고 다니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개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이 전사 한 것이 1598년입니다. 이순신 장군사후 22년 후에 미국이 발견됩니다. 181년 후에 하와이가 발견됩니다. 172년 후에 호주가 발견됩니다. 참 아까운 일입니다. 그때 이순신 장군이 진해 앞바다만 돌아다니지 말고 휑하니 넓은 바다로 나갔더라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겠습니까. 만일 거북선의 기관이 고장이라도 나서 망망대해로 표류라도 했더라면 물결에 떠내려가다가 거기에 깃발을 꽂고 호주는 우리 땅, 하와이는 우리 땅 했을 것 아닙니까. 그랬더라면 오늘 우리나라는 어떤 모습을 지닌 나라가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서구인들은 일찍 이 기독교적 사상으로 무장하여 마음과 생각과 의식이 활짝 열린 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미래로 나아가는 삶에 아주 익숙했습니다. 여기가 싫으면 또 새로운 곳을 찾아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오늘 서구의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나갈 줄을 모르고 안에 모여 싸우며 좁은 땅에 갇힌 채 살았습니다. 모험정신도 개척의지도 세상을 보는 눈도 답답할 만큼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세상을 누비며 돌아다니던 서양인들이 이 땅에까지 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쳤습니다. 그 모습을 지나가다 양반이 보고는 혀를 찼습니다. “일꾼 사서 시키지 왜 저렇게 직접 뛰느라고 고생하느냐”고. 이것이 당시 우리의 생각이고 모습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그리스도인 됨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도 일찍 예수를 알게 됨으로 그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정신과 의식이 깨어서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살아갈 때 예수를 몰랐더라면 지금 저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있을 것입니다. 참 생각할수록 내가 예수를 일찍 알게 된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예수를 알고 난 후에 눈을 뜨고 마음이 열리고 생각이 열린 후에 알게 된 일들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배운 사람에게는 사명이 있듯이, 가진 사람에게도 사명이 있듯이, 예수를 알고 눈을 뜨고 보니까 한 가지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내가 눈을 뜨고 보니까 아직도 그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을 눈뜨게 해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를 알게 해 주어서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 삶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에 예수에 대한 향기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향기는 본체를 알리는 수단입니다. 예를 들어서 향수냄새를 나타내게 되면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는 시간에 향수를 만든 회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그 회사제품은 향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향의 역할입니다. 나무 중에 라일락의 향이 가장 좋습니다. 지나가다가 냄새가 풍기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여기 어디에 라일락 나무가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라일락의 향이 그 나무를 선전하고 알리고 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향기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생각, 모습에서 예수의 향기가 풍겨지고 묻어날 때 사람들은 나를 통해서 예수를 생각하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선전하고 보여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향기가 나를 통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향기가 마침내 세상을 정화하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살면서 이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명은 아주 소박한 사명입니다. 이런 사명을 이루며 살려면 더 이상 현실과 야합하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시대를 예언자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이상이 있고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매사 현실과 야합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도 자기입장만 위해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웃이고 남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하등인간입니다.

기독교는 조용히 앉아서 도나 닦고 수양이나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인은 나만 죄짓지 않고 살면 된다,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먼저 나 자신을 구원시켜야 합니다. 구원도 분명하고 확신 있는 구원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예언자적인 삶을 살게 되는 동기를 얻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현실과 야합하는데 이골 나 있습니다. 매사 구하는 내용이 평안이고 복입니다. 꿈이 너무 이생적입니다. 성공위주고 형통위주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고 화려해지면 기도응답 받았다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인들이나 오늘의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 버림당하는 일입니다. 버림당하면 맛 잃은 소금처럼 밟힘을 당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세상을 향한 향기나 예언자적인 삶은커녕 자신의 입지하나 바로세울 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맛 잃은 소금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정신, 철학, 삶 중심, 목적이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영적인 삶인데,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겨우 목적이 이생, 현실, 잘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이 무슨 신앙인입니까. 무슨 힘으로 세상에 예언자적 삶을 살아갑니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비참한 모습은 이렇게 버림당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사업하면서, 사회에서, 진급하기 위해서, 돈벌기 위해서, 편안하기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현실 야합하는 삶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버림을 당하고 기 기능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만 예언자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신앙인들은 예언자적인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몫입니다. 그렇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시대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기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너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입니다. 이제는 현실야합에서 예언자적인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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