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하나님이 앞세우는 사람 (시 105: 16-22)

by 【고동엽】 2022. 9. 25.

하나님이 앞세우는 사람  (시 105: 16-22)

오늘은 시편 105편 16절에서 22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앞세우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7절에서 19절을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애굽에 먼저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많은 중에 하나님이 요셉을 앞세워 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는 요셉의 형제들과 그 가정이 전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먼저 보내서 요셉으로 하여금 성장하게 하시고, 요셉을 키워서 큰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앞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열두 제자를 보아도 항상 베드로를 앞세웠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가룟 유다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바꾸어서 가룟 유다를 먼저 앞세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예루살렘 교회에는 안수 집사 일곱 명이 있었는데 반드시 스데반 집사를 앞세웠습니다. 문제가 있었던 니골라는 항상 제일 마지막에 세웠습니다. 니골라를 먼저 앞세우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앞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꼴지가 되어남의 뒤를 따라 가는 사람보다는 하나님께서 앞세우는 사람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이지만 내용은 창세기에 나오는 여러 곳에 있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종합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앞세우는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첫째, 꿈이 있는 사람 (창 37:5-11)

하나님께서는 어떤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 영어로 말하면 Vision을 가진 사람을 앞세우십니다. 꿈도 이상도 비전도 없는 사람을 앞세워 놓으면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삭의 아들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 둘이 장자의 축복을 놓고 칼부림을 하면서 싸웠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동생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형 에서가 칼을 들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집안에 있을 수가 없어서 밤에 외삼촌댁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외삼촌댁은 야곱의 집에서 먼 거리였습니다. 도망을 가는 중에 첫 날밤을 벧엘 들판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닿았습니다.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그 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야곱에게 온갖 축복을 하시는 중에 "네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함께 하겠고 반드시 너로 고향에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꿈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도와 주신다는 꿈입니다. 야곱은 자기 집을 떠나면 다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형의 칼부림에 못 이겨 집을 쫓겨난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만큼 싫었습니다. 더욱이 다른 곳에 가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벧엘 이라고 하는 곳에 가 보니 분명히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창 28:16).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죽기 보다 더 싫은 길을 가지만 나를 도와주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둘째는 하늘나라에 대한 꿈입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았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땅에서부터 시작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땅에는 닿지 않고 하늘에만 닿은 사닥다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어 천국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땅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예수를 믿고 가정 생활을 하는데 가정 생활은 밤낮으로 싸움만 하는 지옥 같은 생활인데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서는 지옥이고, 죽어서는 천국이라는 것은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살았을 때에도 나와 내 가정은 천국의 생활이요, 하늘 나라는 죽어서까지 이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꿈, 그런 신앙, 그런 이상을 가지고 야곱을 출발을 했습니다. 즉 나는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된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셋째는 반드시 고향에 돌아간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야곱은 죽을 고생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고향에 돌려보내 주신다, 즉 성공하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20년 동안 밤에 추위와 낮에 더위 그리고 말할 수 없었던 역경과 고난을 전부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이 꿈 때문입니다. 20년 동안 장가들고 한 떼 두 떼를 이루고 맨손 쥐고 출발했던 그가 큰 갑부가 되어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꿈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맨 주먹으로 출발했지만 꿈이 있었기 까닭에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 이렇게 성공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꿈이 있어야 합니다. 높은 이상이 있어야 하고, 비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 37장 5절에서 11절을 보면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꿈을 가진 소년입니다. 그가 한번은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에게 꿈을 꾸었다고 하자 형들이 이야기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끝없이 넓은 황금 벌판에 곡식이 무르익어 우리 형제가 그 곡식을 거두어 단으로 묶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내가 베어 묶은 단은 전부 일어서고 다른 형제들의 단은 내가 묶어 세워 놓은 단을 향해서 전부 절을 하였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아버지 같으면 좋아할지 모르지만 형들은 절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왕따를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난 후에 또 다시 꿈을 꾸고 부모와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즉 '하늘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나를 향해서 정중하게 절을 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러냐? 내가 너에게 절을 할 모양이구나?"라고 하면서 그 꿈을 마음에 두었는데 형제들은 그 때부터 동생 요셉을 죽일 생각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농사지어 곡식 단을 거두어 묶어 놓았을 때 형제들의 단이 절하는 곡식 꿈은 땅에 속한 꿈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이 땅에서 살기 까닭에 땅에 속한 꿈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리라, 나는 이런 사람이 되리라는 분명한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되는 것이 없기 까닭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등장하는 꿈은 하늘에 속한 꿈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꿈은 없이 땅에 속한 꿈만 가진다면 믿지 않는 사람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닌 하늘에 속한 꿈, 궁극적인 영생에 대한 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꿈이 있기 까닭에 우리는 목숨을 내 놓고서라도 순교까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꿈이 있는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 땅에 먼저 보내셨고 애굽 땅에서 훈련 시켜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꿈이 있는 사람을 앞장세워 보내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큰 일을 하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꿈이 있는 삶, 꿈이 있는 성도가 되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둘째, 이끌리는 사람 (창 39: 1-3)

저는 아들 딸을 키우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대부분이 딸들은 좋은 곳에 구경을 가면 아빠와 손을 잡고 잘 따라옵니다. 그런데 아들은 좀 다릅니다. 내가 아들의 손을 잡으면 집히는 것이 싫어서 자기 손을 내 손에서 빼고 자기가 내 손을 잡습니다. 자기 손에 힘이 얼마나 있습니까? 나를 잡고 가다가 걸려 넘어지면 손을 놓고 이마가 깨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붙잡고 가면 자기는 걸려 넘어질지라도 아버지가 놓지 않는 이상 넘어져 이마가 깨지는 일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 손에 붙잡히고 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손을 뺀 다음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은 곳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나 기어이 아버지를 끌고 가게 앞에 가서 100원 짜리 알사탕을 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데서나 사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왜 좋은 곳에 구경을 가서 하필이면 가게입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붙잡고 끌고 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들은 안 끌려가겠다고 두 발로 버티고 가게만 바라다봅니다. 기어이 끌고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들은 사자도 보고, 호랑이도 보고, 온갖 놀이기구를 타면서 좋아합니다. 나중에는 얼마나 좋은지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손에 끌려 가다보니 얼마나 잘 된 일입니까? 아버지를 끌고 가야 어디를 가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끌고 다니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끌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보면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바로 요셉이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끌려 간 사람입니다.

창세기 39장 1절에서 23절의 내용은 길어서 다 읽지를 않고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 이끌려 애굽으로 가서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입니다. 끌려가서 보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지내놓고 보니 그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였습니까? 자기 집에서 천막이나 치고 베드윈과 같은 양 몇 마리를 키우는 자기 집에서 된들 얼마나 크게 되겠습니까? 큰 고기는 큰 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중동 지방을 다스리는 넓고 큰 나라 애굽으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너는 여기에서 크고 여기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는 요셉이 배울 배움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결혼할 여자도 하나님께서 애굽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요셉이 일할 일터도 애굽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요셉이 그 사실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강제로라도 이끌어다가 거기에서 키웠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끌려가는 사람이 이렇게 복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한민국에 피난을 오고 싶어서 온 줄 아십니까? 제 고향은 이북 황해도입니다. 내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도 계시고, 두 여동생이 있는데 제가 왜 여기에 오고 싶었겠습니까? 그것도 18살로서 어릴 때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해서 죽지 못해 제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죽인다고만 하지 않았으면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마음대로 예수 믿으라고 했으면 여기에 무엇 하러 오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하니 죽지 않으려고 온 것입니다. 죽기보다 싫지만 하나님 손에 끌려서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같이 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 와서 보았더니 요셉의 배움의 터를 애굽에 준비해 두신 것처럼 제가 다닐 학교를 이 곳에 준비해 두셨습니다. 내 아버지가 돈을 벌어서 세운 학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학교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또 요셉이 결혼할 여자를 애굽에 준비해 놓고 이끌어 가신 것처럼 제 아내 될 여자를 이 쪽에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만나서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할 일터도 이곳에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렇게 가정을 떠나오고 싶지 않은데 죽인다고 하니 이곳까지 끌려 왔습니다. 하나님께 이끌려와 놓고 보니 바로 여기에 성공이 있고 축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끌고 다니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고, 말씀에 이끌리고, 하나님의 뜻에 쫓아 그 뜻에 이끌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이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해결하는 사람 (창 40: 9-15)

창세기 40장 9절에서 15절을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의 집에 가서 종살이를 11년 동안 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을 2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요셉을 보디발 장군의 집에 이끌어 종살이를 시키신 것도, 감옥살이를 시키신 것도 하나님이 끌어다가 그 자리에 놓은 줄 알고 그 현실을 인정하고 온갖 충성과 최선을 다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끌어다 놓는 그 자리를 원망하지 마시고 현실을 인정하시고 최선을 다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큰살림을 배웠습니다. 즉 나라 살림을 할 수 있는 틀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는 정치범들만 갇힌 곳인지라 그 사람들을 2년 동안 섬기면서 정치를 배웠습니다. 자기 고향 가나안 땅에 있었던들 이것을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그래서 감옥에서 최선을 다해 정치범 죄수들을 섬기고 있는데 방방이 들어가 봉사를 하는 중에 한 방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큰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어젯밤에 희한한 꿈을 꾸었는데 해석을 못하겠습니다. 풀지를 못하겠습니다. 해결을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말씀해 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술 맡은 관원장이 "포도나무에서 가지 셋이 나오더니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얼마나 탐스러운지 모두 무르익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즙을 짜서 바로 왕에게 드렸더니 왕이 포도즙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요셉이 꿈을 풀어 주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세 가지는 3일을 가리킵니다. 당신은 쿠테타의 혐의를 받고 이렇게 갇혀 있지만 3일 후에는 석방이 되어서 다시 포도즙을 만들어 왕에게 드리는 전직을 회복합니다"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속시원히 해결해 주었습니까? 그 후 3일이 지나 바로 왕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생일 잔치가 되기 전에 쿠테타 사건을 전부 심의하고 조사한 결과 술 맡은 관원장은 무혐의로 석방이 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협의가 입증이 되어 사형 언도를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요셉이 해석한 꿈 그대로 되어졌습니다. 요셉은 문제를 풀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을 뒤엎어 버리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사람이 직장에 나가면 직장을 뒤엎어 버리고 역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교회를 뒤엎고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가는 곳마다 문제를 풀고 해결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애굽 총리로 등용이 되었습니다. 그 때 7년 동안 풍년이 드는데 어떻게 풍년이 크게 드는지 5분지 1의 곡식을 거두어 쌓아 모아도 애굽 땅에는 쌓을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이서 7년 동안 흉년이 드는데 하늘에서 비 한 방울이 내리지 않는지라 땅이 말라 버리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도 말라서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곡식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그 동안 쌓아 모았던 곡간을 열어서 애굽 사람들 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 모든 백성들에게까지 풀어서 먹여 살려 흉년에 양식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해결해서 전부 살렸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일어났다고 하면 앞장서서 해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을 반드시 앞세워 키우시고 귀한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중국의 석학 림어당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탕자는 돌아옵니다'라는 성명을 내고 기독교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그가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또 선교사의 도움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도 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장학금을 받으며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다 보니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만큼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석학 림어당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는 '탕자는 돌아옵니다'라고 하면서 기독교로 다시 돌아올 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성경을 많이 연구해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또는 유교도 많이 연구하고 그리고 불교도 연구 해 봤습니다. 쉽게 말씀드려 종교를 비교해 본 결과 기독교에 생명과 진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깊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날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석가머니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전생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이렇게 죽게 되었느냐? 업보요, 업보'라고 하면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바라보니 살길이 없었습니다. 또 지나가는 사람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이번에는 공자가 지나가다가 들여다보았습니다. 유교에는 내세가 없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기어이 종교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도덕적인 종교입니다. 공자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 놈, 너 죽으려고 거기에 빠졌느냐? 빨리 나오지 못해?'고 얼마나 책망을 하는지! 죽게된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야단만 치고 갔습니다. 유교는 책망만 잘하는 종교입니다. 또 다시 지나가는 사람에게 살려달라고 했더니 지나가는 한 분이 들여다보는데 예수께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줄을 매고 내려와서 나를 업고 다시 줄을 타고 올라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출해 주었습니다. 살길은 여기에 있고, 문제 해결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처럼 기독교를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총동원 출석 전도주일에 처음 나오신 분들은 잘 나오셨습니다. 구원은 기독교에 있고 죽음의 문제는 예수만이 해결하십니다. 신약에서 죽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분이 예수라면 구약에서는 요셉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을 앞세워 일하십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앞세우는 사람은 첫째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 이상이 없는 사람, 비전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 가는 사람 요셉을 하나님이 앞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을 이끌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을 앞세워 놓으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망쳐 놓는 결과밖에 안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이끌리는 사람을 항상 하나님이 앞세우십니다. 셋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람을 앞세워 놓으면 모든 일을 망쳐 놓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요셉 같은 사람을 앞세워 일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