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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찬송이 가져다주는 축복 (엡5:15-20)

by 【고동엽】 2022. 9. 24.

찬송이 가져다주는 축복  (엡5:15-20)

성경이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는 원천이라 한다면 찬송은 신앙의 감격을 곡에 붙인 기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찬송은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약의 시인은 “온 땅이여 여호와를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그 앞에 나아갈 지어다”(100:1-2)라고 하였고, 신약의 사도바울도 엡5:19절에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합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구약이나 신약성서에 따르면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했고, 찬송으로 자기 신앙을 고백하곤 하였다.

우리도 찬송을 부르는 중에 약한 자가 강해지고, 기쁜 자는 더욱 기뻐지고, 슬픈 자가 찬송하는 중에 위로를 받게 되지 않은가? 외로운 사람이 찬송을 하는 중에 용기를 얻게 되고, 죽음 앞에서 불안해 떨다가도 찬송 중에 소망 가운데 편안히 운명하게 되지 않은가! 이것이 찬송이 가져다주는 축복이요 유익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아도 천군천사의 합창 가운데 태어나셨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에도 제자들과 함께 찬송하며 나아가셨다(마26:30)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삶도 찬송으로 시작되었고 찬송으로 마감하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찬송은 성직자와 성가대원만 부르게 되고 평신도는 그저 찬송을 듣는 것만으로 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자인 츠빙글리는 “교회 음악은 신도들의 영성을 마비시킨다고 해서 교회 음악을 거부하고 찬송을 반대하는 유산을 남겼다. 장로교회의 창시자요 츠빙글리보다 조금 후일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외친 캘빈은 어떠했는가? 그는 모든 악기는 가인의 유산이라 하여 악기의 사용을 못하게 하였으며 찬송을 해도 오직 반주 없는 시편만을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심지어 캘빈은 그의 친구가 자신의 허락 없이 찬송가를 작시하고 작곡하여 불렀다고 해서 친구를 투옥하여 16년간이나 옥고를 치르게 한 일도 있다. 만일 오늘날 츠빙글리나 캘빈이 자신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드리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기절초풍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이 그토록 금했던 피아노, 오르간, 심지어는 오케스트라까지 동원해서 드리는 예배 그것은 자기들이 의도했던 예배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세기의 가톨릭교회에 있어서 찬송은 성직자와 성가 대원만이 부르는 것으로 전락하였고 츠빙글리나 캘빈의 교회의 경우 모든 악기는 교회 내에서 추방되었고 오직 시편만을 반주 없이 운율이 맞추어 부르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말틴 루터만은 이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값진 선물이 성서라 하였고, 찬송을 모르고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교회 음악을 장려하였고, 자신이 직접 작시 작곡한 찬송을 신도들에게 애창하도록 하는 교회음악의 값진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래서 지난 450여 년 간 캘빈 파에 속하는 사람으로 교회음악에 그 이름을 날린 사람은 별로 없으나 루터교에는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비롯해서 멘델스존 같은 많은 음악가를 배출하여 현대음악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루터도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듯 찬송을 부를 때 또한 믿음이 생긴다고 하였고, 찬송을 싫어하는 것은 오직 사탄과 마귀뿐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서 다음의 귀중한 보배인 동시에 찬송은 우리에게 큰 축복과 유익이 됨으로 사도바울은 그가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도들의 마땅한 도리는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한 것이다. 즉 그는 입으로 부르는 구창(口唱)과 마음으로 부르는 심창(心唱), 서로 화답하여 부르는 화창(和唱), 곧 구창, 심창, 화창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촉구한 것이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도 경건한 사람들은 찬송을 즐거워하였고, 신약시대에도 경건한 사람들은 찬양을 즐거워하였고, 초대교회를 보더라도 행2:47절에 보니 “저들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우리가 자연계를 보더라도 굼벵이가 매미로 환생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를 부르고, 알에서 부화되어 나온 병아리들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를 부르듯이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도 마땅히 찬송하는 삶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43:21절에 보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찬송을 불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 목적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찬송을 불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찬송하지 않는다면 이는 병든 신자이거나 아니면 벙어리 신자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찬송을 즐겨 부르는 사람에게 따르는 축복은 무엇이며 유익은 무엇일까?

첫째, 찬송엔 완악한 사람을 회개시켜주는 능력이 있다.
고대의 어거스틴은 한 때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탕자였고, 이단 종교의 교수였고, 사생아를 둔 부도덕하고 무절제한 청년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성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오랜 동안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이 창가에 앉아있는데 창 밖에서 몇몇 소녀들이 재미있게 놀며 찬송을 부르는데 “일어나 읽어라, 일어나 읽어라”는 것이었다. 그 나이어린 소녀들이 부르는 찬송 소리가 계속 되는 동안 어거스틴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위에 놓여있는 성경을 집어 들고 성경을 펼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로마서 13:12절 이하의 말씀이었다. “밤이 깊이 낮이 가까웠으니 그럼으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하신 말씀이 바로 지기에게 주신 말씀처럼 들려 왔다. 이때부터 그는 회개하기 시작했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후 쓴 저 유명한 책이 바로 세계적 불후의 명작인 어거스틴의 “참회록”이 아닌가! 흔히 성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교부요 신학자라고 한다. 동시에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비해 그 우월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어거스틴의 영향 때문이었고, 중세기 가톨릭교회가 지니는 많은 특색의 대부분도 어거스틴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위대한 교부요 신학의 아버지요, 가히 성자 중 성자라 할 수 있다. 철저히 타락하고 도저히 구제불능의 어거스틴을 변화시키는 역사는 다름 아닌 나이어린 소녀들이 부른 찬송의 능력이었다고 하겠다.

한국전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경남 거제엔 수만 명의 인민군 포로들l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포로들 중에는 골수 공산주의자들도 있었고, 공산주의를 싫어했으나 억지로 인민군으로 끌려나왔다가 포로가 된 소위 반공포로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포로수용소에서는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이 난동을 벌여 포로 수용소장을 납치하기도 하고 반공포로들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하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일까지 발생한 바 있다. 이와 같이 포로 수용소 안이 살벌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고 한다. 이 수용소의 영어 통역장교로 일하고 있던 옥호열 선교사가 밤하늘 중천에 달은 밝고, 별들을 빛나고 해서 막사 밖에 나와 거닐고 있었다. 그런데 야외 화장실에서 웬 포로가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옥호열 선교사가 울고 있는 포로를 찾아가서 무슨 사연이 있기에 화장실에서 울고 있느냐고 물어보니 대뜸 그 포로의 말이 ‘이 놈이 죽일 놈이지요.’ 하더란다. 그러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을 놈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내 아내는 이북에서 교회를 열심히 나갔지요. 그런데 나는 내 아내가 교회에 나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마누라가 집에만 오면 귀가 따갑도록 불러대는 그 찬송소리는 더욱 듣기가 싫었지요. 그 찬송 부르는 소리가 너무나 듣기가 싫어서 아내를 야단도 치고, 때리기도 하고 심지어 찬송 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인두로 입을 지져놓기도 했지요. 그런데 데었던 입술이 회복된 후엔 똑 같은 찬송을 부르는 데 그 찬송은 허구한 날 똑 같은 찬송이니 얼마나 듣기가 싫었겠어요. 야 예수에게 미치면 저토록 무서운 독종이 되는가 보다. 나는 내 아내를 예수에게 빼앗기고, 나는 오직 껍데기 마누라와 사는가보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인민군으로 끌려나왔고, 참전하자마자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어 이곳 거제도 수용소에 오게 되었지요. 그러나 수용소에서 좌익과 우익간의 폭력과 살생이 거듭되는 생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미군 군목이 나타나서 우리 막사의 포로들을 운동장에 한 줄로 세워놓고 여러분 중에 북에서 내려오기 전에 교회에 나가 본 일이 있는 사람은 오른쪽 열로 서시요. 하더란다. 이때 순간적으로 교회에 나가던 사람에겐 어떤 좋은 일이 생기고 살 길이 생길 것 같아서 자기도 오른쪽 대열로 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군목이 교회를 나갔다면 그 증거로 찬송을 불러보라고 하더란다. 자기 앞에 서 있던 사람 중 어떤 이는 통과가 되고 어떤 이는 탈락되기도 하는데 자기는 교회에 나간 일도 없고 찬송도 모르고 공연히 거짓이 들통 나면 더 큰 벌을 받지나 않을까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데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고 하니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야단을 맞으면서 부르고, 매를 맞으면서도 애창하던 그 찬송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더래요. 자기 차례가 되자 자기는 목청을 돋우어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까지는 불렀는데 다음 가사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더란다. 364장 1절 후반부는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가까이 나가기 원합니다.”인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나는고 하니 그렇지 지금 내 앞에 있는 군목은 미국인이기에 한국말을 모리니 임기응변으로 이 위기를 면해볼  심산으로 “다음은 몰라도 나 살고 싶구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라고 끝을 맺으니 그 군목의 입에서 OK하며 통과시켜 주더란다. 이때부터 자기는 새로운 막사에서 좌우익간의 폭력의 위협도 사라지고 예배도 드리고, 대우도 달라져 살맛이 나더란다. 그런데 오늘 저녁 휘영청 밝은 저 달을 보니 저 북녘 땅의 나의 아내도 저 달을 바라보며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비록 내가 포로 신세지만 좌우익간의 폭력과 살생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내의 신앙 덕분이구나 생각하니 그 아내가 그리워지며 눈물이 나며 마침내 대성통곡을 하게 된 연유이지요’ 하더란다. 이 고백을 들은 옥호열 선교사는 후일 그를 신학공부를 시켜 마침내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찬송의 위력은 참전했다가 포로 된 남편의 마음을 변화시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인도하는 놀라운 위력이 있음을 기억하며 찬송하는 삶을 사시기 바란다.

둘째, 찬송은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는 신비한 힘이 있다.
1912년 영국이 자존심을 갖고 진수시킨 세계적 초호화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미국으로 향해 처녀 출항 중 그만 암초에 부딪쳐 침목하고 있었다. 이 배에는 세계의 내로라하는 부자와 사업가 그리고 명사 등 1,500여 명의 여객이 뒤엉켜 크리스마스 축제는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 시간 후엔 이 거대한 여객선이대서양에 침몰할 것이란 급보가 전해지자 모두가 사색이 되어 울며불며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해 한 구석에서 어떤 사람이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소릴 들은 다른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그 찬송을 같이 하다가 이제는 여객선의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전 여객이 함께 합창하던 중 소수를 제외한 승객 전원이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고 한다. 참으로 기이하고 신비한 것은 찬송의 위력은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고 소망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찬송하자.

셋째, 찬송은 원수가 변하여 친구 되게 하는 위력이 있다.
한국전 때 어느 목사가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총살하기 전에 한 사람 한사람에게 소원을 묻고 총살을 하는 데 목사는 맨 마지막 차례였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찬송을 부르겠소 하고 이 목사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 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는 545장의 찬송 3절이 끝날 무렵 지금까지 살기등등하던 그 인민군이 ‘다 끝났어. 이젠 그만 불러’하고는 ‘나도 입대하기 전 교회에 나간 일이 있어.’하면서 ‘어서 피신하시오’하곤 총총히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찬송의 위력은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게 하기도 하는 위력이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찬송 중에 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의 티끌처럼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를 특별히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찬송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길 원해서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엔 완고한 사람을 회개시키는 능력이 있다. 불안과 공포를 몰아내는 위력이 있다.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게 하는 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가르침처럼 시(詩)의 노래인 구창(口唱)과 신령한 노래인 심창(心唱)과 화답하는 노래인 화창(和唱)을 불러 날마다 찬송하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찬송 중에 활력 넘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란다. 찬송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축복 속에 사시기 바란다.  
        

출처 : 윤병상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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