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딤후 2:1-7)
오늘은 금후 1년간 집사님으로서 교서로서 그리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실 분들이 임직하는 주일이기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란 주제의 설교를 준비했다.
사도바울은 성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가르쳐 딤후 2:3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 군사로 다니는 자는 지기 생활에 얽매여서도 안 되고, 자신을 군사로 뽑아준 분을 위하여 기쁘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했고 사도요한은 요한계시록 2: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리라.”고 말한 바 있다. 나를 주의 군사로 뽑아준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이 충성이란 말이다.
그런데 충성이란 용어는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논어에서 주충성(主忠誠)을 말하면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인생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역설했고 희랍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도 진리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라 할 간디는 진리에 대한 충성은 모든 충성에 우선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도대체 충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충성이란 거짓이 없는 것이다. 속이지 않는 것이요, 나의 지혜와 성의와 능력을 다해서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시종일관하게 그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충성 하면 고려 말의 정몽주를 연상한다. 고려 말 조정이 너무나 타락하고 어수선할 때 정몽주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런 시를 주었다고 한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세올 세라
청강에 이껏 씻은 몸 더러 일까 하노라
이와 같은 시를 받은 정몽주는 다음과 같은 시로 그의 어머니에게 대구 했다고 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것이 충성하는 사람의 정신이요 혼이요 기백이요 절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에게 누구에게 충성하느냐 이다. 조직폭력배의 세계에서도 충성과 의리를 지킨다.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들도 충성이란 이름으로 역적모의를 한다. 저 북녘 땅에서는 자그마치 59년 째 세습 독재를 하며 수 백 만의 인민을 굶어죽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김일성에게 충성을 하고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충성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충성이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충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말한다. 하나님이 구세주로 보내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말씀에 대한 충성을 말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 말씀에 대한 충성 그것은 국가나 민족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그래서 신앙의 아버지라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너의 아들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 데리고 와서 내게 제물로 바치라’ 할 때 아브라함은 인륜지도를 범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하려 하였으니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천황을 ‘살아있는 신’ 이라고 하여 이 땅의 모든 우리 겨레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때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 천황보다는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교단에서 추방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투옥되었고 그 중 주기철 목사는 이로 인해 옥사하였다 또한 많은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숭실 전문학교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폐교된 것도 이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였던 사도바울이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권면하길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정병이 되라.”고 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군인에게 있어서 제1차적인 사명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성이다. 충성심 없는 군대는 허수아비요 쓰레기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군인이 국가에 충성하듯 모름지기 우리 크리스천은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상사에 대한 부하의 충성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성서나 역사상의 군인 중 훌륭한 신도가 많았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이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장군이었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그러했고 가이사랴 지방의 고넬료란 백부장이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이 아니었던가!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의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서 아이젠하워가 그러했고 영국이 낳은 정치가 처칠 또한 충성스러운 장군이 아니었던가! 먼저 신실한 크리스천이 신실한 국민이 될 수 있고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성도는 충성스러운 애국자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충성스러운 군사가 가정에서 충실한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스러운 정병이 이웃지간에 신뢰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직장에서 신뢰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너는 무엇보다도 충성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신앙생활을 일요일에 성경 찬송이나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 듣고 헌금이나 드리고 돌아가면 교인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돌아가는 분도 없지 않아 있다. 혹시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으면 다른 분 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교사로서 안내위원으로서 혹은 성가대원으로서 봉사하고 나면 자기 직분을 다한 줄로 여기는 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신자인데 과연 나는 충성스러운 신자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내가 제직인데 과연 나는 충성스러운 제직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내가 교사인데 나는 과연 교사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군사가 되라고 권고했던 사도바울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에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군사가 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한 때 철저한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로서 당시에 새로이 출발하고 있는 교회를 잔해하고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것이 곧 유대교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철저히 뒤져내어 당국자들에 넘겨주고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스데반을 처형하는 일에 합세했던 살인자가 아닌가! 이것으로도 직성이 풀리지 않자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잔해하고 기독교인들을 잡아가지고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넘겨주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후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던가! 바울은 지금까지 그가 자랑해 온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지 않았던가? 아니 복음전파를 위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매도 수없이 맞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고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은 돌에 맞았고 배가 파선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께 충성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지난 2,000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부귀와 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살기를 기뻐하였고 인류의 역사는 이들에 의해 더욱 빛나고 발전해 왔음이 사실이다.
금년은 가톨릭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지 220년이 되는 해요 개신교가 전래된 지 12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개신교 선교 120년 만에 이 만큼 교회가 부흥하고 발전한 경우는 세계 선교사상 드문 일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20여 년 간을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만 부흥시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위해서 크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에 선교사들이 처음 입국할 무렵 우리나라의 조정은 사색당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은 쇠잔하고 당시의 유교는 허례허식으로 인해 그 생명력을 잃었고 불교는 불교대로 지나친 기복주의로 인해 국민에 의해 외면되고 있었다. 이 무렵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도처에 많은 학교를 세워서 우리 겨레를 무지로부터 해방하였고 도처에 병원을 세워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하였고, 도처에 교회를 세워 정신적인 공황과 우상과 미신의 노예에서 해방하였고 나아가서는 소위 양반과 상놈이란 잘못된 천민 사상과 남존여비란 그릇된 악습에서 천민과 여성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준 것이 또한 기독교의 공헌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정신적인 근대화를 위해서나 사회발전을 위해서 크게 공헌한 집단이 있다면 어느 종교집단 보다도, 어느 사회집단보다도 기독교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자 한 사람들의 기도와 땀의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군사 되기 위해 입대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정병이 되어야 하지 오합지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기드온의 300용사처럼 정예화된 군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 되는 필수요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분문에서 네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였다.
군인에겐 군인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조국과 민족의 제단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바쳐 싸우겠다는 투철한 애국정신이 있을 때 승리할 수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좋은 군사는, 세상의 군대가 사사로운 일에 얽매어서 안 되고 오직 상사의 명령에 따라 나라를 위해 내 생명 바치겠다는 각오로 정신무장 되어 있어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좋은 군사임을 자임하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군인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 안에는 군입대형 신도보다는 사교클럽 가입형 신도가 더 많지 않은가 여겨진다. 군 입대와 사교클럽 가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젊은이가 입대를 하면 입대를 하는 그 시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부대장의 명령에 따라 말해야하고 행동해야하고 살아야한다. 정예 화된 군인에겐 오직 명령에 대한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교클럽에 가입하는 사람은 그 클럽에 나갈 수도 있고 안 나갈 수도 있다. 회원의 의무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 클럽에서 탈퇴할 수도 있고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기도한 이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하여 어찌해야 할까? 정예 화된 군사가 항상 병영에만 머물러야 하듯이 우리도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아니요’가 아니라 항상 ‘예’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19-20절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예’만 하고 ‘아니요’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항상 ‘예’ 하고 ‘아멘’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겐 부단한 훈령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은 패망하기 때문이다. 역전의 용사는 훈련에 게으르지 않는다. 역전의 용사가 매일 같은 일과를 계속함에도 불구하고 불평하지 않듯이 신실한 크리스천은 매 주일을 ‘주님의 날’로 기억하고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영성훈련에 게으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영성훈련에 힘쓰는 사람은 어떠할까? 이사야 40:31절에 보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으리라.”고 하였듯이 예수님의 선한 군사된 우리도
항상 여호와를 사모해야한다.
항상 예수님을 사모해야한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의 기상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수 있다.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달려가도 피곤치 않을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겐 좋은 무장이 필요하다.
현대전에 승리하자면 좋은 전자무기가 필요하듯이 우리 크리스천이 승리하는 비결에도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4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동여라. 의의 흉배를 붙여라. 복음의 신을 신어라. 믿음의 방패를 가져라. 구원의 투구를 써라. 그리고 말씀의 검을 가져라.”라고 하였다. 무기 없이 전쟁에 나가 승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에겐 진리의 허리띠가 단단히 매어져 있는가? 여러분 가슴엔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확신이 있는가?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신이 신겨 있는가? 여러분 머리엔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확신이 있는가? 여러분의 손에는 악인의 모든 시험과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신앙의 방패가 들려져 있는가? 여러분의 다른 손에는 말씀의 검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는지를 이 시간 점검하기 바란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군율에 따라 살아가야한다.
사도바울은 본문 5절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에 따라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듯이 일단 군에 입대한 군인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된 우리도 내 뜻을 예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살아야한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암흑의 세력, 불의한 세력, 잘못된 사상과 이념, 그릇된 구습과 악습을 과감히 타파하는 전쟁에 동참해야한다.
16세기 스페인의 귀족의 아들이었던 로욜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크게 부상한 바 있다. 그가 오랜 병상 생활에서 기도하던 중 깨달은 것은 이제 군인으로 영웅 되는 길은 끝났으니 예수님의 좋은 군사로 살기로 결심하고 소위 “예수회”를 조직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이란 뜻으로 이 수도회에 속한 수도사들은 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한 수도사들로서 연단을 받고 세계 도처에 대학을 세워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해외에 나가서 선교하기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강대학교도 이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 역시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후 평생 군복을 입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세계도처에 흩어져 봉사하고 전도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인해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혼란 가운데 있고 경제적인 침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실직한 채 방황하고 있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적으로 공황에 빠져있다. 이런 때 일수록 주님은 충성스러운 주님의 선한 군사를 찾고 계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가 되자면 가정에 충실해야하고 직장에 충실해야하고 교회에 충실해야하고 더 나아가 국가 등 매사에 충실해야한다.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만이 마지막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리라고 약속한 바를 기억하시기 바란다.
출처 : 윤병상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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