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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지상 낙원의 환상 (행4:32-35)

by 【고동엽】 2022. 9. 20.

지상 낙원의 환상  (행4:32-3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시편 84:10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 많은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사는 것보다 단 하루를 살아도 낙원과 같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곳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줄 압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점점 살아가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매년 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세를 믿지 않고 오직 삶은 현실뿐이라고 생각하며 더구나 죽으면 아무 일도 없는 줄로 알고, ‘차라리 고생할 바에는 죽자’라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될수록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 이 땅에 지상낙원이 이루어질까 또 이 세상 어디에 지상낙원이 있을까 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지상낙원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쓴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서로 돕고 나누면서 모두가 다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기를 “이 기사를 읽고서도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강철보다 더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곳이야말로 지상낙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1. 모든 사람의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했기 때문
사랑은 한마디로 ‘주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사랑한다고 하면 아낌없이 줄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희생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도우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상낙원이 되려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살기 좋은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옛날 희랍 전제국가의 한 왕이 자신을 더 즐겁게 하기 위해 상금을 걸고 ‘쾌락지수와 행복지수를 높이는 방법’을 공모했습니다. 그러자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나왔습니다. 이 방법들을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왕이 기쁘고 행복하기는 커녕 도리어 불만과 갈증만 더해 갈 뿐이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왕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들을 모두 사형시켰습니다. 그 후 새 아이디어를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린 소녀가 행복하기 위한 새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며 왕을 찾아왔습니다. 그 소녀는 왕의 면전에서 마치 꾸짖는 듯한 눈빛으로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왜냐하면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쁨과 행복을 원하신다면 남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왕은 숙연해지더니 두 눈에 눈물이 맺히며 “딸아, 너의 말이 옳도다.”하고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행복이라는 것은 자기만 기쁘게 하고 자신만 즐기려고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즐겁고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미국 뉴욕시의 즉결심판부에 라구아디아라는 유명한 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이 많은 노인이 빵을 훔친 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판사님, 저는 사흘을 굶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가 너무 고파 가게에서 빵을 훔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라구아디아 판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의 절도 행위는 벌금 10달러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지갑에서 돈을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그는 다시 방청석을 향해 “이 돈은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많이 먹은 죄에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시다면 이 모자에 돈을 담으십시오.”라고 제안했습니다.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은 즉석에서 47달러를 모았습니다. 라구아디아 판사는 이 돈을 그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은 울먹이며 “고맙습니다. 이제부터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다시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며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후에 판사의 명판결이 시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나중에 뉴욕 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래 전 어느 잡지에 실린 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돈리라는 사람이 추운 겨울에 직업을 잃었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그는 굶주림에 지쳐 할 수 없이 구걸에 나섰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고급 식당 앞에 서서 한 쌍의 부부에게 동정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지나가던 한 여인이 이 광경을 보고 1달러를 주면서 “용기를 잃지 마세요. 당신이 곧 직업을  얻도록 기도할께요.”라고 말했습니다. 돈리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이 여인은 “이것은 동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이 떡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하세요.”라고 말하고 갔습니다.
돈리는 우선 1달러로 요기부터 하고 50센트를 남겼습니다. 그때 마침 한 노인이 부러운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돈리는 남은 돈 50센트를 꺼내 빵을 사서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노인은 빵을 조금 떼어먹다가 남은 빵 조각을 종이로 쌌습니다. 돈리가 “내일 먹으려고 합니까?”하고 묻자 이 노인은 “아닙니다. 저 길에서 신문을 파는 아이에게 주려고 합니다.” 노인이 소년에게 다가가 빵을 건네자 이 아이는 좋아하며 빵을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길 잃은 강아지가 빵 냄새를 맞고 꼬리를 치며 다가왔습니다. 이 소년은 조금 남은 빵 부스러기를 개한테 주었습니다.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신문을 팔러 뛰어갔고, 노인도 일감을 찾아 가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이렇게 있을 순 없지.” 생각하는 순간 강아지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돈리는 길 잃은 개의 목걸이에 적힌 주소를 보고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주인은 매우 고마워하며 10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같이 양심적인 사람을 내 사무실에 고용하고 싶소, 내일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돈리도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나가는 한 여인의 1달러가 나누어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남에게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먹던 빵 조각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사람들로 인해 지상 낙원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대개 임종하려는 사람은 세 가지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좀 더 베풀며 살 수 있었는데 너무 내 욕심만 채우며 살았다는 후회와 좀 더 잘 참고 인내하고 살지 못한 후회와 나누며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순결과 거룩입니다. 그리고  자비와 인애와 사랑입니다. 항상 남을 생각하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모든 사람이 자원하여 기쁨으로 나누었기 때문
누구의 강요에 의해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나눈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자원하여 자유롭게 형편대로 나누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나누었다면 반드시 불평불만이 일어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곤하고 부담스러워지며 기쁨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진정으로 한가족처럼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기에 핍절한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하여 ‘자원하여’, ‘기쁨으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산주의자들도 이 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빈부귀천이 없고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똑같이 나눠먹고 모든 혜택이 누구에게나 골고루 돌아가는 그런 공평한 세상을 만들면 가장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달콤한 환상적인 이론이기에 누구나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문제가 아주 많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런 세상을 만드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람의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이렇게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은 정권을 왕에게서 빼앗아 노동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의 땅과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면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살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공산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잡아넣었습니다. 러시아에서만 6천만 명을 죽였으며, 북한정권도 많은 사람을 죽였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지 모릅니다.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국가소유로 착취했습니다. 모든 자유를 다 박탈했습니다. 주거, 통신, 언론, 직업선택, 출판의 자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은 많이 시키고 배급은 적게 주었습니다. 점점 일반 대중들의 생활은 피폐해져간 반면에 공산정권을 잡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호위호식하며 잘 살게 되었습니다. 독재정치로 반대파는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모든 국민은 독재자를 위한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밥 세 끼를 먹는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가 없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모든 국민들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낙이 없고 희망이 없다보니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생기고,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똑같이 받다보니 무능한 척 요령만 늘고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연히 생산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아무도 결과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기계는 녹슬고 고장이 나서 결국 공산주의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레닌은 죽기 전에 공산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현대무실론의 장』을 보면, 1924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가까운 친구와 전에 학생으로 자기를 따르던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피압박 대중은 자유를 얻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가 취한 방법은 한층 압박과 잔악한 대학살만을 선동했을 뿐이었다. 생사의 악몽에서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망망대해 가운데 버려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지난 일을 뉘우치기에는 이젠 너무 늦었다. 러시아를 구하는 데에는 열 명의 아시시 프랜시스가 필요했다. 열 명의 아시시 프랜시스와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러시아를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시시 성 프랜시스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고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았던 기독교사의 위대한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공산주의의 꿈을 가진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공산주의 김정일 정권과 손잡으면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꿈에서 깨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여기서 주장하지 말고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일본에 살던 조총련계의 수십만 명이 북한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사람들은 죽이고 감옥에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지상낙원은 공산주의로는 결국 얻을 수 없습니다. 지상낙원은 오직 성령충만함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사랑이 충만해지며, 희락이 넘치게 되고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온 가족이 성령충만하면 가정이 지상낙원이 되고, 온 교회가 성령충만하면 교회가 지상낙원이 되며, 그 나라가 성령충만하면 나라가 지상낙원이 되고, 온 세상 사람들이 성령충만하면 지상낙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65:17~25에서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찌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의 건축한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이사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면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속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기쁨으로 자원하여 서로 나누며 살아가므로 가정과 교회를 지상낙원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여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충만한 은혜를 받게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한다면 이보다 더 한 영광과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항상 준비해야 할 것은 언제 죽어도 주님 앞에 흠과 티와 책망 받을 것이 없는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언제 주님이 재림하셔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은 항상 성령충만한 가운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출처/정필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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