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인생을 무엇으로 달게 합니까? (출애굽기 15장22~26절)
이스라엘백성들이 약 430년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종으로 간 것이 아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정말 모진 고생들을 하면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이 고통에서 놓임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간구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애굽에 보냈습니다. 마침내 애굽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어 출애굽하게 됩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했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 관문은 홍해를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200만이라는 되는 큰 무리가 어떻게 홍해를 건넜을까요? 그 많은 무리가 배를 타고 건넜을까요?
바로는 출애굽을 허락했지만 다시 그들을 잡아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왔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바로가 애굽의 군대를 이끌고 옵니다. 이런 사면초가적인 상황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큰 바람을 불고 와 홍해 바다를 갈라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젖은 땅이 아니라 마른 땅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200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그 길을 건너 바다 저편으로 가게 됩니다. 뒤에 추격해 오던 애굽의 병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 마지막 한 사람이 홍해를 건너자 다시 합쳐시는 바다에 빠져 다 수장되고 맙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래서 출애굽기 15:1-21까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미리암의 찬송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격하여 찬송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다시 거기서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강한 뙤약볕과 바람 한 점 없는 광야길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수루광야로 들어가 3일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곳에 가보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 시간도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 길을 3일을 가는데 가져온 물도 다 떨어지고 목이 너무나 갈하였습니다. 저도 군시절 훈련을 받다가 너무 목이 말라 논의 물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갈하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3일길을 가니까 한 지역에 물이 있는 겁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달려가서 물을 손으로 쉬고 떠먹는데 물이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어요. 마치 독물과 같아요. 왜냐하며 그 지역은 홍해의 바닷물이 쓰며든 땅이고 그 땅밑은 석회질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바다의 짠물과 석회질이 뒤섞여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은 타고 물은 보이지만 그 물은 너무 써서 먹을 수가 없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합니다. 종의 근성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부르짖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 살려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저기 보이는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물 속에 던져넣어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뭇가지를 물 속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물맛을 보니까 물이 정수가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정수가 되어 모든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원망과 불평은 다 사라져버리고 공동체가 은혜를 덧입게 되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쓴 인생, 그 쓰디쓴 물이 어떻게 달게 되어질 수 있었는가하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마라의 쓴 물은 오늘날 광야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 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수천년전의 문제로 끝나는 옛날 얘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저와 여러분이 광야길을 걸어가면서 만나게되는 마라의 쓴물이며 환경입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어떤 분은 갑작스럽게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마라의 쓴물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좋지 않은 것같아서 병원에 갔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질병의 쓴 물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은 사업의 실패로 쓴물을 만납니다. 실직으로 쓴물을 만납니다. 사기를 당해서 쓴물을 만납니다. 어떤 분은 이혼의 쓰디쓴 마라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우리의 모든 웃음을 아사가 버리는 마라를 만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 교우들을 심방하다보면 정말 함께 울지 않을 수 없는 쓰디쓴 마라를 만나 너무나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보게됩니다.
너무 사는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예기치 않았던 마라의 쓴 물을 만나서 쓰디쓴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온 교우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시간 말씀을 선포하면서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도 쓰디쓴 마음을 가지고 주의 백성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의 심령이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달게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경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을 소망하세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쓰디쓴 우리 인생이 아름답고 강한 인생으로 바꿔질 수 있을까요?
오늘날 과학이 발달해서 소금물도 정화하여 식수로 사용하는 시대입니다. 포항제철에도 공업용수로 씁니다. 이 만큼 발달했습니다. 아주 쓸모없는 늪지대도 좋은 공법으로 그 위에 빌딩을 세우고 아파트 단지도 건설합니다.
김포가다 보면 난지도가 있습니다. 그 난지도는 쓰레기가 가득했던 쓸모없는 냄새나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보십시오. 깨끗하게 정리되어 그 위에는 골프장도 있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원이 되었습니다.
과학은 우리들이 보는 여러 가지 것들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쓰디쓴 것은 그 무엇으로도 달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적 지식이 발달해도 우리 안에 있는 이 쓴물, 우리 가정에 쓰며든 이 쓰디쓴 인생의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는 달게 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쓰라린 마음을 달게 해보려고 밤새껏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고 온갖 짓을 다 해봅니다. 그러나 더 쓰디쓰게 됩니다.
며칠전에는 어떤 술집의 호스티스가 자살을 했습니다. 애인이 탈랜트입니다. 연예를 하다가 그 관계가 멀어지니까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자신의 그 쓰디쓴 인생을 좋은 남자를 만나 단 인생으로 바꿔보려고 애를 썼는데 버림받았습니다. 더 인생이 써졌습니다. 견디지 못해서 자살로서 인생을 끝냈습니다.
우리의 쓰디쓴 인생을 무엇으로 달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달게 변화시킬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쓰디쓴 우리 인생을 달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쓴 인생을 우리가 달게 하려면
첫째, 쓴 물을 만났을 때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마라의 쓴물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의 근성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치자 삼일 전에 그렇게 찬송했던 그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원망은 독소와 같습니다. 원망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냥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여러분, 이 원망이 무섭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만들려면, 우리의 쓰디쓴 상황을 달게 만들려면 가장 먼저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마음에 세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죄인의 마음속에는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자 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일어납니다.
애덴동산에서도 그런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범죄한 후 아담은 하나님을 망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라고 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원망했습니다. 원망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원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일을, 어떤 쓴 마라의 물을 만나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원망하지 맙시다.” 원망은 우리를 죽이는 겁니다. 함께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욥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욥을 대단히 칭찬했습니다. 욥에게 어느날 갑자기 쓰디쓴 마라가 그에게 부딪쳐왔습니다. 하루 아침에 수 많은 재산이 날라갔습니다. 하루 아침에 칠남삼녀가 죽었습니다. 자신의 몸에는 악창이 돋아났습니다. 무서운 질병에 걸렸습니다. 이런 쓴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상상하지도 못했던 어려운 마라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욥기 1:21에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렇게 하자 하나님은 욥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따라합시다.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일을 당했지만 욥은 어리석게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원망하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은 욥의 그 쓰디쓴 인생을 단 인생으로 회복시켜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지구촌을 글로벌시대로 만든 최초의 장본인은 징기스칸이다.” 몽고의 그 작은 족속에서 세계를 움직인 지도자가 나왔는지를 평가를 했는데 그는 탁월하게 남을 탓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나의 직업이었고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와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 않는 곳에서 태어났다. 배운 것이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는 그 정신 때문에 세계를 글로벌 시대로 이끌어내는 최초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을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예외없이 마라의 쓴 물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나만 혼자 겪는 고난이냐고”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제가 가사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왜 나만 혼자 겪는 고난이라고 원망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켜 앉아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나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아멘
원망하지 않아야 쓸물을 단 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백성이 마라의 쓴 물 앞에서 거침없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원망에 익숙한 생활을 사백년동안 해 왔습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원망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 상황에서 다시 홍해를 건넌 감격도 잊은 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런 상황속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 백성을 구원해 주옵소서.”
믿음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기에 원망을 기도로, 부르짖음으로 바꾼 줄 믿습니다. 이게 위대함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부르짖지 않습니다. 계속적으로 원망하고 시간을 보냅니다.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원망하기 때문에 더 쓰게 되고, 더 못쓰게 되고, 더 않좋은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모세는 원망대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에...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부르짖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부르짖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나를 보세요. 결혼해서 사는데 둘째 부인이 들어와서 애기를 낳았습니다. 그 애기를 안고 한나 앞에서 자랑합니다. 애기를 가지지 못한 하나의 마음은 얼마나 상하고, 얼마나 쓰디썼겠습니까? 여인에게 이것보다 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나는 하나님은 믿었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더 쓰게 되고, 남편만 쳐다봐도 인상을 찡그리고, 짜증부리고, 브닌나만 보면 투정을 부려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내 쓴 마음이 해소되지 못하면 남까지 쓰게 만듭니다.
내 마음이 써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온 가족의 마음을 쓰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 마음까지 상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어내고 맙니다. 한나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한나 때문에 온 가족이 너무나 너무나 괴로운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어느날 한나의 마음속에도 “나도 하나님께 부르짖어야지. 나도 하나님께 기도해야지”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해 실로에 제사드리러 갈 때 한나는 결심하고 올라갑니다. “내가 이번에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내 인생의 쓴물을 달게 만들겠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내가 믿는다.” 그래서 그 때 올라가서 금식하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소리없는 부르짖음, 엄청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돌아갈 때는 기쁨이 충만하여 돌아갈줄 믿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부르짖어야 됩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가다가 쓴물을 만날 때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는 모세와 같은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모세는 부르짖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부르짖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과같은 기도의 사람이 없습니다. 시편을 읽어 보세요. 다윗은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시편 5:2에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시편 18:6에도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편 28:2에도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120:1에도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는 부르짖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쓴 마라를 무엇으로 해결하겠습니까? 어떻게 그 쓰디쓴 인생을 달게 만들겠습니까?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 나와서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에 남자성도 한분이 보증을 잘못 써서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차압이 다 붙고 집도 날라가 버렸습니다. 형편없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낙심하고 소망없이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분 마음속에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나도 목숨걸고 하나님께 매달려보자. 이제 남은 것을 기도밖에 없다.” 그래서 이분이 새벽기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저녁에도 교회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귀한 사업의 영감을 주셨습니다. 자신이 얻은 작은 집의 공간에 두평도 안되는 가게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인형가게를 열었습니다. 생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인형가게는 신데렐라같은 이쁜 인형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배추머리 인행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템을 주신 겁니다. 부르짖는 자에게...가게을 열었더니 동네방네에서 아이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습니다. 짧은 시간안에 모든 것들이 회복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쓴 마라에 봉착해 있습니까? 괴로워서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염려하지 마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실 거예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인생의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 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나뭇가지를 물속에 던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나뭇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나무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유월절의 어린양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주셨고, 이 쓴 물을 달게 하는 나뭇가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
나뭇가지를 물 속에 던졌을 때 물이 달아졌더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달게할 수 있는 분은 예수 박에 없음을 반드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열어보면 모든 쓴 문제, 죄악의 쓴 뿌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을 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단코 쓴 인생을 달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잠시잠시 돈을 써보고 즐거움을 누려보지만 잠시있다가 다 사라지는 겁니다. 진정한 해결은 있지않더라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그곳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물이 달아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심령에 찾아오시고 내 가정에 찾아오실 때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오시면 우리 죄를 다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하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쓴 인생을 달게 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속에 들어오니까 죄가 용서되니까, 쓴 물이 단 물로 변화되요. 예수님의 사랑이 내 속에 들어오니까 미움이 사라지는 줄 믿습니다. 내 마음속에 미움이 사라지까 단물로 변화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들어오시기까지는 용서가 안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미움과 분노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워있는데 어떻게 단물로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시니까 욕심이 물러가고 예수님 들어오시니까 겸손해져서 내 인생이 단물로 변화되는 겁니다. 절망했던 사람이 그 마음속에 예수님 영접하니까 소망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물가의 여인, 다섯 남편을 바꿔보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내 남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 품에서 저 사람품에서 내 인생의 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발버둥쳤지만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를 만났어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인생이 단 인생으로 변화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됩니다. 따라합시다. “오직 예수!” 오늘도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 속에 오시면 우리의 쓴 마음이 단 마음되고, 우리의 쓴 가정이 단 가정이 됩니다.
주님이 오지 아니하시면 서로 원망하고 물고 뜯고 싸우고 평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쓴 인생을 어떻게 할까요? 첫째, 원망하지 하지 마십시오. 둘째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주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따라갈 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쓴물을 단 물로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출처 : 최낙보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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