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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열왕기하 5장 8-19절)

by 【고동엽】 2022. 9. 19.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열왕기하 5장 8-19절)


어떤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일단 해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성공의 지름길로 이어지는 경우도 자주 생깁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장로님께서 지금은 어엿한 중기업으로 자란 저울회사를 처음 시작하실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전자저울이라는 것이 생소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장로님께서는 그것을 판매할 시장을 개척하시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울 수요의 대표적 부류인 상인들이 도통 전자저울을 사려고 하지 않았고, 주변의 사람들도 장로님을 만류하면서 그 사업을 포기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인들은 다 저울을 적당히 속여서 남겨먹으려는 사람들인데, 그처럼 정확한 계량이 나오고 또 스스로 몰래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한 전자저울을 누가 사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로님께서는 달리 생각했습니다.
  상인들의 심리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는 구식 저울에 달아주는 것을 살 때에는 속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불안해하지만 전자저울로 계량해서 파는 것에 대해서는 훨씬 더 신용을 가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두 상점들이 나란히 있으면 자연히 전자저울 있는 쪽으로 소비자들이 더 많이 오게 될 것이고,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 상인들 역시 전자저울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자저울 장사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고정관념이었지만, 장로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이와 같이 깨뜨림으로서 당신의 벤처기업을 크게 성공시킨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바로 그런 고정관념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찾고 신앙의 문을 노크하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이 어떤 고정관념의 틀을 깨지 못하고 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까닭에 참된 신앙생활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 완전히 한 꺼풀 벗고 진짜 신앙인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꼭 극복해야 할 고정관념들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리아' 즉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도 원래는 그와 같은 고정관념에만 빠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갈등 끝에 마침내 그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하나님 모르던 이방 족속 중에서 일약 구원 얻은 신자의 반열 속으로 하루아침에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바로 그 나아만의 체험을 통하여서 오늘 우리가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꼭 돌파해야 할 고정관념이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참된 신앙은 '내 생각'을 승화시켜서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줄 알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나아만이 원래 가지고 있던 '내 생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본문 8절부터 12절에 "8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9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1절에 있는 대로 나아만은 "큰 용사"로서 일국의 "군대장관"까지 되었지만 "문둥병자"라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자기가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계집아이를 통하여 엘리사 선지자의 명성을 듣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엘리사의 집 앞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찾아온 나아만에 대하여 엘리사의 반응은 그로서는 전혀 기대 밖이었습니다.
  이웃 강국의 참모총장이 친히 문 앞까지 찾아왔는데도 엘리사는 집안으로 청해 들이기는커녕 그저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면 나을 것이다."라고 말 한 마디만 전해주고는 자기 자신은 코끝도 내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대노하여 당장 발길을 돌리면서 "내 생각에는"하면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 나아만의 생각이란 첫째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생각에는 자기 자신이 그만큼 멀리서 찾아오는 정성을 보였으면 당연히 선지자 엘리사가 자기에게로 나아와서 자기 소원을 위해 서비스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란 신이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엘리사가 모시고 선지자 노릇하는 신이라고 하니, 그 신에게 자기 대신에 부탁을 해서 자기 소원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것이 선지자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나아만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든, 하나님 모신다고 하는 선지자이든 하여튼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한번 부탁해서 써먹을 수 있는 존재 정도로 여겼던 것이 바로 나아만의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 나아만의 생각이란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어떻게 해 줄 것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이기도 했습니다.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오기 이전에 벌써 자기 문제를 어떤 방법을 통해 해결해줄 것이라고 스스로 이미 다 예상, 아니 아예 작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 문둥병의 환부 바로 위에 엘리사가 손을 흔들어서 낫게 해 주는 방법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밑도 끝도 없이 요단강에 가서 목욕 일곱 번 하라고 하니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자기 문둥병이 나을 리 없다는 것이 나아만으로서는 의심할 여지없는, 정말 자기 딴에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 지저분한 요단강에서 목욕하여 나을 병이라면 차라리 자기 나라의 아름답고 깨끗하기로 이름 높은 강에서 목욕하는 것이 백번 더 나을 것이 당연히 여겨졌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사람이 그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산다.'는 가르침보다는 '교회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잘 되게 해 주기 위해 있다.'는 말은 '내 생각'에서 판단해볼 때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정말 당연하고 훨씬 사리에 맞게 여겨집니다.
  또한 신앙생활하고 교회를 이끌어가는 방법들에 대해서도, 뭐 일부러 성경 들추어볼 필요도 없이 그저 '내 생각'만 이용해도 상식적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지는 아이디어들이 얼마든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그처럼 소위 '논리정연하고 사리에 맞는 내 생각'들이 교회 안에서 수용되어지지 않는다고 "노하며 분한 모양"으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까? 하지만 만약 나아만이 그 당연해보이고 그 이치에 맞아 보이고 그 의심할 바 없어 보이는 자기 생각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구원 얻는 믿음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다행히도 어떻게 그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까?
  13절과 14절에 "13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4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에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하기에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씻는 것은 상식적으로 얼른 이해하기는 좀 어렵다 하더라도 한번 그대로 따라 해보기는 그렇게 힘든 말씀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조언을 따라 나아만이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당장 깨끗함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답답해 보이고 귀찮아 보이더라도, 아무리 내 생각이 그보다는 훨씬 더 똑똑해 보이고 간단해 보여도, 바로 그 고정관념을 깨뜨리지 못하고서는 평생 그저 신자 견습생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좀 하다 보니 여러분의 머릿속에 좋은 노하우들이 많이 떠오르십니까?
  신앙생활 연륜이 좀 되었다고 해서 여러분의 생각 속에 어떤 새롭고 깊은 진리들이 막 생성되는 듯 싶습니까?
  그런 '내 생각'들은 여러분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로막고 있는 최대의 장애물인 줄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보다 더 깊게 진리를 깨닫고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든지 "이런 경우에는 어느 쪽이 옳을까?"라는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명상하고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여러분의 신앙을 향상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성경에서 명령하셨던가?,"라든지 "이런 경우에는 어느 쪽이 옳다고 성경에서 가르치셨던가?"라고, '내 생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 잡게 될 줄 알아야만 진짜 신앙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란 사람의 생각을 고차원적으로 발전시키고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에 대하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고정관념입니다.
  내 마음 속의 잡념을 없애고 내 사고를 순화시키고 내 머리로 무언가를 깨닫고 내 사상이 고취되고 내 생각이 드디어 득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들은 결코 참된 신앙일 수가 없으며 끝까지 '자기 욕심의 발로'나 '자아도취의 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오직 '내 생각'들은 깨끗이 비워지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채워짐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것 통과하지 못하면 절대로 참된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내 소원, 내 방식, 내 아이디어'라는 것들로부터 탈피하여 먼저 그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고 익히고 실천함으로써 정말 신자다운 믿음을 얻고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주고받는 예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진정으로 '예배'할 줄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문둥병 고침을 받은 후에 나아만이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도 처음에는 그저 자기가 다른 이방신을 섬길 때 행하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15절과 16절에 기록하기를 "15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16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고 했습니다.

  자기 문둥병이 나은 것을 보게 된 나아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사례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감사의 뜻을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림으로써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5절에 보면 그는 처음에 아람에서 떠나올 때부터 이런 때를 대비해서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 등 엄청난 액수의 사례금을 미리 준비해왔던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의 이런 행위는 일견 지극히 온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이런 감사의 예를 표하면서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니이다"라고 유일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행위에는 아직까지는 매우 중대한 오류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병 나은 일을 두고 하나님께 진정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그저 선지자 엘리사에게 물질을 가지고 사례하는 것으로 다 될 줄로 여긴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엘리사는 그런 예물은 결코 받을 수 없다고 맹세했고 또한 끝내 고사(固辭)했던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의 그 같은 행위는 아직 신앙의 표현이라고 불릴 수는 없는, 그저 세상에서 은혜 입은 다른 사람에게 정중히 예의를 차리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종교인들이 그저 이와 같은 'give and take'로만 신과 자신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무당 앞에서 가서 점괘를 받으면 자기는 복채를 줌으로써 그 관계가 깨끗이 해결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혹은 회사를 시작할 때 돼지머리 하나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면 복이 내릴 것이라고, 신에게 먼저 무언가를 주면 자기에게도 무언가 돌아올 것이라고 계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식의 고정관념에 잡힌 교인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천번제'니 하면서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을 생각은 전혀 없이 무조건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주셔야만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교회에 무슨 한 가지 봉사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만 가지고도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할 일 다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계산을 맞추어놓고서 다른 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도 하지 않고 헌금생활에는 아예 자칭 열외가 되어 있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 가지고 무슨 신앙생활한다고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는 '세리나 이방인'도 할 줄 아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감옥의 죄수라 할지라도 목사가 가서 예배를 드리고 위로해주면 그 정도 감사는 할 줄 알고 불신자라 할지라도 교회에서 무슨 구제를 베풀어주면 그 정도 사례는 기본적으로 다 할 줄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런 식의 '주고받는 예의'의 수준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아만은 그 고정관념을 어떻게 벗어났습니까?
  17절 이하 19절에 "17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9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도 나아만의 신앙이 아직까지는 완전히 성숙되지 못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져가서 자기 나라 땅 어느 한 곳에 뿌려 그 곳을 거룩한 땅으로 삼겠다고 말한 것은, 나름대로는 좋은 뜻으로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알지 못한 까닭이기도 했습니다.
  또 자기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해야 하는 직무상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혀야 할 일에 대하여 엘리사 앞에서 미리 용서를 구하는 것 역시 아직 약한 신앙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사가 그런 요청에 대하여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저 "평안히 가라"고만 대답한 것은, 이제부터 문제는 나아만 자신의 신앙양심에 맡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가 앞으로는 자기가 드리는 어떤 제사이든지 간에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께"만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엘리사에게 감사예물 조금 드리는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다가, 엘리사가 끝내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나아만은 정말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한번 인사 치례하는 식으로만 모셔서 될 신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저 선지자에게 선물 한번 주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 직접 평생토록 계속하여 제사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섬겨왔던 우상종교에서는 이 신, 저 신 다 같이 믿고 제사지내도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 우상신들은 모두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드려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한 분만을, 모든 힘을 다하여서, 남은 평생을 바쳐서 경배하며 섬기는 것만이 이제부터 해야 할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의 길인 것을 나아만이 깨닫고 서원하게 됨으로써,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우상종교를 믿으면서 행해왔던 크나큰 고정관념의 틀을 완전히 깨뜨려버렸던 것입니다.

  예배에 출석하는 것조차도 실상은 진정한 경배가 아니라 그저 예의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그저 몸만 참석해 있으면,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신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면서 그 신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과 오십보백보가 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식'으로 끝나서는 아니 되고 반드시 '예배'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의 순서'에만 같이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교인들 앞에서나 목사 앞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고 하나님과 함께 긴밀하게 영위되고 있는 것인지를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들끼리 서로 대접하고 교제하는 것 물론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께서 성도들을 청해서 음식 대접하거나 함께 놀러 갈 때 쓰는 돈은 남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꽤 신경을 쓰면서도,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대해서는 마치 알 사람이 없다는 투로 아무 정성을 들이지 않거나 혹 속이기까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우리 목사님이 참 좋습니다."라는 말은 비록 인사치례일지라도 듣기에 싫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목사가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여러분께서 목사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아버지이신지를 백배 더 뜨겁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주변의 성도들과 교역자들과 더 가까워지고 더 사랑하며 사귀는 것은 물론 신앙생활 성장에 좋은 현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신앙생활의 본질은 그처럼 교회 안의 사람들과 서로 예의를 지키고 점잖게 교제하는 것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런 생활에서 반드시 한 꺼풀 더 벗고 통과해 나가야만 진짜 신자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이 곧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힘을 다해 섬기는 신전인격자적인 예배생활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매일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경건생활들은 절로 다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실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화생활은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죄악된 행위들은 하나씩하나씩 절로 다 벗게 되어 있습니다.
  '신전인격'이 먼저 갖추어지면 '신행일치'는 절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참된 신앙을 얻은 후에 그 다음 단계로 따라오게 되는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그저 하나님과 적당히 '주고받는 예의' 차림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예배'를 통하여 진정한 새 삶에 정착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처음에는 단지 자기의 문둥병을 고치려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던 나아만은 그 병 고침보다 훨씬 더 귀한 축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모를 때 가지고 있던 편견과 착각을 그날 하루를 통하여 한꺼번에 벗어버리고 '말씀 중심의 참된 신앙,' '예배 중심의 바른 생활'로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오른 진짜 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나아만을 가리켜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십니까?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눅 4:27)고 하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 믿고 섬기는 신앙생활을 이방 민족들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 훨씬 불리하고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이방 출신 나아만이 놀랍게도 구원 얻는 자리에 확실히 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내 생각'에서 나온 종교심과 '신과 주고받는' 종교생활이라는 두 가지 고정관념을 탈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수리아 사람 나아만'보다 더 좋은 조건, 아니 신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좋은 조건 가운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생활이 왜 여전히 제자리걸음하고 있는지, 왜 더욱 강해지고 뜨거워지지 않는지,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내 생각'만 가지고 신앙을 정의하고 판단하려는 나쁜 고집이 나를 교만의 자리에 묶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사람 앞에 보이는 약간의 체면치례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적당히 덮어버리려는 고질적인 습관이 나를 지금까지 영적 미숙아로 남겨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콜럼부스의 '달걀 세우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달걀을 세울 때 끝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저 지구가 평평하고 바다 끝에는 끝없는 낭떠러지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당연해 보이는 상식과 선입견을 깨뜨린 사람은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던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방식, 내 계산, 내 체면'의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교인은 평생을 교회 출입을 하고 성경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우물 안의 종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말씀 순종으로 참된 신앙을 키우며 오직 하나님만을 진정 경외하는 예배로써 생활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주님의 생명책에 진짜 구원 받은 신자로 그 이름이 확실히 등록되어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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