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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땅 보다 높음 같이 (이사야 55:6~13)

by 【고동엽】 2022. 9. 19.

하늘이 땅 보다 높음 같이   (이사야 55:6~13)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를 가리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였습니다(히 3:1).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사 66:1). 성도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옛날 성도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하였습니다(시 73:28). 그렇지만 범죄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그리 용이하지 않습니다.
본문말씀 9절에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도록 다른 차원의 세계이지만 신앙은 항상 그곳을 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늘과 땅의 의미

이사야 49:13에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은 모두 하나님의 활동영역으로써 다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1) 자연적인 개념

창세기 1:1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땅 곧 지구 밖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우주 공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이라고 말할 때 이는 지구 땅덩어리와 대칭되는 개념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땅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동, 식물이 생성변화 하는 곳인데 비하여 하늘은 바람과 공기, 비와 이슬을 제공하며 땅에 있는 것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공급해 줍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한시적이어서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체질세계가 없어지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시 창조 된다고 하였습니다(계 21:1).


2) 영적인 개념

성경에는 하늘을 말할 때 눈에 보이는 공간의 개념보다 영적인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셋째 하늘에 올라갔던 경험을 말하면서 그곳을 낙원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2:1-4).
유대인들은 하늘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첫째는 공중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로써 대기권을 말합니다. 둘째는 별들과 천체가 있는 곳으로 성군층(星群層)이고, 셋째는 하나님과 천군 천사가 있는 영층(靈層)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계시를 통하여 보았던 것이 셋째 하늘인 천당의 실체였습니다. 히브리서 12:22-23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3) 신앙적인 개념

땅과 하늘의 개념은 구속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전도서 5:2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부르게 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처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3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사가 “너희 가운데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습니다(행 1:11).



2.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여기 하늘이 땅보다 높다고 하는 말은 하늘과 땅의 공간적인 개념을 넘어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신앙적 원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8절에는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을 비교하며 그것은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엄청난 간극과 거리가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1) 유일하신 주권자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긴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우상에게 기웃거리는 행위를 하곤 하였습니다. 이사야 40:18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주권자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고 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에 비교될 수 없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따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1:33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 할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다고 하는 말은 쳐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2) 모든 복의 근원자

하나님은 모든 복의 근원자입니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열매입니다. 다윗은 그가 일평생 하나님께 받은 많은 복을 두고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대상 19:16).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축복하시는 양상을 “하늘 문을 열고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말 3:1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할 때도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 27:28).


3) 축복을 수용하는 자

본문말씀 10절에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늘과 땅의 관계 곧 축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과 이를 수용하는 인간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신령한 은혜로 말미암아 땅에서 가꾸는 수고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게 됩니다(시 127:1-2). 다만 그의 말씀을 신뢰하며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에게 보장된 축복의 원리인 것입니다(신 28:1-6).



3. 높은 세계를 지향하는 삶


미국의 순회 전도자 존슨 오트만(J, Oatman)이 지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가에는 괴롬과 죄가 있는 땅 위에서도 성도는 날마다 저 높은 곳을 바라보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1) 위에 것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골로새서 3:2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이 저희 배를 신으로 하고 부끄러움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땅에 것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한다고 하였습니다(빌 3:19-20).

2) 고상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다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때가 되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약 1:11). 요한1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땅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이며 언제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세상 사람이 다 피곤을 느끼고 넘어져도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처럼 창공을 향하여 올라가는 삶을 산다고 하였습니다(사 40:31).
하늘 높이 날아올라 마음껏 활개를 치며 구만리장천을 주름잡는 독수리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넓게 보고 멀리 보는 신령한 안목을 가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3) 복된 삶을 즐기는 자입니다.

본문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똑같은 땅 위에서의 생활이라도 신비로운 삶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12절에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그것이 감사가 되고 손뼉을 치며 노래하는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13절에는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악이 선으로 바뀌어 진다는 뜻입니다. 가시와 질려 같은 혹독한 시련과 아픔도 결국은 은혜의 도구가 되고 축복의 열매로 영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위에 것을 사모하며 살아갑시다. 땅에 있는 것에 집착하다보면 영혼이 메마르고 답답해지겠지만 하늘을 지향하는 고상한 가치를 가지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신령한 삶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 칼럼 - 눈높이를 맞추는 일
          
오래전 내가 전도사 시절에 명절이나 방학 때가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에 가면 아이들은 어른 들에게 접근하기를 무서워했다. 큰 아이가 네 살쯤 되었을 때 다시는 할아버지 댁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유인즉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가 앉기만 해도 '네 이놈!' 서기만 해도 '네 이놈!'하며 꼼짝도 못하게 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어른들의 눈에는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위태롭게 생각되어 마냥 단속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살았다.
나이든 사람들이 간혹 젊은이들에게서 격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운해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나도 그중에 하나가 되겠지만 이런 일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세대를 뛰어넘어 눈높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줄 장난감을 살 때도 만화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의 이름을 알고 그들이 조작하는 기구들이 어떤 것인가 공부를 해야 한다. 몇 년 전 미국에 가서 아이들 선물을 사기 위해 디즈니랜드에 들렸더니 거기 진열된 그 많은 상품들은 그 당시 유행하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이거나 그들의 캐릭터로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니모”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금붕어처럼 생긴 물고기 인형을 사다주었더니 이 아이들이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할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 선물을 받고부터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희들과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쪽에서 그들의 사고와 가치의 기준을 따르려고 애를 썼고 그것이 적중했다는 것이다.
지금 일본에 가 있는 외손주 녀석들은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즐기거나 저희가 좋아하는 비디오 테잎을 사다놓고 그것을 자주 보았다. 한번은 얘들이 “할아버지 이 영화 참 재미있어요. 우리 같이 봐요”하고 권하는 바람에 함께 보게 되었는데 오래전에 유행한“슈렉”이라는 어린이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도 저희들처럼 소리 내어 웃기도하고 손뼉도 같이 치고, 주인공 슈렉과 통키라는 망아지 흉내도 내면서 영화에 흠뻑 빠져보았다. 그 일이 있고부터는 아이들과 슈렉 이야기로 대화를 하게 되고 그 비슷한 소재를 들고 나오면 그 순간 격의 없는 친구로 변하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도 어른과 아이들의 간격을 좁히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절기 때나 주일학교의 헌신예배가 있을 때 으레 어른들 중심의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기도를 하는 장로님이나 설교를 하는 목사가 아무리 어린이를 의식하며 쉬운 말로 하더라도 아이들은 몸부림을 치게 된다. 이런 경우 포커스가 어른들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른의 성향에 따르기란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교회에서는 각급 주일학교가 주관하는 헌신예배나 여러 가지 축제 행사들을 가지면서 어른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가는 예배 형태로 바뀌어졌다. 주일학교 부장이 인도를 하고 어린이들이 기도와 찬양을 하고 담당교역자가 설교를 하는데 그 형식 또한 기존 예배의 격식을 뛰어넘고 있다. 찬양을 할 때도 드럼 같은 시끄러운 악기가 동원되고 손뼉을 쳤다가 일어섰다가 손을 들었다가 요란한 몸동작이 병행되는 것이다.
옛날처럼 눈감고 앉아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 듣는 식의 예배가 아니라 찬양과 워십과 드라마로 이어지는 신세대의 예배는 다양한 장르가 총동원되는 종합예술이요 축제 형태가 되어 버렸다. 나이든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거북해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세대의 사고와 예배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공동체에 있어서 구성원 간에 간극이 좁혀지고 화해의 장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눈높이를 조정하는 노력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출처/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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