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 : 35-43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가까이 가셨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일은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 그리고 오늘 본문 누가복음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복음과 마가 복음이 이 일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누가 복음에서 설명하는 것과 다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에서는 이 일이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을 떠날 때 있었던 일로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오실 때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둘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고 구원을 받았던 라합이 살던 여리고 성이 있고, 다른 하나는 헤롯왕이 여리고 성 가까이에 새로 건설한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편의상 구약 성경에 기록된 여리고를 구 여리고라 부르고, 헤룻이 건설한 여리고를 신 여리고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구 여리고 성을 지나서 신 여리고 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된 일입니다. 이 소경은 길거리에 않아서 구결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 소경이 성안에서 구걸하지 않고, 성밖으로 나와서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을까요? 더 많은 사람에게서 더 많은 돈을 얻으려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성안에서 구걸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안이 아닌 성 밖에서 구걸을 했을까요?
이유는 돈을 얻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소경은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지나시는 것을 볼 때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소경은 길에서 구걸을 하다가 많은 사람이 무리를 지어 지나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귀로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이 무슨 일이냐 ?" 누군가 이 소경의 질문에 대답을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이 말을 들은 소경은 나사렛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예수님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소경 그는 흥분하였고, 예수님을 다급하고 흥분된 어조로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경이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말을 보면 그 동안 예수님을 무척 기다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히브리말로 메시아는 헬라말로 그리스도입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 혹은 제사장, 혹은 선지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왕이 오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이 오면 가난한 사람도 잘 살게되고, 불구자도 고침을 받고, 소경도 눈을 뜨고, 앉은뱅이도 뛰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이 오면 정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유대인들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굳게 살 수 있게 해 준 결과입니다.
이 소경에게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소경으로 태어나 거리에서 구걸하면서 삶을 연명할지라도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예수님이 자신을 만나 주신다면 자신이 소경의 고통에서 해방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날지 모르지만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오늘 이 소경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고 문둥이를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세리로 있던 삭게오도 만나주셔서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 집에 유하면서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여러 성과 동네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 라는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그분은 갈릴리 지방의 이름 없는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 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 소경은 그 나사렛 예수가 곧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로 예수님을 찾아 갈 수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찾아 갈 수는 없었지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날마다 성 밖에 나가 구걸하며 길가에 앉아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다 드디어 이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오고 계실 때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소경으로서 눈을 뜨기 위해서 여리고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목에 가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런 신앙생활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목은 바로 교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목에 앉아서 자신의 약한 것을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만져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날에 소리를 높여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조용하면 예수님이 만나 주시지 않는 다고 할 때 염치를 불구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오늘 소경은 앞서가는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꾸짖었지만 더 크게 예수님을 불렸습니다.
부르짖음은 예수님에게서 반응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이 소경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은근히 부러운 생각도 들고,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을 그처럼 사모하고 기다리던 이 소경과 비교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이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주님을 향한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을 찾아 뛰어 나가고 싶은 뜨거운 가슴이 여러분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찾는 뜨거운 가슴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어째서 우리의 마음은 무덤처럼 식어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없어도 살 맞이 있습니까? 이것이 과연 신앙인의 모습입니까?
요즈음 결혼하지 않고도 자기 삶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주님과 뜨거운 가슴을 나누지 않고도 마음이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은 결혼의 맞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을 낳는 이세에 대한 꿈을 가지고 결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편을 기다리고 아내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 끝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성도는 그냥 세상이 좋다는 것이니 이것은 구원받은 행위가 아닙니다.
찬송가 88장 1절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 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2. 내 몸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간 나와 항상 같이 하여 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날 지키시네 온 세상 날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 주는 저 산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3. 내 맘을 다하여서 주님을 따르면 길이 길이 나를 사랑하리니 물 불이 두렵잖고 창검이 겁없네 주는 높은 산성 내 방패시라 내 영혼 먹이시는 그 은혜누리고 나 친히 주를 뵙기 원하네 주는 저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 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사모하고 기다렸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이런 기다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부를 때 의미 있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예수님은 유대 나라 왕이었던 다윗의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모든 다윗의 후손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야고보, 시몬, 유다 등 여러 명의 동생이 있었습니다(마 13:55) 이들도 요셉의 아들이지만 이들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유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메시아에게만 사용되는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도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친구의 동정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이웃이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기분 나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불쌍히 보아주시는 것은 큰복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약점을 알고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를 잘 몰라서 그렇지 자신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면 그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때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소경처럼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이 소경이 예수님께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하는 것이 얼마나 결사적이었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그럴수록 더 소리를 높였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긴박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오시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길로 가시게 됩니다.
여러분 금년 새해를 사시면서 기도해야 될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소경의 부르짖음과 같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이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은혜 받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보다 더 좋은 은혜는 없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이 소경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은 잠잠 하라고 꾸짖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 6:3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예수님께 가려다가 거절당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앞을 잘 못보고 가다가 시궁창에 빠져 냄세 나는 옷을 입고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여러분을 거절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외침이 있으면 걸음을 멈추시고 그리고 여러분을 부르실 것입니다.
누군가가 소경을 데리고 예수님께 오자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시를 원하느냐?" 무엇이든지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소경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소경이 보기를 원하다니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자기의 지식을 초월하고, 자신의 경험을 초월하고,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은 보기를 원하는 소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보게된 것을 그의 믿음으로 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만나주셨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하였을 때 그의 눈이 떠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어디까지 나가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에게 말씀하실 때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 말씀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입니다.
우리가 금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무슨 일은 하든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 모든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음성을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에서 그에게 눈이 떠질 수 있는 믿음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기를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말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볼 것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이 소경은 육신의 눈이 열려서 보기를 원한다는 말로 주님 앞에 소원을 말했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영적으로 보기를 원하는 영의 눈이 밝아지는 것을 구하는 그런 성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는 영의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금년 달력에 보면 실천 신앙에 3가지 중에 안약을 사는 신앙생활을 표기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계 3:18,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금년 한해를 신앙생활을 하면서 눈이 밝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오늘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씀은 구걸하는 소경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처량하게 길거리에 앉아서 소경으로 살던 사람에게도 주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음성을 듣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를 분명히 알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한 것은 구원해 주실 예수를 분명히 안 사람입니다. 우리도 에수님을 분명히 알고 부르는 은혜를 입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님의 두 번째 음성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보아라."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도 그는 눈이 열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이란 말속에는 많은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많은 구원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보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눈을 뜨고, 영의 세계를 보면서 감격해 하는 모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조억만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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