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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사 60:15~22) (갈라디아서 3:15~22 참조)

by 【고동엽】 2022. 9. 18.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  (사 60:15~22) (갈라디아서 3:15~22 참조)


우리 나라의 전직 대통령 가운데 유난히 자신을 믿어 달라고 했던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믿어 주세요!" 오죽하면 코메디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기까지 했겠습니까? 그 분은 대통령 임기 중에 정치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거둔 막대한 돈을 개인적으로 쓰기 위해서 몰래 감췄다가 결국 감옥에 가는 코메디 아닌 코메디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을 우리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믿지 못할 것이 어디 그 분의 말뿐입니까?

그 지긋지긋한 IMF 외환 위기를 겪게 된 근본 원인도 우리가 대내외적으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애쓰고 수고한 결과 어느 정도 위기를 넘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감사원의 발표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허탈의 정도를 넘어서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부실해진 금융 기관들을 살리기 위해서 공적 자금이라는 것을 150조원이 넘게 쏟아 붓는 과정에서 엄청난 돈을 도둑맞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과연 누구를 믿고 또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대림절 절기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이 대림절 절기는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합니다. 물론 주님이 오신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서 멎어서는 아니 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준비하고 그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할 때에는 대체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먼저 약속의 내용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하는 주체가 되는 사람과 그 약속을 받는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내용과 주체와 대상이 분명히 있어야 약속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 대전에 사는 친구로부터 아주 반가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주일 날 그러니까 바로 오늘 서울을 방문할 일이 있는데 이왕이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하면서 주일 낮 예배를 몇 시에 시작하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기분이 좋은 전화 통화요 또한 약속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약속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오래된 약속 또 신약, 새로운 약속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성경에는 약속 또는 언약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될 강한 의지와 그에 따른 결정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또한 당시 유언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던 계약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기도 합니다. 지켜도 좋고 지키지 않아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이스라엘을 향한 매우 희망적인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멸망해서 황폐케 된 그 땅은 심지어 사막을 여행하는 장사꾼들조차 지나가기 싫어하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화평과 공의가 넘치는 복된 땅으로 바꾸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솔로몬 시대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바로 눈앞에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이 약속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 두 가지가 무난할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새로이 회복될 시온의 영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물질적인 번영에 비유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가올 메시야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좀 더 나 것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어느 쪽 견해를 택하든지 절망 가운데 깊이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그와 같은 약속을 주셨겠습니까? 그것도 일방적인 약속을 말입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약속입니다. 우리로서는 다만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약속은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약속을 맺기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약속을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신앙은 곧 결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과 동시에 취해야 할 것을 반드시 취하는 결단이 곧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오겠다고 하는 친구의 약속을 믿지 못할 것 같으면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믿고 준비하고 기다릴 것 같으면 큰 기쁨을 미리부터 맛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 선 모든 인간은 마땅히 택할 것을 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율법으로는 사람이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다만 죄를 드러냄과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사람에게 의의 필요를 느끼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스스로 지극히 무력함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무능한 율법과는 달리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사람을 온전한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특별히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 일방적으로 하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으로 더불어 약속을 하십니다. 여기서 자손이란 한 사람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은혜로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약속도 변치 않고 언제나 동일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 약속은 결코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약속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은총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 보여서 얻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성취해야 할 조건인 하나님의 명령과 사람이 그 명령을 지키겠다는 동의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그러한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율법이 약속한 바 복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취해야 할 조건인 명령은 항상 있었지만 사람이 여기에 동의를 하지 않거나 동의를 하더라도 그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복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시기만 하면 되는 약속을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 자신과 그 약속의 내용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 약속을 스스로 지키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은 그 약속대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 속에서 역사하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그 구원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항상 불완전한 자신을 앞세우고 사는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까지 먼저 생각하셔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는 그 약속이 못마땅해서 지금도 투정을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향하여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은총을 받으려는 결단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경우가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죄 가운데서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놀라운 구속의 은총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신 그 약속에 대해서 항상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받는 사람들의 결단에 의해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약속을 받아들이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스스로 율법의 저주 아래 머무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시간 차이를 인정하고 참고 기다리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은 믿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뿐입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의 선택과 결단뿐입니다! 영원한 복을 약속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서 준비하고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은 오셔서 썩지 않는 영광과 의와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세세토록 돌리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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