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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과 새사람 (엡 4:17-24)

by 【고동엽】 2022. 9. 17.

옛사람과 새사람   (엡 4:17-24)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무궁무진합니다. 그 한량없는 은혜와 평강이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새생명, 새 삶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 가운데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실제적 삶의 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 되는 원리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 되지 않으면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몸이요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지 않으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 되는 원리 다음으로 중요한 원리는 바로 거룩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는 말씀처럼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을 들어 보면, 크게 두 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왜 하나 되지 못하고 헐뜯고 싸우는가 하는 것과, 왜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자꾸 분열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독선을 꼬집는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신들은 겉으로는 의롭고 선한 척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더 세속적이고 물질적이지 않은가, 그 가식적인 태도가 싫다, 좀더 솔직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종종 듣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선을 꼬집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안과 밖이 한결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깨끗하고 정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방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에베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이방인의 생활을 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의 생활이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믿지 아니할 때의 옛사람의 생활과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새사람의 생활엔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이교도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환경에서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너희가 이방인이었고 이방인처럼 살았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인처럼 살라”고 말씀합니다.

17-1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17-19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거룩하지 않은 옛사람, 즉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의 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어두운 생활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옛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마음이 허망한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허망하다는 말은 ‘방향이 없다’, ‘목표가 없다’는 말입니다. 현대의 특징은 점점 방향을 잃어버린다는데 있는데, 이것이 옛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옛사람은 방향을 잃어버려 어디를 향하여 가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라는 도마의 물음처럼 그들의 가는 길을 모릅니다. 방황합니다. 가는 방향과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1절에서는 이것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리고 22절에는 “저희가 우준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8절에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옛사람은 허망하고, 미련하고, 우준하고, 상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2:17절 이하에서 이런 허망한 사람들을, 물없는 샘과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에 비유하면서, 캄캄한 어두움이 그들 앞에 예비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허탄하여지고 허망하여진 상태, 방향과 목표가 없는 상태, 이것이 옛사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마음과 생각이 허탄하고 허망해지면, 방향과 목표가 없으면 그 다음에는 어떤 결과가 찾아올까요?
첫째,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모든 이해력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진리와 계시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세상 학문과 혼돈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특히 지적 수준이 놓은 사람일수록, 이 혼돈이 심해져서, 오히려 그 높은 지식과 세상적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고귀한 지식마저도 땅에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바로 옛사람의 모습이요, 본질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로마서 1: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내어 버려두사”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26절에도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셨으니”라고 했고, 28절에도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는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왜 비참하고, 자기 영혼이 왜 갈급하고, 허탄하고, 허무한지, 그 원인을 모릅니다. 그래서 허망하고 허탄한 생각을 극복해 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애쓰고 애쓰지만 결국 헛수고일 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 즉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 심각한 고민과 비참한 마음을 똑같이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단절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탯줄이 끊어진 것과 같습니다. 아기가 뱃속에서 탯줄이 끊어진 상태와 같고, 태양이 없는 식물과 같고, 공기가 없는 곳에 사는 인간의 모습과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남,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의 단절은 어떤 이유로 인하여 오는 것일까요?
1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의 젓줄이 그 영혼을 적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망하고 허무함,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문호 단테는 그의 대표작 ‘신곡’ 중에서 “만일 인간들로부터 하나님의 생기를 빼앗아버린다면 그것은 하나의 흙덩이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났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 하나님을 등진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허망하고, 허탈하며,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궤휼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요동치는 모습입니다.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계속되지 못하면,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녀도 삶 속에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부딪히는 경험이 없으면, 이런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영적으로 살려고 할 뿐 아니라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없다면, 성경 공부를 할지라도 성도와 교회를 통해서 바른 사귐을 갖지 못하면 또한 이런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영적인 빈곤 때문에 세상적이 되고, 물질적이 되며, 마음이 굳어져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 되면, 그 또한 허망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인간, 아니 하나님이 내버려둔 인간의 생활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된 것은 인간의 자유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리 죄를 범해도, 아무런 벌도 없고,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만사형통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생명을 맘껏 누림으로 늘 풍성하고 넉넉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로마서 1:24절에 보면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셨다”고 했고, 26절에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다”고 했고, 27절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고 했고, 28절에는 “합당치 못한 일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9절 이하에 보면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마음과 생각이 허망하여지면 감각 없는 사람으로 변해 버리고,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타락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양심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이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배로 하나님을 삼으며 부끄러움을 오히려 영광으로 삼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세상에 맡기고 ‘될 대로 되라,’ 바람이 부는 대로 세상이 가는 대로 물결이 흐르는 대로 육신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합니다.

또한 ‘감각이 없다는 말’은 방향을 상실하고, 길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운전하는 도중에 운전을 포기한 운전수와 같습니다. 그 차가 어디로 뛰어들지 아무도 모릅니다.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하면 방탕의 길로 계속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온갖 종류의 더러운 것이 자기를 찾아옵니다. 더러운 곳으로 자꾸 들어갑니다.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합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둘째로,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23-2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새사람을 입는 것은 옛사람을 벗는 것만큼 중요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거룩의 옷을 입고, 의의 옷을 입고, 마음이 새로워지는 상태가 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옷을 벗고 입는 것으로 설명했지만, 사도 바울이 현대에 살았다면 아마 컴퓨터에 비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관계로 말입니다. 이전에 프로그래밍된 소프트웨어를 바꿔야합니다. 잘하고 못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제일 먼저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변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다 헛일입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변해서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발전 개념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의 개념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이것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쁜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가 된 것이 아니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는 근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사탄의 프로그램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성결의 프로그램으로 완전히 대치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거룩을 연습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죄악에 빠지고 맙니다. 마치 화가 난 사람이 억지로 웃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웃으려고 해도 얼굴이 금세 굳어져 버립니다. 근본이 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화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의미없이, 아무런 변화없이 교회 다니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 영혼이 근본적으로 거듭나고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될 수 있습니다.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때만이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옛 본성으로는 사람을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협력하여 주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대답은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로 거듭나십시오. 아직도 옛사람의 옷을 벗지 못한 분이 있다면 지금 곧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사람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스코틀란드에서 일찍 부모를 여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끊임없이 말썽을 피워 주위에서 ‘구제불능의 저질’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 크리스천이 이 아이에게 두 번이나 사랑으로 옷을 사주었으나 이 아이는 다 찢어버렸습니다. 그러다 세 번째 준 옷을 받고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그 아이가 교회학교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사랑을 받은 후 ‘저질’에서 ‘보석’같은 존재로 변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중국어 사전과 성경을 출간하여 중국선교 개척에 큰 공을 세운 스코틀랜드의 모리슨 목사님(1782-1834)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에게 재물을 달라하여, 그것을 가지고 멀리 떠났던 둘째 아들, 허랑방탕한 삶, 먹을 것이 없어 쥐엄열매를 먹어야했던 삶, 그러한 소망없는 삶을 청산하고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얻었다”는 부서지고 깨어진 마음으로 돌아와, 아버지 품 안에 안긴 그 둘째 아들을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합니까?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부끄러운 옛 사람을 용감하게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처럼 감각 없이 살지 마시고,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사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살고자 결단하는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주님 주신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항상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죄로 더럽혀진 저의 몸과 영혼을 보혈의 피로 맑게 씻겨 주시옵소서.
모든 생활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날마다 주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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