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 (사 6:1~5) (요한복음 8:12~18 참조)
요즈음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형편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총재인 대통령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분이 심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모인 곳 특히 정치인들이 모인 정당 안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번만큼 사태가 심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10월 25일, 국회의원 재, 보선에서 세 곳 모두 참패를 당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내년 연말에 치를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대선 주자들의 이해가 서로 엇갈리기 때문에 문제 해결의 방안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급기야 최고위원들 모두가 사표를 내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지 않았습니까?
어쩌다가 민주당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김 대통령이야말로 위대한 리더쉽의 대명사 같은 분이 아닙니까? 그 고통스러웠던 군사 독재 시절도 잘 참고 견디고 마침내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한 인물입니다. 또 많은 훼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햇볕 정책을 펼침으로써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연 위대한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공로를 온 세계가 인정해서 노벨 평화상까지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위대한 지도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왜 민주당 안에 발생하게 되었습니까?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진단을 내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권력에 대한 야심과 김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맞물려서 이런 사태를 빚게 되었다고 봅니다. 레임덕 현상 즉 대통령의 임기 말 누수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겪어보지 않았습니까? 임기 말이 되면 먼저 공무원들부터 복지부동이 됩니다. 납작 엎드려서 다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되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애꿎은 국민들만 골탕을 먹게 마련입니다. 정치인들 가운데 대선 주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권력을 쥐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들도 줄을 잘 서기 위해서 이미 서산에 지는 해에 해당되는 대통령에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하여간 권력이 도대체 뭔지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앗수르 제국이 그 일대를 무력으로 주무르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을 받고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한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힘깨나 썼던 이스라엘이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앗수르의 눈 밖에 나서 침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오랫동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왕국 유다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좋았던 시절도 다 지나갔습니다. 나날이 그 세력 판도를 확장하고 있는 앗수르에 대항해 보겠다고 애굽과 더불어 반 앗수르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가 이런 유다를 그냥 놔 둘 까닭이 없지 않았겠습니까? 마침내 앗수르의 산헤립은 주전 701년에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을 아주 초토화시켜버렸습니다. 이처럼 다만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던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특별히 선지자 이사야가 성소에서 하나님을 뵙게 된 것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가 하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하는 편이 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그는 캄캄한 성전 안에서 갑자기 눈부신 광채를 봤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스랍들이 즉 각기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부지런히 날면서 서로 창화하고 있었습니다. 스랍들이 뭐라고 서로 창화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그는 그만 기절할 정도로 놀랐을 것입니다. 비록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찬란한 광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그가 생각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가지고 그에게 날아와서 그의 입에 대며 말했습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를 살리는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 사함을 받은 그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했던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소명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앗수르의 가공할 힘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안을 알지 못해서 다만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 회개를 촉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찬란한 광채 가운데서 들은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오직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앗수르를 의지하거나 아니면 차라리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하는 것 밖에는 살 도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을찌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가 들은 메시지는 전혀 달랐습니다. 모진 풍랑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고 또한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 뜻을 따르는 길 밖에는 결코 살 길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그 때 거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예언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언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함을 잃어버린 백성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만 두려움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의지할찌라도 이 두려움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재물이나 권력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또 지식이나 경험으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의 말씀은 초막절 기간에 에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초막절은 원래 출애굽한 히브리 노예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에 초막을 짓고 살았던 체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시작한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물의 축제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거듭남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막절은 빛의 절기이기도 했습니다. 초막절 팔일 동안 성전 안과 회랑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 가정에서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한 등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 빛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먼저 자유의 빛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환하게 밝힌다는 뜻이고 또한 이방인들로 인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저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과 빛이 상징하는 회개를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축제 의식을 초막절 절기에 지켰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물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이 저들 바리새인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던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저들은 항상 자신들만 옳고 자신들의 판단만 옳다고 믿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저들의 함정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물의 축제를 통해서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원했지만 오히려 참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저들은 빛의 축제를 위한 등불을 밝히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삶 속으로 침투한 하나님의 참 빛은 전혀 발견하지 못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들 바리새인들의 이런 모습은 마치 휘몰아치는 세상 권력에 현혹되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잊고 지내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파도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파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을 맑고 밝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야구 선수라고 하면 무조건 박찬호 선수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는 또 한 명의 보배 김병현 선수를 새롭게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월드 시리즈 4차전과 5차전에 마무리 투수로 나와서 잘 던지기는 했지만 다 이기고 있던 게임을 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김병현 선수의 패배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다음에는 실수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숩니다. 제가 볼 때 너무 자기 힘에만 의존한 것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마무리 투수는 힘이 좋아야 합니다. 또 김병현 선수의 던지는 힘은 보통 때는 대체로 잘 통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처럼 정말로 잘 치는 선수와 겨룰 때에는 김병현 선수의 그 힘이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두 게임 다 홈런을 맞고 무너졌다는 사실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힘만 의지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힘과 함께 좀 더 높은 기술을 습득하고 연마하며 또 상대방의 약점을 잘 파악해서 종합적으로 대처할 때 승리의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주님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해서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또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아울러 마침내 모든 만물을 심판하실 주님의 능력까지 믿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이 마지막 때에 악한 세상과 싸워 이김으로써 영광과 능력의 주님과 함께 영원 무궁토록 왕노릇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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