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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속의 하나님 (출 3:1~5 )(요한복음 3:31~36 참조)

by 【고동엽】 2022. 9. 17.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속의 하나님  (출 3:1~5 )(요한복음 3:31~36 참조)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영도자라고 할 수 있는 모세는 원래 매우 다혈질이었던 것 같습니다. 몹시 성급하고 또 흥분을 잘하는 그런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인물이 애굽의 바로의 궁중에서 자랐으니 오죽 했겠습니까? 그가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동포인 히브리 사람이 애굽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그는 그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그 시체를 몰래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다음 날 또 다시 밖에 나간 모세가 동포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 생각한 그는 그들에게 왜 싸우는가 하면서 그 싸움을 말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포들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싸움을 말리는 그에게 오히려 삿대질을 하면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습니다.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까지 죽일 셈이냐?" 결국 그는 살인자로 낙인이 찍혀서 당국의 수배를 받고 쫓기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목요일 산에 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운동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평소 전혀 운동을 하지 않던 저로서는 대단히 힘든 결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산에 꼭 오를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다른 일행들에게 좀 미안한 결정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원래 계획은 모두 함께 버스와 유람선을 이용해서 편안한 관광을 즐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저는 그냥 산에 오르기로 결정하고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했습니다.

어렵게 제주도까지 와서 한라산에 오르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 너무 억울한 것 같았고 또 저의 건강 관리를 위한 첫 걸음을 한라산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오르기로 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리목이라는 곳에서 출발해서 1Km도 못가서 그냥 주저앉고 싶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땀은 비 오듯이 흐르고 또 숨도 탁탁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한 발을 떼는 것은 왜 또 그렇게 천근만근 무거운지.....

하여간 그렇게 윗새오름이라는 휴게소까지 4.7Km 거리를 약 2시간 동안에 오르고 난 후의 그 상쾌한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특히 잊지 못할 것은 그 휴게소에서 산 식수를 시원하게 들이킨 것이었습니다. 가을 가뭄 때문에 샘들은 다 말라버렸고 또 너무 일찍 출발하는 바람에 마실 것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나 목이 탔는지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잘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물처럼 시원한 물은 생전 처음 마신 것 같았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올라갈 때와는 반대로 영실이라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번 산행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음으로 이왕에 시작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참아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았기 때문에 그토록 상쾌한 기분을 맛볼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평소 가벼운 운동이라도 꾸준히 했더라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한라산을 오른다고 하면서 식수 한 병도 준비하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간 간신히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의 삶은 말 그대로 낭패와 실망, 그리고 쓰라린 좌절만 맛보는 삶이었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고 숨을 쉬고 있으니까 살았다고는 하겠지만 죽음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이드로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가정을 꾸미게 된 것과 장인의 양떼라도 돌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십 년 세월을 보냈으니 그에게 더 이상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모세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떨기나무가 전혀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 때 그의 귀에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바로로부터 건져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나 돌보던 모세의 삶의 전환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놀랍고 두려운 이 사건이 모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건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고 부르짖을 때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즉 모세가 경험한 이 신비한 사건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탄식 소리와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원래 광야의 떨기나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에 가까운 식물입니다. 아침 이슬을 먹고 자라기는 하지만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한낮의 햇볕이 내려쪼이면 저절로 불이 붙어서 순식간에 타서 사라지는 풀입니다. 사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세가 그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태양신으로 숭배되는 바로 밑에서 겨우 연명하는 노예들이었습니다. 햇볕에 그대로 노출된 떨기나무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노예들이 바로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다는 것도 또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탄식하며 신음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참으로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연약한 떨기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징조입니까? 불꽃 가운데서 타서 없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깨달은 것은 바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낭패와 실망 그리고 쓰라린 좌절을 겪은 후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를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스스로 뭔가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의 결과는 오직 낭패와 실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보내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오직 그 하나님을 믿고 그는 일어설 수 있었고 또한 그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 역사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요 3:31) 어찌 들으면 동문서답 같지만 그 뜻은 아주 분명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분인가 땅에 속한 분인가 하는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말씀, 즉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세례 요한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확신했던 참된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뜨고 볼 것 같으면 바로 그런 현장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느냐고 탄식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셨으며 끊임없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까닭은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셨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혈기 때문에 또 그 후에는 깊은 좌절 때문에 그 음성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느냐고 하나님의 부재를 선언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어려움 그 자체가 아니라 어려움에 묻혀서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부재를 스스로 단정하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울찌라도 하나님께서는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고 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세상이 어둡고 우리의 삶의 형편과 처지가 비참하다고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아니 계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황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 말씀이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비참할 때, 우리가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가 온갖 스트레스로 인하여 숨이 막힐 것 같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아니 계신 것처럼 생각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 현장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모세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뒤늦게나마 발견하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의 불길이 아무리 거세게 타오를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또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옛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던 그 하나님의 은총이 말씀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여러분의 삶 속에 넘치도록 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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