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닮아감 (롬 8:29~30)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모든 사람들은 왜 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전성취를 위한 전교인 40일 훈련을 통해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찾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음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배라고 부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두 번째 목적,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가족으로 서로 섬기는 것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교제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세 번째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 번째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닮아 가는 것은 하루 밤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처럼 되어 지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기본훈련에 40일, 훈련완성에는 여러분의 인생 전부가 소요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훈련과정은 필생의 과업이지만 집중훈련 40일 가운데서는 오늘부터 후반부에 접어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기에는 전반전도 중요하지만 후반전이 승패를 가름합니다. 총력을, 경주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 동안 시작은 했다가 조금 쳐져 계시는 분들도 후반전 열심히 뛰셔서 좋은 점수를 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 가는 것을 어떻게 도우실 까요? 제일 첫 번째 은혜 수단은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자라 갈 수 있습니다.
읽고, 묵상하고 배우고 또 실천하고 그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신앙성숙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지난주에 교제에 대해서 말씀드렸지요? 함께 자라고, 함께 어울리고 하는 것을 배워가야 합니다. 더 잘 어울리고, 많이 사귀어 갈수록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자라나게 하시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사용하신 방법은 성경과 교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훈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또 부가적으로 필요에 따라서 쓰시는 다른 방법들 세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련을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시련” “고통” 아니면 “문제”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사실 “시련” 이라고 할 때는 우리를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고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 나아가려고 하는 선한 뜻을 가지고 있을 때 “시련”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이래도 시험 저래도 시험인데요. 시험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전면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려고 훈련시키십니다. 사실 좋고 편한 환경에서는 믿음 생활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믿음이 더 강해지거나 성품이 아름답게 변화하는 일들은 잘 없습니다. 그래서 훈련시킬 목적으로 문제를 안겨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훈련시켜서 성숙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우리 개인의 안락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품이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주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성품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을 바라볼 때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도록 빚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천국에 갈 때 하던 직업을 가져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서 닦은 성품은, 인격은 그대로 가지고 갈 것입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난, 시련,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ꡒ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ꡓ ꡒ하나님, 하필 왜 저입니까?ꡓ라고 묻곤 합니다. 마치 여러분의 삶은 편안하고 행복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편안함, 안락함에 있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이 땅에서의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젠가 아무 문제도 시험도 없는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백, 수천, 수 만년, 아니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이곳은 편안함의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의 성품을 개발시키는 곳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논산훈련소입니다. 남편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훈련소 생활이 그렇게 편안했는지 안락했는지 훈련소에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고통이 있습니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희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문제가 우리 자신의 탓이든지, 다른 사람의 책임이든지 사탄의 계략이든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의 탓이냐 하는 것을 가린다고 국력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모든 시련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닮아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고뇌하셨습니다. ꡒ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어라 하시고ꡓ (마가복음 14:32) 예수님이 기도하고 올 동안 제자들에게 여기 앉아 있어라 그 말은 뭡니까? 앉아서 자라 그런 말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겠지요? 앉아서 기도에 나와 함께 힘을 합해라 그런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 큰 고통 가운데 있을 때는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그룹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도 인생의 짐을 혼자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동안에 그곳에 함께 있어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운데서, ꡒ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ꡓ(막 14: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이 겪어야하는 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ꡒ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ꡓ (막 14:36)
고통을 경험할 때, ꡒ하나님 저 정말 힘들어요.ꡓ ꡒ하나님, 이 고통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ꡓ ꡒ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ꡓ라고 우리가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여 옮길 수 있습니다.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바라나이다. 하나님의 계획 앞에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1.1 시련을 당할 때 신뢰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예수님과 같아지려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일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말입니다. ꡒ정말 이해가 안돼는 일, 죽을 것만 같은 일. 그 상황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처럼 여러분의 입장을 밝힐 수 있어야, 여러분의 소원을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수용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삶이 편하고 좋을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믿음에 대한 진정한 테스트는 바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 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전적으로 당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힘든 처지에 두실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고통가운데서 우리는 ꡒ왜? 도대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ꡓ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것을 그 고통을 통해 가르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신뢰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1.2 시련을 당할 때 영원한 상급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상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이 연단되면 하나님께서 한날 우리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 훈련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하면 우리가 성숙한 단계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보상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ꡒ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ꡓ(고후4:17)
여기서 받는 환난은 잠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크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서 이루어 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죽는 날까지 우리에게 계속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저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며 살 영광에 비하면 능히 가뿐하게 견뎌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예상 못한 처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혼 생활 5년 만에 중풍으로 왼쪽 몸 전체에 마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럴 때 우리는 겸비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되겠지요. 부르짖어서 치유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런 상태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는 편안할 수 없을 것을 예감하면서도 이 땅에서의 삶은 그리 오래지 않을 것을 알고 받아드린다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살 것을 기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 인생에 힘든 일이 찾아오면 고통스럽고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정도는 달라도 사람마다 그 나름대로의 자기만의 고통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여러분을 위해서 선하게 사용하시며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그 일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2. 하나님은 유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닮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시려고 시험을 사용하십니다. “너 냉장고에 넣어 둔 과일 먹지마” 그런데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과일이 없어요. 그러면 이 아이는 시험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과일이 들어 있어야 그렇지요? 부모 말을 순종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시험이라고 할 때 유혹이라고 할 때는 사탄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고 우리를 해하려고 오도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손해를 입도록 방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시험을 그 유혹을 하나님께서 역이용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사탄의 유혹까지도 우리 인생에 좋은 것으로 바꾸시기에 능하신 분입니다.
이런 시험 앞에서는 우리는 선택해야 됩니다. 유혹을 따라서 굴복할 것인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할 것인지 선택하는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한 포인트를 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탄이 아닌 하나님 쪽을 선택하면 사탄의 계획은 전부 실패하고 우리는 인생에서 한 단계 더 연단된 성숙한 인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택들은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예수님도 시험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결코 죄를 범한 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ꡒ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ꡓ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셨을 때, 어떻게 하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이 시험에 당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험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첫 번째로,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는 것이 죄라면, 무죄하신 그분께서 무흠하신 그분께서 순결하신 그분께서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새가 여러분의 머리위로 날라 다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것을 막으면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우리만이 시험을 받는 것처럼 속삭이지만 우리만 특별히 어려운 시험을 겪고 있다고 사단은 속삭이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다 겪는 것입니다.
시험이란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면역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한번 받아서 넘어지고 나면 그 다음은 같은 시험에 안 빠진다고 그렇게 보장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니까 오히려 반대이더라고요. 돈의 유혹을 받는 사람은 또 돈을 유혹을 받기 쉽고, 성적인 유혹을 받은 사람은 또 받기 쉽고, 명예의 유혹을 받는 사람은 또 받기 쉽고 약한 쪽이 언제나 무너지더라고요. 나이가 아주 많거나, 영적으로 거룩하게 되어도 시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디딤돌입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마태복음 4:10에 말합니다. ꡒ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ꡓ
시험은 항상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에 대한 테스트입니다. 돈에 대한 시험을 받을 수 있고, 그때도 인생에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지, 아니면 돈을 사랑하는지를 시험받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을 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2.1 시험을 이기려면 좋은 생각에 집중하십시오.
ꡒ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ꡓ(빌4:8)
시험이나 유혹을 받을 때는 우리는 언제나 그 문제를 자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험에만 생각을 집중하면 시험은 우리를 나중에는 가지고 놉니다. 나는 한번에 두 가지를 잘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만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머물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시험에 굴복하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을 돌려서 긍정적인 것에 맞추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좋고 옳고 진실한 것들에 생각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험을 받을 때 거기 집착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저항하면 계속 시험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탄하고 줄다리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사탄하고 줄다리기하면 여러분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힘을 쓴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상대가 안됩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잡고 흔드는 것이 아니고 줄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줄을 놓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갈 곳을 가는 것입니다. 왜 맞잡고 그것을 당기고 거기에 에너지를 소모합니까? 신경쓸 것 없습니다. 여러분은
ꡒ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 한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전환하십시오. 그러면 시험이 곧 사라진다는 것을, 유혹이 곧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시험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십시오. 좋은 생각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2.2 시험을 이기려면 신앙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파트너가 있어야 합니다. 시험을 받으면 대체로 사람들은 그것을 유혹을 받는데 대해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말을 해 버려야 합니다. 나는 이런 문제에 유혹을 느끼고 있다. 그러고 나면 안 빠집니다. 빛 가운데로 우리가 받고 있는 유혹을 폭로시켜 버리고 나면 여러분 스스로도 선언해 놓고 나면 잘 빠져들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친구가 그래서 좋습니다.
ꡒ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ꡓ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전부를 삼킬 듯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럴 때는 친구에게 그냥 털어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시험에 대해서 말하기를 시작하면 친구들이 입을 열 것입니다. 자기도 사실 그런 유혹을 받고 있다고 그러면 두 사람이 서로를 도울 수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 소그룹모임을 하면서 함께 책을 읽고 나눌 친구를 정하셨습니까? 신앙의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바로 우리의 소그룹입니다. 바울도 좋은 신앙의 친구들을 가졌습니다. 바나바와 마가, 아볼로와 디모데, 디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우리가 아는 놀라운 믿음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앙의 친구들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3. 하나님은 모욕과 상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모욕당하는 것이나 상처 당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시련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하는 것이라면, 유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사탄이 만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모욕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상황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참아 내는 것 의심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종종 오해와 비판과 판단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 사람들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고 어떤 때는 입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잘끈 잘끈 씹기도 합니다.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말로 상처를 입히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무흠하신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사람들이 그를 오해했고, 그를 비난했고 그를 모욕했는데 우리 같은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직도 흠이 많은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만 해 주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위해서 비방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만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학대를 당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ꡒ아버지, 저희가 알지 못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십시오.ꡓ ꡒ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ꡓ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모욕과 상처를 받을 때 예수님는 어떻게 하였다고요? 그 모든 것을 잘 참으셨습니다. 상처를 그저 받으셨습니다.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여러분 영적으로 자라나고 싶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싶습니까? 그러면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죄인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아무 상처 없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여러분 역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다른 사람들도 의도했던지 의도하지 않았던지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가고 싶다면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상처받지 않으면 어떻게 용서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당해 보지 않고는 모욕을 당하고 상처를 입고 고통 속에 놓여 보지 않고는 여러분은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아무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여러분이 용서해 준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못살게 하는 배우자, 직장의 친구, 누군가 나에게 틀림없이 잘못하게 한 사람들이 있어야 내가 용서할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합니까.
그래서 용서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받아 보아야 합니다. 상처받을 때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때 용서하는 겁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주된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배워서 하나님을 닮기 원하십니다. 상처받는 일들이 생기면 그냥 꿀꺽 삼키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을 닮게 해줄 것입니다.
3.1 용서하는 것을 잘 배우려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마지막에 보상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를 입힐 때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ꡒ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ꡓ
용서하는 것을 배우려면 다음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상처를 받으면, 다른 사람이 모욕하면 속상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여러분 삶에서 선하게 쓰신다는 것을 믿으셔야만 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 그때는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믿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에 허용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신 데 이것을 허용했을 때는 나는 지금은 몰라도 다 선한 뜻이 있다고 믿어야 그것이 신앙 아닙니까? 눈에 뻔히 보이는 것만 우리가 판단하면 누가 신앙생활 하는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신앙 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닌데 전혀 아닌데 그래도 거기에서 선한 것이 창출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셉을 아시죠? 형들에 의해서 버림받았습니다. 노예로 팔렸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다가 마침내 요즘말로 성희롱을 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딱하지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형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노예로 팔렸고, 이제 숨 쉴만하니까 이제는 감옥에 바로 갇혀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졌고 하나님이 궁극적인 주재자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배치하신 그 장소에서 잘 견디어 내었습니다.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왔지요? 하지만 그 높은 사람이 자신들이 팔아버린 동생 요셉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두 번째 또 양식을 사러 왔을 때 요셉이 자기가 누군 지를 공개합니다. 형들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당할 차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때 요셉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ꡒ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맞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한 것 맞습니다. 선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국무총리를 시키려고 애굽에 판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ꡓ(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믿습니까? 아무리 우리를 해하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를 해하려고 달려드는 사람 미워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지요. 자기 밥 먹고 와서 우리를 훈련시키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인데 우리 훈련조교 노릇을 하겠다는 데 우리가 월급도 주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미워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임명하신 훈련 조교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이 시누이든지 시어머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 나를 좋은 인품의 사람으로 단련시키는구나.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없으면 남편 아침에 밥도 안 챙겨 줬을 텐데.. 참 아침밥도 챙겨줄 처지가 못되면 시집을 안가야 됩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가서는 남편이 저기 문닫고 나가는데 “여보, 저녁에 맛있는 것 해 줄게.” 그러면 안 되요. 그러려면 아예 시집을 가지 말던지, 갔으면 밥 좀 해줘요. 사람들이 어찌 그래요. 우리 남자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배가 고프면 화가 난다는 겁니다. 장가가서 아침밥도 못 얻어먹으면 장가 뭣 하러 갑니까? 그러니까 그럴 때는 시어머니가 옆에 있으면 그런 짓 못하거든요. 훈련조교가 있어야 사람을 만들어 가는 거지요.
우리가 상처받을 때에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묻습니다. 절규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600만이 죽어 나가는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부르짖던 것이 “ 하나님, 이 순간에 어디에 계십니까.” 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내게 일어날 비극을 다 막아준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뢰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시련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유혹 앞에 두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용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온갖 어려움, 모욕과 배신과 상처를 겪게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용서하는 것을 배워서 우리 주님의 모습을 닮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시고 우리에게 살길을 허락하셨는데 여러분과 제가 주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용서의 고통을 맛보지 않고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지내려고 생각합니까? 당하고 겪고 하는 가운데서 우리도 용서하는 고통을 겪게 될 때에 우리도 주님을 좀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베푸신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 것인지 놀라운 것인지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2 용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신자로서 여러분의 최고의 간증은 여러분이 받은 상처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 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것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반응하십니까?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핍박을 받을 때에 주님처럼 반응하게 되면 그 순간 주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어떤 것인지 다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당하고 계시는 그 일에 어떻게 반응하기를 바라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일을 지금 겪고 있더라도 상관없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반응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ꡒ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아멘
출처/정근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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