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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상한 지식" (빌3:5-9)
강변교회 성도님과 김명혁 목사님은 복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낮에는 우리 원로목사님을, 저녁에는 저를 불러 주신 것을 보니까 분명 그렇습니다. 노인을 잘 공괴 하는 교회일수록 복을 받습니다.
저도 원로 목사님을 잘 대접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김 목사님을 따라갈 수 없어요.노인 목사님을 극진히 마음으로, 뜻으로, 정성으로 잘 받들어 모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사람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행복추구입니다. 그런데 행복해 지려는 방법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유함으로 행복하려고합니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후회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이런데 초월한 사람이라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또 예뻐짐으로 행복해 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예쁘고 날씬합니다. 행복의 기준을 외적인 것에 두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누리는 것에 대해, 어떤 사람은 날씬한 것과 같은 육신적인 것에 두다 보니까 정말 삶의 소중한 것들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나타나는 것,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행복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이것 하라, 저것 하라”라고 자꾸 주문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이 행복해 지기 위해서 주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명령들, 계명들, 요구들은 다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정말로 행복하고 감사하고, 소망 있고, 능력 있고 실망하지 않고 승리하면서 전진하는 행복한 삶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후로 바울은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행복의 조건들을 순간적으로 포기가 아니고 완전히 버려 버렸습니다. 나의 삶 전체를 바쳐도 아깝지 않은 대상을 발견했다는 것은 축복이요 행복입니다. 이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원찮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되 깊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면 주어지는 복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를 발견하는 복입니다.
나의 발견을 발견하는 것은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내 과거를 알게 되고 내 현재를 , 내 미래를, 내 운명을 나의 근본을 ,그리고 천국을 알게 됩니다. 나의 운명의 시간이 온다 할 찌라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전4:7)”자신만만한 바울은 예수를 깊이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배후에 있는 영적세계를 밝히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옷을 입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보고, 믿고, 소망한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은혜를 입은 분들인 줄 아십니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신앙인들의 값을 알게 됩니다. 칼 바르트는“ 나는 저 십자가를 쳐다보게 될 때 나의 값을 발견하게 된다” 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알았다는 것은 엄청남 기회요, 복이요, 만남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를 알므로 비로소 내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살리는 영이요, 회복의 영이요, 소생의 영이요, 부활의 영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둘째 우리의 인생이 따뜻해집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정말로 내 삶 가운데 우선순위로 주님을 생각하고 살아갈 때 배후에서 그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내 스스로 갈등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는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주일 때문에 좋은 직장을 포기하는 그 젊은이의 미래를 밀기로 작정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님을 깊이 알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게 될 때 내 눈을 떠서 나를 보게 하시고 나의 현재와 미래와 운명과 저 하나님의 나라까지 보게 하시고 나의 인생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은 멋있고 재미있고 감칠맛 나고 감격 있는 삶입니다.
셋째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됩니다.
신앙인은 세상을 보는 눈이 뜨여야합니다.“나”, “우리”라는 범주 속에 갇혀 있으면 옹졸해 집니다. 남한테 무관심해 집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 대해 가장 염려하시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책임감이 없어집니다.
강남에 집이 6채 되는 사람이 17 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집값 상승에 직, 간접적으로 개입을 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는 집 없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재산 증식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부자 동네에는 적십자 회비가 안 걷힌다고 합니다. 눈이 안 뜨여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눈이 뜨이면 위대하고 훌륭한“내”가 아닌 죄 되고 초라하고 부정한 “내”가 보여서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를 보게 됩니다. “너”를 향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웃의 영혼도 보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진정한 배부름은 나도 너도 모두 배 부르는 것이고 진정한 행복은 나도 너도 모두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를 보는 눈은 “나”를 보는 눈이 뜨였을 때 동시에 뜨이는 눈이기도 합니다. 성숙도에 따라 더 뚫어지는 눈으로 우리 “동포”를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기도가 넓어집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형제로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는 눈을 뜨게 만드는 작업 입니다.눈을 떠서 너를 보게 하고 이웃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합니다. 이 뜨여진 눈으로 보면 지금도 주님이 성령의 손을 빌려서 여기 오셔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 역사하시는 손길로 여러분들을 고치고 계십니다. 신유는 병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병들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계속해서 치료하시고 역사하시는 그 자체가 더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깊은 신유인 것입니다. 그 신유의 역사는 예배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병들 수 밖 에 없는 이 세상에서 건강을 유지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오셔서 조용히 섭리하시면서 여러분들의 눈을 여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보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섭리하시는 손길을 보도록 눈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교회 원로 목사님을 대우 해 주신 것 감사드리고 이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고 주 안에서 영안이 뜨여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주께로부터 복을 받는 은혜를 입는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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